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
미디어 세상 방송통신 분야에 전면적 정부 조직개편이 필요하다 코로나19 방역 덕분에 시민들이 깨달은 바가 많다. 그중 첫째는 역시 위기일수록 정부 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민간 기업과 협조하면서, 행정력을 동원해서 척척 일을 해내는 질병관리본부는 감동 그 자체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정부 당국은 2015년 메르스 발생 당시에도 있었던 그 조직임에 틀림없는데, 수행력도 성과도 크게 다르다.
-
미디어 세상 ‘만사 혐오론’을 버려야 한다 이것도 혐오, 저것도 혐오라 한다. 만사 혐오요, 혐오 만정이다. 감염원에 대한 경계도 혐오, 무분별한 경계에 대한 질타도 혐오, 질타를 바로잡는 지적도 혐오라 한다. 혐오는 이제 다른 시민의 부정적 감정표현에 맞서는 일종의 주문이 됐다. 마치 이 주문만 외우면, 주문을 외우는 자의 도덕적 책무는 면제되고 상대편의 혐오 정서만 욕되게 남는다는 식이다.
-
미디어 세상 과도한 확신에 찬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제 분야를 넘으면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에 불과하다. 이번 코로나19 난리 속에서 얻은 잠언이다. 전염병 창궐로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난리에 소란과 혼란을 더하는 꼰대들이 있다. 책임이 모호한 상대에게 호통을 치고, 철 지난 사정을 꺼내 버럭 꾸짖는다. 사실 우리 인구의 절반은 이런 호통과 꾸짖음, 그리고 ‘아무 말 대잔치’급 예언과 충고에 익숙하다. 초등학교 이후 교육 과정에서 필수 과목을 이수하듯이 권위주의적 소통을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일을 당해서 분한 마음이 들더라도 예의치레로 넘어간다. 그러나 전문가라 자처하는 자의 빗나간 예언과 기만적인 충고는 어찌할 것인가.
-
미디어 세상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한 일 영종도에 있는 호텔에서 세미나를 연다길래, 하필 국제공항 근처에서 만날까라고 생각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아니 공항 옆이 안전하다 뭐 그런 건가 싶었다. 호텔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안 보여 일단 안심이었지만, 로비에서 안내하는 관리인에게 기어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관광객은 별로 없는 호텔인가 봐요. 내가 혹시 영화 <부산행>에 나온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악당처럼 보였을까. 불안한 미소를 가진 호텔 관리인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후, 소리를 낮추어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수치심도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 짧은 대화의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는지 서로에게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
미디어 세상 피의사실공표죄를 폐지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법도 있다. 모두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법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 모두가 그 법은 죽었다고 하면서도, 정작 땅에 묻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 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죽은 법을 되살리려 한다. 혹은 이도저도 안되니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현실을 내버려 두고 각자도생이다.
-
미디어 세상 여론조사를 넘어 민심탐구가 필요하다 지나고 보면 뻔해 보이는 일이 있다. 정작 그 자명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당시에는 대다수가 예상치 못했지만 말이다. 민심의 변화가 그중 하나다. 지난 총선을 되돌아보자. 2016년 초에 집권 새누리당은 180석을 넘어 개헌선에 육박할지도 모른다며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수도권에서 대패했고, 1당마저 민주당에 내주고 말았다.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새누리당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치가 생물이라면, 여론은 어떤 생물이라도 삶을 수 있는 물이다. 물이 끓기 전에 이미 내용물은 삶아진다. 물의 온도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만 언제부터 내용물이 익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결과를 보며 놀랄 뿐이다.
-
미디어 세상 사실 충분성이란 언론의 도그마 이른바 ‘조국사태’를 지나며, 공중은 언론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다. 언론에 대해 환멸하고 혐오하는 데에도 지쳤다할까. 기자를 멸칭으로 부르며 조롱해 보았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생각 때문일까. 탐구심이 강한 시민 중에 도대체 우리 언론은 왜 이러는지 들여다보기 시작한 이들도 있다. 언론학자 박영흠이 지난 10월25일 언론정보학회에서 주장한 바가 시사적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관행이 문제라고 했다. 사안별로 ‘야마’를 잡아서 몰아치듯이 보도하고, 출입처에서 흘리는 말을 따로 검토하지 않고 ‘받아쓰기’하다 보면, 언제라도 ‘조국보도’와 같은 혼란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 있다.
-
미디어 세상 집회와 시위의 민족 우리 이제 집회의 민족이라고 하자. 흥이 많아 놀기도 잘하고, 성질이 급해 배달도 잘하지만, 역시 우리는 시위에 능하다. 뜻이 유사한 사람들이 모여 구호를 외치면서, 서로 의지를 확인하며 행동하기를 좋아한다. 무려 일주일 사이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서 거대 집회 세 개를 가뿐히 치르고, 월요일이면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다음에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미디어 세상 조국 사태와 언론 개혁 조국은 이제 한 장관 후보자의 이름이 아니다. 최순실이 그랬듯이, 사태와 정국을 수식하는 관형어가 됐다. 후보자를 둘러싼 공격과 방어, 비난과 옹호, 기대와 절망이 교차하는 가운데 모두 내릴 수 없는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형국이다. 이른바 ‘조국 정국’은 우리 현실이 얼마나 누추한지 드러냈다. 촛불 이후의 정부란 혁명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제도개선도 힘에 부쳐 하는 허약한 정권이란 걸 보여줬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유와 민주의 제도들이 실은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인지도 폭로했다. 눈앞의 정쟁도 걱정이지만, 교육, 검찰, 그리고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 개혁이란 말보다 더 낡은 말이 없다. 언론 쪽이 특히 그렇다. 철마다 개편이 이루어지고, 정권마다 개혁안이 나온다. 그래도 진정한 개혁은 없다.
-
미디어 세상 논변이 귀하고 비유가 헐한 나라 작금의 사정이 구한말 같다고 한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과 같다고도 한다. 인민이 분열하여 정파적으로 싸우는 모습이 해방 직후와 다름없다고 한다. 동족상잔 전쟁이 벌어지기 전 상황과 유사하다는 주장마저 나오는 판이다. 난리가 나겠다는 경계심을 표현한 건지, 난리가 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내비친 것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
미디어 세상 어떻게 훌륭한 언론인이 되는가 여보게 이 박사, 도대체 공정한 뉴스라는 게 뭐요? 20년 전 학위를 마치고 KBS에 첫 직장을 잡아 일할 때 받은 질문이다. 중견 언론인의 진지한 요구였기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고 싶었지만, 갓 박사논문을 마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었다. 아직도 그분을 기억한다. 며칠이 지나도 응답 없는 나를 두고, 박사도 별것 없다는 듯한 표정을 던졌다. 덕분에 그때부터 공정함이 무엇이고, 뉴스 공정성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 탐구하게 되었다. 이후 나는 논문도 몇 개 발표했고, KBS 공정성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는 일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
미디어 세상 불편부당하게 요구하기 피리 한 개를 두고 다투는 세 아이가 있다. 첫째 아이는 자신만이 피리를 불 수 있다고 말하고, 그래서 자기가 피리를 갖는 게 좋겠다고 주장한다. 둘째는 다른 아이들은 부자이고 장난감이 많지만, 자신만 장난감이 없다며 피리를 요구한다. 셋째 아이는 ‘그 피리를 만든 이가 바로 나’라고 말한다. 만든 사람이 가져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누가 피리를 가져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