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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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여론조사에 ‘사망 선고’를 여론조사는 망했다. 미국 대선 개표 방송 중 나온 말이다. 만약 여론조사가 정확했다면, 플로리다주 등 주요 격전지에서 바이든 후보의 득표수가 앞서야 했다. 막상 개표를 하니 격전지마다 초접전이었다. 플로리다에서 트럼프의 승리가 눈앞에 보이자, 한 공화당 전략가가 선언하듯 말했다. “주류 언론보도와 여론조사와 달리 유권자는 우리 예상대로 나왔다.” 이번 미국 대선은 의심과 불신의 대결이라고 부를 만하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결과를 낙관할 이유가 차고 넘쳤다. 누가 봐도 트럼프 정부는 코로나19 대응에 실패했으며, 대통령 국정지지도는 추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당 지지자들은 4년 전 범했던 낙관과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심초사했다. 반면 트럼프 지지자들은 선거 결과에 대해 알 수 없는 자신감을 보였는데, 그것은 주류 언론과 주요 여론조사에 대한 깊은 불신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더욱 기괴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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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징벌을 더하는 방식으로 민주주의를 강화할 수 없다 우리는 말의 효력에 민감한 사람들이다. 말이 씨가 되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고 한다. 심지어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그래서 그런지 말하기에 대한 경계가 지엄하다. 발언의 효력을 알기에 엄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말하기에 대한 경계는 민주공화국에도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진실을 말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형법을 가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주정이다. 개인에 대한 모욕에도 국가가 개입해서 처벌한다. 선거기간 중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후보자나 그의 가족을 비방하는 경우에도 처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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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인공지능 편집자의 미덕 잠시 당신이 새 언론사 편집국장이 됐다고 생각해 보자. 내용적으로 저열하고, 정치적으로 분열하며, 무엇보다 사업상 착실하게 망해가는 기존 언론과 차별된 매체가 필요하다는 전망으로 태어난 언론사 편집국장을 맡았다. 다행스럽게도 당신은 각자 능력과 이념은 다르지만 부지런히 기사를 제공하는 기자들과 기술전문가, 디자이너들을 거느리고 있다. 편집국장으로서 어떻게 뉴스를 배열하겠는가. 우리나라 매체의 편집권자가 일하기 어려운 까닭이 있다. 일단 전투적 정치인과 그의 열성 지지자들은 언제라도 편파성 시비를 일으킬 준비가 돼 있다. 기업과 유명인은 빨리 내렸으면 하는 기사가 있고, 홍보와 기획사는 지속하기를 바라는 내용물이 있다. 하지만 이 모두가 까다롭고, 성마르고, 소란스러운 이용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뉴스 목록만 보고 집어 던지고, 기사 제목마저 끝까지 읽지 않고 댓글을 달고, 한 번 삐치면 복수에 몰두하는 시민들 말이다. 당신은 편집국장으로서 어떻게 기사를 평가해서 갈아치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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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도덕적 우월감으로 타인을 설득할 수 없다 피차 불편한 일이 많다. 문제는 그냥 불편해서 시비하는 정도가 아니라는 데 있다. 패륜이요, 차별이요, 존엄에 대한 도전이라서 참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옷차림에 불과하고, 비유적 용어사용이라고 해도 그렇다. 용서할 수 없단다. 하지장애인에 대한 비유적 용어사용을 비판하며 시작된 쟁론 속에서 애초의 비유가 겨냥했던 정책적 발언의 요점은 사라져 버렸다. 우리 사회가 갑자기 도덕과 윤리의 체험학습장이 된 듯하다. 학습장에서 나누어준 교재는 소용없고, 학습장에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뭔가 배우는 그런 체험학습장 말이다. 몰랐다면 배우고, 배운 자들이 함께 앎의 기쁨을 나누면 그만일 텐데, 진짜 시비는 배운 뒤에 발생한다. 그걸 차별이요, 도전이요, 비하라고 하다니, 그렇다면 도대체 차별이란 뭔지, 도전이 뭔지, 비하가 뭔지 따져 보자고 덤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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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닥쳐 이 고라니 새끼야” 지금 욕 잘하는 동화작가가 인기다.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속 설정이고 배우의 연기일 뿐이지만, 젊은 여류작가가 누구를 상대하더라도 기죽지 않고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시원하다. 찰진 욕설을 예사로 내뱉고, 적절한 시점에 목소리를 깔고 능숙하게 말로 맞받아친다. 예컨대, 꾸짖듯 노려보는 상대를 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알았어, 알았어, 눈으로 씹어 먹겠네 아주.” ‘젊은 여류작가’의 험한 말을 듣다 보면, 이게 뭐라고 그렇게 재미있게 들리는지 이유가 궁금해진다. 그건 아마도 ‘늙은 남류’(없는 말이지만 대조를 위해 사용해 보자) 고위공직자의 순한 말에 우리가 쉽게 감동하는 이유와 같을 것이다. 권력과 말하기 규범 사이에 뭔가 수상한 관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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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광장의 노예무역상 동상을 어찌할 것인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결국 HBO 맥스에 돌아올 것이다. 근사한 새 모자를 쓰고 돌아올지 모른다. 시카고 대학에서 미국 흑인 영화와 매체를 연구하는 재클린 스튜어트 교수는 이 영화에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을 서장으로 붙여서 제공하게 될 것이라 밝혔다. 영화가 돌아온다니, 언제 떠났단 말인가? 지난 8일 반인종주의 시위 정국에서 할리우드 극작가 존 리들리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노예제도를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유색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HBO가 미국의 노예제도와 남부연맹에 대한 “폭넓고 완벽한 그림”을 함께 제공하기 전까지 이 영화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HBO는 “인종주의적 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릇된 것”이라는 응답과 함께 일단 목록에서 영화를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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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주모가 바빠진 나라 우리나라는 몇 등쯤 하는가? 선진국은 어떻게 하는가? 왜 우리는 사정이 다른가? 언제부터인가 정부나 국회가 내놓은 정책보고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질문이다. 결론을 내놓기 전에 거의 예외 없이 이렇게 묻고 답한다. 무슨 제도개선 보고서를 봐도, 어떤 진흥사업 계획서를 봐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정책 전문가란 미국은 이렇고, 북유럽은 저러니, 우리는 요렇게 합시다 정도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일반 시민도 이런 자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유튜브와 페이스북에서 해외소식을 찾아보는데, 문제의식이 비슷하다. 다만 내용이 미묘하게 다르다. 이 나라는 이렇고, 저 나라는 저런데, 우리가 뜻밖에 잘하고 있다는 내용이 많다. 댓글 반응도 흥겹다. 국뽕이 차올라 주모를 부른다. 이 표현은 댓글로 배운 것인데, 도저히 이것 말고 달리 전할 방법을 못 찾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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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방송통신 분야에 전면적 정부 조직개편이 필요하다 코로나19 방역 덕분에 시민들이 깨달은 바가 많다. 그중 첫째는 역시 위기일수록 정부 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이다.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고, 민간 기업과 협조하면서, 행정력을 동원해서 척척 일을 해내는 질병관리본부는 감동 그 자체다.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 정부 당국은 2015년 메르스 발생 당시에도 있었던 그 조직임에 틀림없는데, 수행력도 성과도 크게 다르다. 문득 방송통신 분야를 돌아본다. 우리나라는 이 분야에 3개의 정부부처를 갖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그리고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 기술기반을 고도화하고, 각종 방송통신 및 내용물 관련 서비스제공 사업자를 관리하고, 시민의 민주적 의견형성과 고품질 문화향유를 돕는 정부 당국이 하나가 아니라서 셋이라 좋다고 해야 마땅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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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만사 혐오론’을 버려야 한다 이것도 혐오, 저것도 혐오라 한다. 만사 혐오요, 혐오 만정이다. 감염원에 대한 경계도 혐오, 무분별한 경계에 대한 질타도 혐오, 질타를 바로잡는 지적도 혐오라 한다. 혐오는 이제 다른 시민의 부정적 감정표현에 맞서는 일종의 주문이 됐다. 마치 이 주문만 외우면, 주문을 외우는 자의 도덕적 책무는 면제되고 상대편의 혐오 정서만 욕되게 남는다는 식이다. 일단 이것부터 구분해 보자. 감염원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타인을 경계하는 마음은 불안 또는 염려를 표현한다. 혐오가 아니다. 압도적인 기세로 퍼지는 전염병을 보면서 우리가 함께 느끼는 정서는 공포다. 혐오가 아니다. 병균에 감염된 사람이 단순한 불찰을 넘어선 무모한 행동으로 우리 공동체에 감염을 유발했다면, 그에 대한 책망은 흔히 분노를 동반한다. 혐오가 아니다. 역병의 창궐을 정치적 기회로 활용해서 정적에 대한 증오 발언을 일삼는 자를 보면서, 나는 경멸감을 느낀다. 이는 혐오와 유사하지만, 역시 혐오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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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과도한 확신에 찬 전문가를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제 분야를 넘으면 동네 아저씨나 아줌마에 불과하다. 이번 코로나19 난리 속에서 얻은 잠언이다. 전염병 창궐로 모두가 신경이 곤두서있는데, 난리에 소란과 혼란을 더하는 꼰대들이 있다. 책임이 모호한 상대에게 호통을 치고, 철 지난 사정을 꺼내 버럭 꾸짖는다. 사실 우리 인구의 절반은 이런 호통과 꾸짖음, 그리고 ‘아무 말 대잔치’급 예언과 충고에 익숙하다. 초등학교 이후 교육 과정에서 필수 과목을 이수하듯이 권위주의적 소통을 훈련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가, 이런 일을 당해서 분한 마음이 들더라도 예의치레로 넘어간다. 그러나 전문가라 자처하는 자의 빗나간 예언과 기만적인 충고는 어찌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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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부산행’에서 김의성이 한 일 영종도에 있는 호텔에서 세미나를 연다길래, 하필 국제공항 근처에서 만날까라고 생각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 아니 공항 옆이 안전하다 뭐 그런 건가 싶었다. 호텔 주차장에 관광버스가 안 보여 일단 안심이었지만, 로비에서 안내하는 관리인에게 기어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관광객은 별로 없는 호텔인가 봐요. 내가 혹시 영화 <부산행>에 나온 김의성 배우가 연기한 악당처럼 보였을까. 불안한 미소를 가진 호텔 관리인은 재빨리 주변을 둘러본 후, 소리를 낮추어 대답해 주었다. 나는 안도감과 더불어 수치심도 느꼈는데, 왜냐하면 그 짧은 대화의 순간에 우리가 무엇을 공유하는지 서로에게 너무나 명백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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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피의사실공표죄를 폐지해야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법도 있다. 모두 그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 그 법으로 처벌받은 사례가 없다. 모두가 그 법은 죽었다고 하면서도, 정작 땅에 묻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 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좋은 이유를 별도로 만들어 죽은 법을 되살리려 한다. 혹은 이도저도 안되니 법과 현실이 따로 노는 현실을 내버려 두고 각자도생이다. 피의사실공표죄 이야기다. 형법 제126조는 검찰과 경찰 등 범죄수사를 하는 자가 직무상 습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개하면 처벌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이 법으로 기소된 검사가 없고, 이 법을 의식하며 기사를 쓰는 기자도 없다. 공중도 마찬가지다. 누구도 이 법이 제대로 작동해서 수사 단계에 있는 공인의 중대한 범죄혐의에 대해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원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