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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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탄핵 이후의 소통 질서 어차피 우린 제6공화국에서 벌어질 두 번째 조기 대선을 앞두고 있다. 현직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라는 반헌법적 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견딜 민주공화국이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며칠 후 윤석열이 관저를 떠날지, 몇달 후 그가 파면될지 주술사 점치듯 무당 굿하듯 기다리지 말자. 차분히 또박또박 절차를 밟아 유린당한 헌정질서를 회복하면서 탄핵 이후의 질서는 어떠해야 할지 생각해보자. 박근혜 탄핵 이후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과거와 달리 대통령직 인수위 없이 출범했다는 이유로 정권 초반의 정책적 모호함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문 정부는 적폐청산과 균형외교로 시민적 지지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건만, 정작 야당 시절부터 준비해온 개혁정책들을 입법의제로 제시하는 데 게을렀다. 2016년 이후 대선, 지선, 총선에서 연승했던 민주당은 개혁의제를 주도하지 못했고, 심지어 촛불정신을 반영한다던 정부의 개헌안마저 외면받고 말았다. 이른바 ‘개혁적’이라던 정부는 제도화라는 개혁성과도 없이 속절없이, 위태롭게 정권을 내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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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공화국의 적과 수호자 비상계엄 선포를 확인하고 부랴부랴 하던 일을 접었다. 집으로 향하는 광화문 대로에 계엄군은 보이지 않았다. 집에 도착해서 방송과 인터넷을 동시에 켜니, 한쪽은 계엄포고령을 방송하고 있고, 다른 쪽은 국회의사당 내 대치 상황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나는 페이스북을 켜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렇게 쓰기 시작했다. 한국 언론, 백척간두에 서다. “내일 아침, 한국 언론은 계엄사령부 포고령 제1호에 따라 계엄사의 통제를 받아들여 굴욕적으로 입을 다물 것인가. 아니면 엄중히 사태를 직시하고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결연히 언론자유를 실천할 것인가.”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언론사마다 기자마다 생각이 다르고 현실인식도 다르겠지만, 굴욕적으로 계엄사령부의 언론 통제를 수용하는 언론은 스스로 선언한 자유를 부정하는 격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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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이념에 절고 전략에 찌든 선거 만사인 민주정에서 살다보면 이런 일을 당한다. 이념이니 정체성이니 앞세우고, 전략이니 정책이니 떠들던 자들도 일제히 입 다물고 국민 선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한국의 민주화세력은 2012년 대선에서 단일후보가 나서고도 패하면서 씁쓸하게 결과를 수용해야만 했다. 멀게는 야권 단일화 없이도 이길 수 있다며 분열하여 참패한 1987년 대선 때도 그랬다. 미국 민주당은 2000년 고어와 2016년 힐러리가 대선에서 각각 속절없이 패배하면서 현실을 점검할 기회를 가졌다. 그래도 이번 해리스의 패배는 몹시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고어와 힐러리는 투표자로부터 더 많은 표를 얻고도 선거인단 확보에 실패했지만, 해리스는 박빙으로 붙어 싸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완벽히 진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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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주술적 여론조사를 그만두자 여론조사인가 주술인가. 논란의 인물인 명태균이 미래한국연구소에서 수행했다는 여론조사란 도대체 뭐였을까. 그가 2022년 경남 창원의창 국회의원 보궐선거 공천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한 제20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힘 예비선거 과정에서 뭘 어쨌다는 것인지 결국 밝혀질 일이다. 속단도, 예단도 말고 언론의 다음 폭로기사를 기다리면 좋겠다. 다만 기다리며 생각해 보자. 정당에서 후보공천을 하고 정당 간에 후보단일화를 한다면서 여론조사에 매달린다는 게 가당키는 한가. 여론조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제대로 모집단을 설정하고, 타당한 방법으로 표본을 추출해서, 정당하게 비용을 들여 응답자의 시간을 구매해서, 불편부당하게 묻는 질문에서 나온 응답을 구한다면 말이다. 누구나 여론조사 결과를 정련해서 중대한 결정의 참조자료로 사용해도 좋다. 그러나 책임 있는 조사전문가라면 여론조사 결과만을 갖고 정치적 결단을 대체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비용을 많이 쓰고 공들였다고 해도 여론조사란 민심 탐색 도구일 뿐이며, 그것도 언제나 얼마간은 결함이 있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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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한국 언론에 ‘머로 순간’이 오고 있다 ‘머로 순간’이란 말이 있다. 언론이 거침없이 행동하는 유력 정치인 말을 조신하게 받아쓰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그에게 비판적으로 돌아서는 시점을 말한다. 1950년대 초 냉전시대 미국에서 빨갱이 사냥으로 승승장구하던 조셉 매카시 상원의원은 1954년 마침내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 몰락을 앞당기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 바로 CBS의 머로 기자다. 그는 <지금 봐라(See It Now)>란 방송에서 매카시의 발언이 얼마나 모순인지 고발하면서, “안에서 자유를 저버리면서, 해외에서 지킬 수는 없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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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플랫폼 시대의 이상한 싸움질 아직도 ‘내용이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의적절한 기획에 따라, 훌륭한 이야기를 갖추고, 고품질로 제작한 드라마와 예능은 결국 성공할 수 있다는 요지를 담은 주장이다. 여기서 성공이란 많은 시청자 수와 그에 따른 높은 수익률만 뜻하는 게 아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성취를 포함한다. 애초에 그 말은 드라마나 예능 제작의 가치생산성을 강조하는 정도로 제기된 게 아니었다. 우리나라 매체산업의 전환기에 플랫폼 사업과 비교해서 내용제공 사업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유행했던 말이다. 내가 2010년경 한 방송사업자의 정책전략 세미나에서 그 말을 처음 듣고, 즉각 반박하기 위해 꺼냈던 말이 ‘내용이 왕이면 플랫폼은 여왕’이라는 표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지스러운 비유지만, 나로서는 어쨌든 진심을 담은 주장이었고 그래서 이렇게 되묻기도 했다. 왕과 여왕이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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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소위 진보가 망해가는 이유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밴스의 회고록을 읽어보라. 세계 최강국 부통령이 유력한 자에 대해 뭐라도 배우자는 게 아니다. 그 책에 어떤 목소리가 담겨 있어서다. 누구도 대변하지 않는 목소리에 주목한 저자의 시선도 함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읽기에 지친 독자라면 넷플릭스 검색창에 ‘힐빌리’라고 치면 나오는 영화를 봐도 좋다. 작가로서 성공하자마자 공화당 지지본색을 드러낸 개천용 따위의 글은 안 읽겠다고 다짐한 이도 있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굴지 말자는 게 이 글의 요점이기에, 그리고 현대 정치에서 변절과 충성을 따지는 일은 덧없다는 말을 전하고 싶기에 다시 정색하고 권유한다. 그렇다면 서점에 들러 <내 이름은 데몬 코퍼헤드>를 찾아보자. 다수의 유명 평론가가 읽은 사회파 소설이어서도, 퓰리처상에 빛나는 신작이어서도 아니다. 재미도 재미지만, 어느 동네든 어느 때든 가난, 중독, 그리고 절망에 빠진 자들의 목소리를 내버려 둘 수 없는 까닭을 이 책에서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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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세상 제도를 망치는 법 방송통신심의위원회도 그랬지만 국민권익위원회를 보니 자명하다. 제도가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다. 최소한의 내적 정합성도 갖추지 못한 위원회 결정은 그 과정과 결론만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제도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된다. 결정의 타당성에 대한 시비와 별도로, 애초에 그렇게 막가는 방식으로 운영해도 되는 것이냐는 탄식이 나온다. 예외가 일상처럼 보이고, 남용이 예상 가능한 순간 제도는 이미 망가져 있다. 생각해 보면, 막가자는 운영을 완벽하게 막아낼 수 있는 제도란 없다. 아무리 탄탄하게 외압을 막자고 위원회 구성을 규정하고, 아무리 촘촘하게 내적으로 정합한 규정을 만들어도 그렇다. 누군가 작정하고 제도를 남용하겠다고 나서면 소용없다. 남용이란 개념 자체가 이미 작동하는 제도적 장치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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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악인의 지렛대를 피하려면 이대로 흘러가게 둘 수 없다. 우리 공영방송 이야기다. 지배구조 개편, 수신료 제도 점검, 뉴스 공정성 보장 등 해묵은 과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 풀풀 냄새를 풍기며 방치되고 있다. 한때 공영방송이란 말만 나와도 부르르 떨며 갑론을박하던 자들은 어디로 갔나. 말 많고 탈 많던 공영방송은 이제 전망도 대안도 없이 무기력하게 새 국회 구성을 기다리고 있다. 제도적으로 방치되어 있건만 시민은 공영방송을 잊지 않고 있다. 공영방송 뉴스는 아직은 시민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뉴스경로 중 하나다. 옥스퍼드 로이터연구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공영방송 제도를 운영하는 19개 국가의 응답자들 중에서 우리 시민은 공영방송의 사회적 중요성 평가를 5번째로 높게 기록했다. 어쩐지 정쟁에 몰두해온 매체정책 엘리트들만이 ‘이 계륵 같은 제도를 어찌할꼬’라는 표정을 지으며 난감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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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 후대는 엉망진창 우당탕쿵탕 흘러가는 이 사태를 뭐라고 부를지 모르겠지만, 일단 ‘민희진 기자회견’이라 불리는 이 사건의 내용과 형식 간 모순이 압도적이다. 요컨대 기자회견이라면서 기자들이 한 일이 별로 없다. 있었다면 민희진 대표의 비상하고도 비장한 말하기에 추임새를 넣어 준 일이다. 돌이켜 보면 기자가 아닌 다른 누가 말을 거들었어도 달라질 게 별로 없었다. 기자가 소용없는 기자회견이라니, 이런 당착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실은 그랬기 때문에 우리가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역대급 드라마가 펼쳐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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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다음 국회는 방통심의위를 개혁해야 애쓰모글루의 <권력과 진보>를 읽다보면 ‘전망 과두체’란 개념을 만난다. 저자의 정의에 따르면, 유사한 배경과 세계관, 그리고 열정을 지녔지만, 비슷한 맹점을 공유하는 기술 지도자 집단을 뜻한다. 이 책의 요점이 기술이란 곧 제도요, 따라서 제도적 설계를 뒷받침하는 전망과 경쟁 담론들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니 전망 과두체를 ‘제도의 전망을 공유하는 지도자들’로 확장해서 이해해도 좋겠다. 이 나라 매체제도를 통제하는 과두체의 전망이 어둡고 위태롭다. 민주정에서 과두체가 위험한 이유는 자명하다. 유사한 사고방식을 가진 자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배제하면서 파괴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특히 전망 자체가 결국 과두체의 이익만 돌보는 이기적인 것이라면 시민은 그런 과두체를 용납해선 안 된다. 애쓰모글루는 그래서 부지런히 대항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야만 과두체의 맹점을 지적할 수 있고, 제도 개선을 위한 정책경쟁을 도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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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세상 세기의 판결이 될까, 그저 혼란일까 지금 미국 연방대법원에 수정헌법 제1조 관련 재판이 하나 진행 중이다. 여기에서 인터넷 담론 지형을 뒤흔드는 세기의 판결이 나올지 모른다. 인터넷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내용중재(content moderation)’하는 행위를 헌법적 권리로 보아 과도한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플랫폼 사업자가 자기 사이트에서 특정 내용물을 삭제하거나 재배열하는 행위는 일종의 ‘사적 검열’이기에 규제해야 마땅하다는 텍사스와 플로리다의 새 법을 합헌이라고 판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