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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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화 도중 ‘옛날’이 자주 소환되곤 한다. “옛날에는 그랬었잖아.” “옛날이랑 달라졌네?” 같은 형태로 주로 쓰인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전을 가리키는 옛날이다. 옛날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성세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이렇게 고쳐 말한다. “그냥 속 시원히 꼰대라고 이야기해. 우리도 옛날에 선생님들을 가리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선생님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또다시 말 속에 옛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옛날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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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혹시나’의 힘 친구 둘과 약속이 있어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약속 시간까지 30분쯤 여유가 있어 랩톱을 켰다. 뭐라도 쓸 수 있을까 기대한 건 아니었다. 예열만 하다 달아오르지 못한 채 랩톱을 덮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글 창을 띄워두고 포털에 접속했다. 내 글쓰기 루틴이다. 총선, 선거법 위반, 의료 대란, 대국민 사과, 잡히지 않는 먹거리 물가, 빈집 싸움, 막말 논란…. 분노와 우울을 유발할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포털이 제공하는 뉴스의 제목을 일별한 후, 개중 하나를 골라 클릭했다. 기사 하나를 다 읽었을 때 친구 A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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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한 수 접는 마음 동네 카페, 앞 테이블에 앉은 아빠와 아이가 종이접기에 한창이다. 동영상을 보고 따라 접는 모습에서 신중함과 열정이 동시에 느껴진다. “방금 어떻게 한 거야? 다시 앞으로 좀 돌려보면 안 돼?” 손이 느린 아이가 아빠에게 부탁을 한다. “실은 아빠도 제대로 못 봤어. 다시 함께 보자.” 마음 너른 아빠가 아이에게 속삭인다. ‘다시’와 ‘함께’에 힘입어 아이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영상 속 실력자가 종이 접는 모습을 바라본다. 머릿속으로는 종이를 열심히 접고 있는 1분 뒤 자기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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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오늘 한 장면 아버지 기일을 앞두고 고향에 갔다. 책상 서랍을 열었더니 낡은 노트가 한 권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쓴 노트일까?’ 생각하며 노트를 펼쳤다. 노트 상태는 오래됐지만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의 손때가 거의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빛바랜 노트 첫 장에 검은색 사인펜으로 ‘한창’이라고 두 글자가 적힌 게 다였다. 분명 내 글씨였다. 정확히는 20대 시절의 글씨였다. 20대 후반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오른쪽 팔꿈치 관절을 크게 다치면서 손목 관절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때를 기점으로 글씨체가 달라졌다. 그러니 그 글씨는 사고 이전에 쓰인 것일 테다. 글자가 쓰인 시기를 특정했다고 해서 의문이 풀린 것은 아니다. 한창이라니, 저 단어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에는 분명 새 노트였을 텐데, 왜 저 단어만 덩그러니 적힌 것일까.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생각만 깊어졌다. 맥없이 노트를 덮는데 머릿속에서 하나의 장면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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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미안해하는 사람 세밑에 고병권의 산문집 <사람을 목격한 사람>(사계절, 2023)을 읽었다.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끝나는 책이었다.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에 두 번째 사람이 있고, 그 두 사람을 묵묵히 지켜보는 세 번째 사람이 있다. 저자는 세 번째 자리에 서서 이 사람들을 기록한다. 아프고 미안한 사람, 보이지 않는 사람, 포획된 사람, 함께 남은 사람, 싸우는 사람, 연대하는 사람을.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작아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이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러 귀를 기울여야만, 듣겠다고 작정해야만 들리는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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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여행의 이유는 여유다 나리타 공항에서 이 글을 쓴다. 공항에 오는 데만 해도 우여곡절이 있었다. 일행 중 하나가 숙소에 여권을 두고 와서 택시를 돌려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공항으로 가는 열차표를 잘못 구매하는 바람에 내릴 때 차액을 지급하는 소동도 있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중요한 순간에는 어김없이 비언어적 요소를 동원해야 했다.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예전의 나라면 절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문득 3주 전 있었던 독일 출장이 떠올랐다. 프랑크푸르트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비행기로 갈아탔는데, 짐이 도착하지 않는 우발사고가 있었다. 항공사에서는 그저 기다리라고 했다. 이틀 안에는 짐이 도착할 것이라 했다. ‘이틀’을 전달하는 태도가 대수롭지 않고 느긋하기까지 해서 상대적으로 더 조바심이 났다. 혼자였다면 발만 동동 굴렀을 테지만, 일행이 있었기에 기억할 만한 일화가 되었다. 함께여서 극복할 수 있었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선선히 웃어넘길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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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가의 인생 “가에 대세요, 가에.” 친구 차를 타고 먼 거리 출장길에 올랐다. 숙소 주차장이 꽉 차 있어서 당황하던 찰나, 때마침 밖에 나온 주인분이 말씀하셨다. “가상이요. 가상에 대세요.” 경상도에 왔는데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서 잠시 귀를 의심했다. “어디의 가요? 어느 가상이요?” 친구가 다급히 물었다. “저기 가요.” 주인분이 가리킨 곳에는 차 한 대가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밭을 것 같은데요?” “가상에 잘 대면 괜찮아요.” 운전을 잘하는 친구 덕에 무사히 가에 주차할 수 있었다. 숙소로 올라오는데 자꾸 헛웃음이 났다. 예의 가상이 가상(假想)이나 가상(假像)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절대 차를 대지 않을 곳이었다. 가상의 적을 만들고 가상의 세계에 빠져든 사람만이 그 공간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환영을 보듯 현실 속에서 거짓 형상을 마주하는 사람만이 그 공간에 감히 주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가’라는 단어의 비밀을 하나 발견한 듯도 싶었다. “‘가’의 향연이었네. 그렇지?” 친구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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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우리에겐 더 다양한 말이 필요하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이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한가위 연휴가 겹쳐 많은 이들이 따로 또 함께 시청했을 것이다. 연휴의 어느 날 찾았던 식당에서도 아시안게임이 중계되고 있었다. 셔틀콕이 아슬아슬하게 네트를 넘어가고 축구공이 시원하게 잔디밭을 가를 때 입이 떡 벌어졌다. 먹기 위해서 벌린 입이 아니다. 나도 모르게 벌어지는 입이다. 각자의 탁자를 앞에 둔 채,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화면으로 쏠려 있다. 탄성이 터질 때 감탄과 탄식이 자리를 뒤바꾸는 건 예사다. 승패가 결정되면 사람들은 다시 탁자 위로 고개를 수그린다. 승부가 나는 것도 아닌데 일제히 손이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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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힘입기, 마음먹기, 되살기 얼마 전에 이사했다. 이사는 단순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아니다. 버스 노선, 장보기, 산책로, 인근 편의 시설, 분리배출 방식, 조망 등 생활의 많은 부분이 변화한다. 오래전에 살았던 동네로 다시 왔더니,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낯섦 속에서 찾아오는 익숙함은 안온함을 가져다준다. 익숙함 속에서 찾아오는 낯섦은 일상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낯섦과 익숙함이 둘 다 있어서 적이 설레고 적잖이 안심되었다. 상가의 간판들이 변했지만, 거리를 거닐 때 예전의 감각이 돌아오는 듯해 기분 좋았다. 여전한 것들과 달라진 것들 사이를 누비다 잠깐 멈춰 서서 관성의 반대말이 뭘까 골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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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다르게 사는 상상 서울 마포중앙도서관 앞 조형물에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도서관을 지나갈 때면 이 조형물을 마주하게 되는데 모두가 멈춰 서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위의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아니다. 도서관에 들어서려는데 엄마와 함께 도서관에 온 아이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책이 욕심이 많네!” 눈이 휘둥그레진다. 달려가 무슨 말인지 묻고 싶지만, 잠자코 기다린다. “어떤 날에는 친구랑 놀기도 하고 가족 여행을 갈 수도 있잖아. 그런 날에도 입안에 가시를 돋치게 한다니, 완전 욕심쟁이잖아.” 그 말을 듣고 엄마가 큰소리로 웃는다.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는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진다. 사람의 처지가 아닌, 책의 입장에서 저 문장을 해석하는 것으로부터 ‘다름’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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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위로는 노크다 “힘들었겠다.” 이 말을 듣는데 기다렸다는 듯 눈물이 난 적이 있다. 단순히 내가 힘들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어서는 아닐 것이다. “괜찮을 거야”나 “나아질 거야”처럼 무책임한 낙관과 동떨어진 말이어서도 아닐 것이다. 그 말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듯, 그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그때 내게 필요했던 말이 바로 저것이었다. “힘들었겠다.” 힘듦을 인정받는다고 해서 처지가 달라지지도 않고 심신을 짓누르는 하중이 가벼워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저 말이 고팠을까. 어째서 속절없이 눈물을 쏟아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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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물불 가리지 않기 물을 마실 때마다 불을 생각한다. 불을 피울 때마다 물을 떠올린다. 물과 불, 이름은 비슷하나 성질은 전혀 다른 두 물질 말이다. 불 위에 물을 올려두고 끓이다 보면 불의 힘이 불끈 솟는 게 느껴진다.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는 장면을 보면, 끓어오르는 것을 잠재우는 물의 위력에 새삼 놀란다. 4월이면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세월호 참사와 최근 캐나다 동부에서 서부로 확산한 산불 소식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물과 불의 위험성을 깨닫곤 한다. 사람이 사는 데 필수 불가결하지만, 잘 다루지 않으면 언제든 인류를 위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