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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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찾는 일과 되찾는 일 찾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없는 것을 얻거나 여기 없는 사람을 만나고자 살피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희망과 이상을 좇고 새집과 새 친구를 구하는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인생의 목표를 간구하는 일에 대해. 잃거나 빼앗기거나 맡기거나 빌려주었던 것을 돌려받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유실물을 다시 손에 넣고 상실했던 주권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헤아려보건대 찾는 일의 근간에는 으레 절박함이 자리하고 있다. 찾는 일은 환희와도 연결된다. 부푼 마음으로 고향을 찾을 때, 숨 돌리기 위해 여행지를 찾을 때 우리는 설렌다. 안식처나 해방구를 발견한 사람처럼 기쁘다. 좋은 물건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모든 일의 중심에 양심을 두는 일 또한 능동적으로 찾는 행위다. 여기에는 취향과 신념을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관공서, 병원 등 기관을 방문하는 일은 회복을 통한 ‘찾기’의 실천이다. 잃어버린 꿈과 명예, 신뢰와 긍지, 심신의 건강을 원래의 상태로 돌이킴으로써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겠다는 적극적 선언이다. 찾는 사람은 결심한 사람이고, 나아가 그 결심을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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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밥심과 갈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야!” 식당에 앉아 있는데 안쪽 테이블에서 포효하듯 들려온 말이다. 그러자 부끄럽다는 말, 뻔뻔하다는 말, 지금이 21세기가 맞느냐는 말이 연이어 쏟아져 나온다. TV 화면과 테이블 위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람들이 밥을 욱여넣는다. 밥심으로 다시 일해야 한다고 한탄한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 손으로 새벽까지 물건을 날라야 한다고 한다. 한동안 뉴스를 보는 게 괴로웠다. 새 소식이 늘 희망적이지 않음을 안다. 그것이 으레 난데없음, 어이없음과 함께 찾아옴을 모르지 않는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닐 때마다 시민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깨닫지만, 다음날이 되어도 변한 것이 없다는 걸 발견하는 순간 맥이 빠져 버린다. 밥심으로 다시 일하러 나가지만 돌아올 때면 가슴 어딘가에 숭숭 구멍이 나버린 것 같다. 의미 있던 일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느낌이 무기력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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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안식을 위한 안식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언제부터 “한 해가 저물다”란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차분해진다. 설렘은 잠시 눌러두고 가만히 올해를 돌아보기 시작해서일까. 꼼꼼한 사람이라면 이미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테지만, 기념일 다음날 목격되는 거리 풍경처럼 내게 마무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좀처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곳곳에 놔두고 온 미련 때문일까, 정리 또한 깔끔하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저물다’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풍경은 어둠일 것이다. 날이 다 저문 뒤에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처연한 뒷모습을 그려보며 쓸쓸함에 동참하기도 한다. “저무는 인생”이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 않게 다가올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사이좋게 나이를 먹으니까.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들뜨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무수한 저묾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될 수 있었음을 깨닫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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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어떤 단어는 삶을 관통한다 20년 전의 일이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블로그를 개설해야겠어!”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그 길이 오르막길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비탈진 길을 걸을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니까. 그 힘이 간혹 난데없는 결심을 싹 틔우기도 하니까. 내가 살던 집은 언덕에 있었다. 일명 고시촌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보증금과 월세가 조금씩 내려가던 길이었다. 안온해 보였지만 속을 까뒤집어보면 치열함으로 들끓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 길을 오르면서 나는 언젠가는 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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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숨은 보금자리 찾기 며칠 지역 출장을 다녀왔더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씻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여기가 내 누울 자리구나 싶다. 침대 옆에 놓인 읽다 만 책을 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흘 전으로 자분자분 돌아갈 시간이다. 읽고 있던 책은 오수영이 쓴 <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고어라운드, 2024)이다. 둘 다 우리가 매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누군가 “제대로?”라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일의 온도와 살아가는 일의 채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뜻대로 사랑하고 잘 살아가고 싶은 계획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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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짐작의 힘 상대의 낯빛을 살핀다. 밝은지 어두운지, 밝음과 어두움이 혼재되어 있는지. 사람의 몸에 빛과 그림자가 수시로 통과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것이다. 상대가 말할 때 함께 나오는 기운을 헤아린다. 그것이 뿜어져 나오는지, 새어 나오는지 파악한다. 뿜어져 나올 때면 들뜸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새어 나올 때면 어떻게 기운을 북돋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이 먼저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상대의 그것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완만한 상승을 노리고 말에 말을 차근차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알려준 ‘처음’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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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매일매일 탐구 생활 초등학교 다닐 적에 ‘탐구 생활’이라는 학습 교재가 있었다. 보통 방학하는 날에 받았는데, ‘탐구 생활’의 빈칸을 채우는 일은 일기 쓰기만큼 어려웠다. 커다란 원에 하루치 시간표를 그려 넣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미루지 않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깨닫기도 했다. 그걸 깨달은 게 개학 전날인 게 문제였다. 당시엔 신문 말고 지난 날씨를 알 길이 없었기에 일기를 몰아 쓸 때면 늘 진땀이 났다. 여름방학 시기라 ‘탐구 생활’이 떠올랐지만, 국어사전을 펼쳐 탐구의 뜻을 찾아보고 나니 생각이 길어졌다. 먼저 첫 번째 탐구. 탐구(探求)는 찾을 탐 자, 구할 구 자가 결합한 데서 유추할 수 있듯, “필요한 것을 조사하여 찾아내거나 얻어냄”이란 뜻이다. 찾기와 얻기가 아닌, 찾아내기와 얻어내기다. ‘내다’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스스로 힘으로 끝내 이루어짐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탐구에 실패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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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귀담아듣는 일은 장하다 오랫동안 진행하던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마지막 녹음을 마쳤다. ‘마지막’과 ‘마치다’는 둘 다 끝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이 둘이 함께 있으니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6년 하고도 3개월이었다. 실감난다고 썼으나 아마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마침표가 선명해질 것 같다. 27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결국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최화정님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너무너무 수고했고 너무너무 장하다. 내가 늘 칭찬하잖아. 무슨 일을 오래 한다는 건 너무 장하고, 너는 장인이야. 훌륭하다”라는 윤여정님의 음성 편지를 듣고 오열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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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요리와 글쓰기 “오밤중에 뭘 또 만들어?” 방문을 열고 나오며 형이 묻는다. 별도리가 없다는 듯 씩 웃고 만다. 도마 위에는 토막 난 애호박과 양파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늘도 글이 잘 안 풀린 거야?” 형이 다시 묻는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곧바로 들기름을 두르고 프라이팬 위에서 지지고 볶는 시간이 이어진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춘다. 이윽고 완성된 애호박볶음 위에 통깨를 솔솔 뿌린다. 오밤중에 뭘 또 만드는 시간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고작 20분 정도가 지났다. 원고가 잘 안 풀리거나 다 쓴 원고가 영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요리에 돌입한다. 요즘 들어 요리하는 횟수가 부쩍 늘어난 것을 보니 헛웃음이 난다. 글쓰기 실력이 늘어야 하는데 요리 실력만 향상되고 있다. 20분 만에 내일의 밑반찬이 생겼다는 뿌듯함도 잠시, 오늘 하루도 공쳤다는 슬픔이 찾아온다. 글쓰기는 왜 매번 어려울까. 앉은자리에서 뚝딱 완성되는 기적은 평생 일어나지 않을 셈인가. 그럼에도 나는 왜 쓰는 일에 이리도 안달복달 매달리는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다 보면 언젠가 독의 밑이 밑반찬처럼 생겨날 거라 믿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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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비지의 열 번째 뜻 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깊어지면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찌어찌하여 바쁜 사람이 되었지만, 여유는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덤벙대기 일쑤다. 호기롭게 걷다가 얼음판 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말이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철두철미보다는 용두사미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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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 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화 도중 ‘옛날’이 자주 소환되곤 한다. “옛날에는 그랬었잖아.” “옛날이랑 달라졌네?” 같은 형태로 주로 쓰인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전을 가리키는 옛날이다. 옛날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성세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이렇게 고쳐 말한다. “그냥 속 시원히 꼰대라고 이야기해. 우리도 옛날에 선생님들을 가리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선생님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또다시 말 속에 옛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옛날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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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혹시나’의 힘 친구 둘과 약속이 있어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약속 시간까지 30분쯤 여유가 있어 랩톱을 켰다. 뭐라도 쓸 수 있을까 기대한 건 아니었다. 예열만 하다 달아오르지 못한 채 랩톱을 덮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글 창을 띄워두고 포털에 접속했다. 내 글쓰기 루틴이다. 총선, 선거법 위반, 의료 대란, 대국민 사과, 잡히지 않는 먹거리 물가, 빈집 싸움, 막말 논란…. 분노와 우울을 유발할 걸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포털이 제공하는 뉴스의 제목을 일별한 후, 개중 하나를 골라 클릭했다. 기사 하나를 다 읽었을 때 친구 A가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