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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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몰라도 좋아요 청소년 시집 <마음의 일>(창비교육, 2020)에 나는 ‘몰라서 좋아요’라는 시를 실었다. 청소년 시기의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았다. 보기에서 구석기시대 유물을 골라낼 줄 알고 삼각함수 문제를 풀 수도 있었지만, 친구의 의중을 파악하고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모르는 목소리/ 모르는 얼굴/ 모르는 맛/ 모르는 감정/ 모르는 내일// 모르는 것투성이이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만은 알아요// 몰라요/ 몰라서 좋아요”라는 구절에는 ‘모름’을 긍정할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아는 게 힘이라는 데 동의하면서도, 모르는 게 약이라고 애써 믿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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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기다림에 어울리는 말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탕웨이)는 남편이 살해된 사건의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에게 이렇게 말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을까봐.” 그는 남편의 죽음에 동요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곧장 용의 선상에 오르지만, 정작 관객들에게 오랫동안 남는 것은 다름 아닌 ‘마침내’라는 단어다. 서래가 한국말이 서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인지, 사건의 종결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단어인지 알쏭달쏭하기 때문이다. 달성의 느낌이 강한 부사 ‘마침내’는 영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어찌 보면 만나는 일과 헤어지는 일 모두 ‘마침내’의 자장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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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발견하는 글쓰기 얼마 전부터 글쓰기 강의를 다시 시작했다. 강의 제목은 ‘발견하는 글쓰기’다. 학교나 기관에서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어 연속 강의는 잘 수락하지 않는데 용기를 냈다. 글쓰기는 작은 용기에서 비롯하고 커다란 용기로 마무리되니까. 내가 글쓰기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었는지, 글쓰기가 내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만큼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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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찾는 일과 되찾는 일 찾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 없는 것을 얻거나 여기 없는 사람을 만나고자 살피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희망과 이상을 좇고 새집과 새 친구를 구하는 일에 대해. 모르는 것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사건의 원인을 밝히고 인생의 목표를 간구하는 일에 대해. 잃거나 빼앗기거나 맡기거나 빌려주었던 것을 돌려받는 일에 대해, 그러니까 유실물을 다시 손에 넣고 상실했던 주권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 헤아려보건대 찾는 일의 근간에는 으레 절박함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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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밥심과 갈무리 “나라 꼴이 말이 아니야!” 식당에 앉아 있는데 안쪽 테이블에서 포효하듯 들려온 말이다. 그러자 부끄럽다는 말, 뻔뻔하다는 말, 지금이 21세기가 맞느냐는 말이 연이어 쏟아져 나온다. TV 화면과 테이블 위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람들이 밥을 욱여넣는다. 밥심으로 다시 일해야 한다고 한탄한다. 나라 꼴이 말이 아닌데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한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든 손으로 새벽까지 물건을 날라야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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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안식을 위한 안식 한 해가 저물어간다. 언제부터 “한 해가 저물다”란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연말이 가까워질 즈음이면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차분해진다. 설렘은 잠시 눌러두고 가만히 올해를 돌아보기 시작해서일까. 꼼꼼한 사람이라면 이미 내년 계획을 세우고 있을 테지만, 기념일 다음날 목격되는 거리 풍경처럼 내게 마무리는 복잡하기만 하다. 좀처럼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곳곳에 놔두고 온 미련 때문일까, 정리 또한 깔끔하게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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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어떤 단어는 삶을 관통한다 20년 전의 일이다. 집에 가는 길에 문득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블로그를 개설해야겠어!”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때 그 길이 오르막길이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비탈진 길을 걸을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니까. 그 힘이 간혹 난데없는 결심을 싹 틔우기도 하니까. 내가 살던 집은 언덕에 있었다. 일명 고시촌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위로 올라갈수록 보증금과 월세가 조금씩 내려가던 길이었다. 안온해 보였지만 속을 까뒤집어보면 치열함으로 들끓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그 길을 오르면서 나는 언젠가는 내려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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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숨은 보금자리 찾기 며칠 지역 출장을 다녀왔더니 온몸이 찌뿌듯하다. 씻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여기가 내 누울 자리구나 싶다. 침대 옆에 놓인 읽다 만 책을 편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흘 전으로 자분자분 돌아갈 시간이다. 읽고 있던 책은 오수영이 쓴 <사랑하는 일로 살아가는 일>(고어라운드, 2024)이다. 둘 다 우리가 매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누군가 “제대로?”라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는 일의 온도와 살아가는 일의 채도는 사람마다 다르고, 뜻대로 사랑하고 잘 살아가고 싶은 계획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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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짐작의 힘 상대의 낯빛을 살핀다. 밝은지 어두운지, 밝음과 어두움이 혼재되어 있는지. 사람의 몸에 빛과 그림자가 수시로 통과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말문을 여는 것이다. 상대가 말할 때 함께 나오는 기운을 헤아린다. 그것이 뿜어져 나오는지, 새어 나오는지 파악한다. 뿜어져 나올 때면 들뜸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새어 나올 때면 어떻게 기운을 북돋울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자신이 먼저 에너지를 발산함으로써 상대의 그것을 끌어올릴 수도 있고, 완만한 상승을 노리고 말에 말을 차근차근 보탤 수도 있을 것이다. 친구가 알려준 ‘처음’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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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매일매일 탐구 생활 초등학교 다닐 적에 ‘탐구 생활’이라는 학습 교재가 있었다. 보통 방학하는 날에 받았는데, ‘탐구 생활’의 빈칸을 채우는 일은 일기 쓰기만큼 어려웠다. 커다란 원에 하루치 시간표를 그려 넣는 것부터가 고역이었다. 미루지 않는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절히 깨닫기도 했다. 그걸 깨달은 게 개학 전날인 게 문제였다. 당시엔 신문 말고 지난 날씨를 알 길이 없었기에 일기를 몰아 쓸 때면 늘 진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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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귀담아듣는 일은 장하다 오랫동안 진행하던 도서 팟캐스트 <책읽아웃>의 마지막 녹음을 마쳤다. ‘마지막’과 ‘마치다’는 둘 다 끝을 암시하는 단어인데, 이 둘이 함께 있으니 비로소 끝났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6년 하고도 3개월이었다. 실감난다고 썼으나 아마도 시간이 좀 흐른 뒤에야 마침표가 선명해질 것 같다. 27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하차하면서 결국에는 눈물을 참지 못했던 최화정님이 얼핏 떠올랐다. 그는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으나 “너무너무 수고했고 너무너무 장하다. 내가 늘 칭찬하잖아. 무슨 일을 오래 한다는 건 너무 장하고, 너는 장인이야. 훌륭하다”라는 윤여정님의 음성 편지를 듣고 오열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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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요리와 글쓰기 “오밤중에 뭘 또 만들어?” 방문을 열고 나오며 형이 묻는다. 별도리가 없다는 듯 씩 웃고 만다. 도마 위에는 토막 난 애호박과 양파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오늘도 글이 잘 안 풀린 거야?” 형이 다시 묻는다. 나는 여전히 웃고 있다. 곧바로 들기름을 두르고 프라이팬 위에서 지지고 볶는 시간이 이어진다. 다진 마늘을 듬뿍 넣고 새우젓을 넣어 간을 맞춘다. 이윽고 완성된 애호박볶음 위에 통깨를 솔솔 뿌린다. 오밤중에 뭘 또 만드는 시간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고작 20분 정도가 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