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만날 때면 대화 도중 ‘옛날’이 자주 소환되곤 한다. “옛날에는 그랬었잖아.” “옛날이랑 달라졌네?” 같은 형태로 주로 쓰인다. 짧게는 5년, 길게는 20년 전을 가리키는 옛날이다. 옛날을 많이 쓰면 쓸수록 기성세대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친구가 이렇게 고쳐 말한다. “그냥 속 시원히 꼰대라고 이야기해. 우리도 옛날에 선생님들을 가리켜….” 말을 잇지 못하는 이유가 느닷없이 선생님이 떠올라서는 아닐 것이다. 또다시 말 속에 옛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옛날 없이 이야기가 진행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옛날의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음은 분명한 듯하다. 어제의 소식은 더 이상 뉴스가 되지 못한다. 바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지난주의 만남이 아득하게 느껴진다. 공원에서 만난 아이는 숙제 다 했느냐는 아빠의 물음에 “옛날에 다 했어요!”라고 대답한다. 진작을 강조하는 과장법일 테지만, 이는 시시각각 급변하는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개봉한 지 한 달이 지나면 영화는 옛날 영화가 되고 출간된 지 두세 달이 지나면 신간은 구간의 자리로 밀려난다. 그 틈을 비집고 새로운 것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옛날에 머물지 않으려고, 옛날로 밀리지 않으려고 하릴없이 몸과 마음만 바빠진다.
얼마 전엔 ‘어제가 옛날이다’라는 표현을 접했다. “변화가 매우 빨라 짧은 시간 사이의 변화가 아주 크다”라는 뜻이라 한다. 어제가 옛날이니 그제는 고릿적일 것이다. 나도 모르게 과거의 유행어가 튀어나오면 낡은 옛말을 쓰는 늙은 사람 취급을 받는다. 옛날 분위기를 느끼고 싶어 복고풍의 상점을 찾지만, 옛날 사람이 되는 일은 적극 거부한다. 이런 식이라면 옛날이야기는 설화로, 옛정은 전생의 감정으로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상대가 가리키는 옛날과 내가 떠올리는 옛날 사이에 시차가 있는 것도 문제다. 누군가한테는 옛날이 내게는 얼마 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각자의 옛날이 동상이몽의 풍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옛날이라는 단어는 오묘하다. 그것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을 일컫기도 하고 소싯적이나 한창때를 가리키기도 한다. 유행에 기민하게 반응하는 이에게 작년 이맘때 산 옷은 옛날 옷처럼 느껴질 것이다. 밀물 들 듯 쏟아지는 뉴스에 허우적대다 보면 지난 총선도 옛날 일 같다. 어젯밤 상념이 오늘 아침 희소식에 자취를 감추면 그것은 곧장 옛날 생각이 된다. 조선시대도 옛날이고 한·일 월드컵이 개최된 2002년도 옛날이다. 첫사랑은 늘 옛사랑 같고 얼마를 살았든 고향 집은 옛집이다. 몸은 옛날 같지 않고 옛날에 품었던 꿈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근사하게 느껴진다. 옛날은 환상을 자극하면서 못다 이룬 것들을 눈앞에 와르르 쏟아낸다. 옛날 앞에서는 누구나 속수무책이 된다.
10년 전 그제 세월호 참사가 있었다. “아직도?”라고 묻는 이에게 “여전히”라고 답하고 싶다. 얼마 전 세월호 참사가 화두에 오른 자리가 있었다. “옛날 일이잖아.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지.” 누군가가 그 말을 받았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문제가 해결되어야지. 시곗바늘이 돌아간다고 무조건 미래가 되는 것은 아니잖아.” 그는 옛날이 되지 못한 옛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이 옛날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상실의 고통과 슬픔 안에서 시간은 낡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면 시간 경과와 상관없이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늘을 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어제의 일을 짊어지고 사는 것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강산이 변하는 동안 어떤 감정은 더욱 진해지기도 한다. 내가 그 안에 적극적으로 머물고 있다면 제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한들 옛날은 없다. 매일매일 진해진 감정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노란 리본은 오늘도 노랗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