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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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학살이 돈이 되는 세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뼈만 남은 유대인, 사악한 나치, 혹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독일인 쉰들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 강제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한 나치 친위대 관사에서 자신이 꿈꿔온 중산층 정상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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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용기에 대하여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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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일본 에이브이(AV) 배우들이 참여하는 ‘성인 페스티벌’이 화제다. 주최 측인 플레이조커는 이 행사가 배우들의 패션쇼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AV 산업 홍보행사라고 보면 된다. 수원시와 파주시, 서울시, 서울 강남구 등이 행사 개최를 불허하면서 일단 4월 행사는 취소된 상태다. 한국에선 포르노 제작, 유통이 불법이고, 일본산 포르노의 다른 말인 AV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불법 동영상 시장은 물론, 특정 장면을 편집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IPTV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수정판 AV 시장 역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처럼 AV가 버젓이 유통되고 있고, 또 일본 AV 배우들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된 현실에서, 함께 판단의 가이드를 잡아갈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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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남자를 배신한 자, 누구인가 “테스토스테론이 2016년을 접수했다.” “여성혐오가 이겼다.” “세상 천지에 백인 남자들의 승리가 울려 퍼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미국 언론이 쏟아낸 말들이다. 2016년 대선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성별 전쟁을 불러왔고, 언론은 앞다퉈 트럼프 당선을 미국 백인 남성의 폭거이자 승리로 기록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관종 대통령의 탄생에 깜짝 놀란 언론인들과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세운 국민,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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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후회 없이, 함께, 꿈을 꿀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시는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열광했던 영화들이 있었고, 그런 영화와의 마주침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발견한 행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어떤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 것도 간단하진 않다.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최근 우리의 기억을 물화한 놀라운 책이 한 권 나왔다. 이름 하여 <대사극장>. 총 850여 쪽에 달하는 이 작업에 붙은 부제는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다. 출간의 변은 이렇다. “한국영화의 전통하에서 대사는 시대와 인간을 드러내는 압축적인 지도의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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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내 고양이 수명은 당신의 농담거리가 아니다 “요즘은 개가 너무 오래 살아.” 오랜만에 만난 30년 지기들과 식사를 하던 중 나온 말이다. 지난 11년간 나와 함께했지만 한 번도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던 우리집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대화의 주제로 막 등장한 참이었다. 농담이려니 하고 넘기는데, 다른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빨리 죽을까봐 개를 못 키우겠어.” 그러고는 개 키우는 사람들이 개에게 들이는 과도한 정성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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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연말연시’를 좋아한다. 어느 하루를 산다고 해도 ‘오늘’은 어제에서 이어져 내일로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12월31일과 1월1일이 크게 다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가온 해의 첫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 대나무가 자라듯 마디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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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대통령께 드리는 ‘카르텔’의 용법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지난달엔 산재보험 재정 부실화를 지적하면서 ‘근로복지공단-병원-가짜 환자’로 이루어진 ‘산재 카르텔’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2021년 기준으로 일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어도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한 건수가 전체의 66.6%를 넘는다. 아무래도 산재 카르텔이란 말이 어색한 이유다. 게다가 카르텔이 되려면 ‘가짜 환자’라는 이익집단의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익집단은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 산재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가 위치하게 될 뿐이다. 결국 ‘산재 카르텔’이란 말은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산재보험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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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뜨겁고, 숨차고, 답답한 <알바트로스>. 2017년 방영된 TV 프로그램 이름이다.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청춘을 만난다”는 콘셉트로 기성세대인 MC들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고 청년들과 공감하는 예능이었다. 8회에서 진행자 유병재씨는 젝스키스의 장수원씨와 함께 유독 힘들기로 소문난 알바에 도전한다. “헬 알바” “골병만 남” 등의 후기가 넘쳐나는 이 일터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급식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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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의존과 돌봄은 ‘쓴맛’ 최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열린 비판적섬연구학회에 참석했다. 비판적섬연구는 북반구 대륙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남반구 군도의 관점을 세계 인식과 사회 분석에 가져오고자 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여기서 ‘북반구(Global North)’와 ‘남반구(Global South)’는 기존의 ‘1세계’와 ‘3세계’라는 말을 대체해 사용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용어다. 처음 1세계, 2세계, 3세계 구분이 등장한 건 냉전시대였다.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1세계’, 동구 공산주의 진영을 ‘2세계’, 이에 속하지 않는 여타의 국가들을 ‘3세계’로 묶었다. 동구권 붕괴 후 2세계란 말은 사어가 되었고, 1세계, 3세계는 각각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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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1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 8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라동의 작은 서점인 ‘아무튼 책방’과 올해로 24회를 맞은 ‘제주여성영화제’에서 초대를 받아 3박4일 동안 총 4회 강의를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덕분에 오후와 저녁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다정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침에는 바다 앞에서 ‘물멍’을 즐기는,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그 시간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첫 계기는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이었다. 고희영 감독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제주 삼달리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기록해 엮었다. 작품의 중심에는 87년간 물질을 한 대상군 해녀 현순직 선생과 서서히 말라가는 바다의 슬픈 얼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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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평등이 뭔지 알아요?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빼라는 일부 단체의 금서 지정 운동에 반대하는 행동독서회 자리에서였다. 어린이는 금서 목록에 올라온 <함께 생각하자, 성평등>을 들고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성평등이 뭐예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그 유익한(!) 책은 내가 쓰고 순미 작가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땀을 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실패했다. 나는 “여자애가” “남자애가”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편견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이 어린이에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줄까봐 두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스스로를 여자 혹은 남자로 규정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아이돌 ‘앰버’ 이야기를 해보려 했는데, 어린이는 앰버를 몰랐고 나는 어린이의 최애 아이돌인 ‘뉴진스’를 잘 몰랐다. 결국 대화 결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