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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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내 고양이 수명은 당신의 농담거리가 아니다 “요즘은 개가 너무 오래 살아.” 오랜만에 만난 30년 지기들과 식사를 하던 중 나온 말이다. 지난 11년간 나와 함께했지만 한 번도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던 우리집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대화의 주제로 막 등장한 참이었다. 농담이려니 하고 넘기는데, 다른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빨리 죽을까봐 개를 못 키우겠어.” 그러고는 개 키우는 사람들이 개에게 들이는 과도한 정성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오가는 말의 한가운데에서 어쩐지 애타는 마음이 된 나는 이내 어쩌라는 건가 싶어졌다. 일단은 내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왜 갑자기 다른 집 개 이야기로 튀었는지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친구들에게도 연결되는 맥락은 있었다. 하나는 개가 너무 오래 살아 문제고, 하나는 개가 너무 일찍 죽어 문제인 와중에, 둘 다 어쨌거나 한국의 반려동물 문화가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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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연말연시’를 좋아한다. 어느 하루를 산다고 해도 ‘오늘’은 어제에서 이어져 내일로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12월31일과 1월1일이 크게 다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가온 해의 첫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 대나무가 자라듯 마디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 매년 이때가 되면 찾아보는 게 있다. ‘올해의 인물/단어/사건’ 등과 내년의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권위 있는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지인들이 전문성과 상관없이 꼽아 개인 SNS에 소개하는 리스트도 재미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 고통, 호모 이그노런스, 외로움, 그리고 ‘좋은 이야기’.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내가 꼽은 단어들은 이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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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대통령께 드리는 ‘카르텔’의 용법 윤석열 대통령은 ‘카르텔’이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지난달엔 산재보험 재정 부실화를 지적하면서 ‘근로복지공단-병원-가짜 환자’로 이루어진 ‘산재 카르텔’을 입에 올렸다. 하지만 2021년 기준으로 일하다 다치거나 병을 얻어도 산재 신청을 하지 못한 건수가 전체의 66.6%를 넘는다. 아무래도 산재 카르텔이란 말이 어색한 이유다. 게다가 카르텔이 되려면 ‘가짜 환자’라는 이익집단의 실체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이익집단은 없다. 오히려 그 자리에 산재 위험에 노출된 노동자가 위치하게 될 뿐이다. 결국 ‘산재 카르텔’이란 말은 노동자에게 낙인을 찍고 산재보험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효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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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뜨겁고, 숨차고, 답답한 <알바트로스>. 2017년 방영된 TV 프로그램 이름이다. “어제의 청춘이 오늘의 청춘을 만난다”는 콘셉트로 기성세대인 MC들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경험하고 청년들과 공감하는 예능이었다. 8회에서 진행자 유병재씨는 젝스키스의 장수원씨와 함께 유독 힘들기로 소문난 알바에 도전한다. “헬 알바” “골병만 남” 등의 후기가 넘쳐나는 이 일터는 다름 아닌 고등학교 급식실. 새벽에 출근해 “무겁고 뜨거운” 식판을 정리하고 600석이 넘는 홀을 청소한 뒤 1800인분의 점심을 조리하는 과정에 투입된 유병재씨는 뜨거운 불 앞에서 커다란 삽으로 양념에 절여져 한없이 무거워진 제육을 끊임없이 뒤집어야 했던 순간을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간의 알바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어요. 정말 지옥에 온 것 같았죠. 쉬고 싶다고 멈출 수도 없고.” 그 장면에는 “제육 지옥”이라는 자막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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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의존과 돌봄은 ‘쓴맛’ 최근 인도네시아 욕야카르타에서 열린 비판적섬연구학회에 참석했다. 비판적섬연구는 북반구 대륙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남반구 군도의 관점을 세계 인식과 사회 분석에 가져오고자 하는 연구 방법론이다. 여기서 ‘북반구(Global North)’와 ‘남반구(Global South)’는 기존의 ‘1세계’와 ‘3세계’라는 말을 대체해 사용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용어다. 처음 1세계, 2세계, 3세계 구분이 등장한 건 냉전시대였다. 서구 자본주의 진영을 ‘1세계’, 동구 공산주의 진영을 ‘2세계’, 이에 속하지 않는 여타의 국가들을 ‘3세계’로 묶었다. 동구권 붕괴 후 2세계란 말은 사어가 되었고, 1세계, 3세계는 각각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의미하는 말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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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10억원으로 할 수 있는 일 8월 말에 제주도에 다녀왔다. 아라동의 작은 서점인 ‘아무튼 책방’과 올해로 24회를 맞은 ‘제주여성영화제’에서 초대를 받아 3박4일 동안 총 4회 강의를 진행하는 일정이었다. 덕분에 오후와 저녁에는 강의를 하고, 밤에는 다정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아침에는 바다 앞에서 ‘물멍’을 즐기는,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이후로 그 시간을 자꾸만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첫 계기는 다큐멘터리 <물꽃의 전설>(2023)이었다. 고희영 감독이 2016년부터 2021년까지 제주 삼달리 바다에서 물질을 하는 해녀들의 모습을 기록해 엮었다. 작품의 중심에는 87년간 물질을 한 대상군 해녀 현순직 선생과 서서히 말라가는 바다의 슬픈 얼굴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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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평등이 뭔지 알아요? 며칠 전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와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성교육·성평등 도서를 공공도서관에서 빼라는 일부 단체의 금서 지정 운동에 반대하는 행동독서회 자리에서였다. 어린이는 금서 목록에 올라온 <함께 생각하자, 성평등>을 들고 다가와 나에게 물었다. “성평등이 뭐예요?”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황당하게도 그 유익한(!) 책은 내가 쓰고 순미 작가가 그림을 그린 책이었다. 땀을 흘리며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려고 노력하다 결국 실패했다. 나는 “여자애가” “남자애가”라는 말 뒤에 따라오는 편견이 어떻게 차별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말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이 어린이에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줄까봐 두려웠다. 궁여지책으로 스스로를 여자 혹은 남자로 규정하지 않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아이돌 ‘앰버’ 이야기를 해보려 했는데, 어린이는 앰버를 몰랐고 나는 어린이의 최애 아이돌인 ‘뉴진스’를 잘 몰랐다. 결국 대화 결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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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여섯 번째 대멸종 ‘인섹타겟돈’ 지난 6월 말 ‘러브버그(사랑벌레)’가 집에 들어왔다. 방충망에 문제가 있나 싶어 창 아래쪽을 살펴보던 중 순간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만 같은 기분. 나는 눈을 돌려 오른쪽 벽을 쳐다보았다. 하얀 벽지에 러브버그들이 붙어 있었다. 그 행렬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천장에 이르렀을 때, 형광등 옆에 모여 있는 수십 마리의 러브버그들이 보였다. 새벽 두시였지만 바로 튀어나가 편의점으로 갔다. 가정용 살충제를 사기 위해서였다. 이미 복도에도, 엘리베이터에도, 편의점 문에도 러브버그가 있었다. 각종 SF영화에서 보았던 ‘곤충의 역습’이 떠올랐다.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에 사로잡혀 한 통 남아 있던 살충제를 사서 돌아왔다. 고양이가 있는 집에서 살충제를 함부로 뿌릴 수 없다는 생각이 떠오른 건 그때가 되어서였다. 나는 “해충은 아니라잖아”라고 중얼거리며 검색을 시작했다. 러브버그는 익충이고, 입이 퇴화해 사람을 물지 않으며, 3~5일 정도 짝짓기를 한 뒤엔 곧 짧은 생을 마감한다는 정보, 익충을 과하게 방제하면 생물 다양성을 해치게 되고 결국 해충의 대발생을 초래하게 될 거라는 경고를 잔뜩 보고 나서야 조금 안정이 되었다. 러브버그가 속한 털파릿과의 학명이 ‘비바이오니디(bibionidae)’라는 것까지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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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극단적 중도파들의 시대 “문화의 힘은 위대하다.” 서울국제도서전 개막식을 찾은 김건희 여사의 말이다. 그날 그가 우아하게 축사를 한 행사장에서 송경동, 정보라, 이원재 등 문화예술인들이 강제퇴거당했다. 소설가 오정희씨의 도서전 홍보대사 위촉에 항의하던 중이었다. 오씨는 박근혜 정부 시절 ‘문학계 블랙리스트’ 실행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블랙리스트 자체가 문화의 힘을 통제하기 위한 검열이다. 그런데 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또다시 ‘권력자의 안전’을 이유로 삭제되었다. 그러고 보면 김 여사의 연설은 그 자체로 반어법의 가장 당대적인 퍼포먼스였다. 문화의 힘이 짓밟힌 자리에서 그것을 상찬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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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그 고양이가 궁금했다 고고학자 영실(옥자연)의 마음속엔 이제 막 새로운 설렘이 씨앗을 틔운 참이다. 발굴 현장에서 벌목을 하는 우도(강태영)에게 마음이 끌린 것이다. 고백을 할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집 앞 복도에서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은 영실은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행운이 오려는 건가.” 그날 밤, 영실은 물과 사료를 준비해 계단에 꺼내놓는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못한 사랑을 보듬듯 마주친 적도 없는 고양이를 위해 다정하게 먹거리를 준비한 영실은 물그릇 옆에 다리를 모으고 앉아 생각한다. “우도도 나를 자유로운 영혼이라며 싫어할까? 인식처럼?” 그리고 장면은 8년 전, 영실이 인식(기윤)을 처음 만났던 순간으로 점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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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열대 우림 속 선인장’의 최후 최근 스크린 세이버가 돌아가는 컴퓨터처럼 살고 있다. 전원이 완전히 꺼지지 않고 풀타임으로 가동 중인 뇌는 잠을 잘 때에도 충분히 쉬지 못한다. 가장 큰 문제는 침대에 가지고 들어가는 스마트폰이다. “잠깐만 놀자”며 스마트폰을 깨우면 한두 시간은 ‘순삭’이다. 각종 SNS, 쇼핑 앱, 스트리밍 서비스 등을 전전하다 지쳐 눈을 감을 땐 뇌는 이미 활성화된 상태다. 여기서부턴 난잡한 꿈의 문이 열린다. 대낮에 맑은 정신으로 그 시간을 돌이켜 보면 꽤 낯설고 아득하다. 명멸하는 액정, 익숙하게 스크롤을 내리는 손가락, 취할 만한 정보를 찾아 빠르게 움직이는 눈, 톡하고 손끝으로 화면을 찍으면 바로 펼쳐지는 자극의 세계. 내 의지로 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버튼만 누르면 정해진 대로 움직이는 반자동 기계에 더 가까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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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뻔뻔한 도둑질 한 정치인이 개인 SNS에 자신의 정치 행보를 알리면서 “얼룩말 세로처럼 훨훨 활보하겠다”는 말과 함께 세로의 탈주를 패러디한 이미지를 올렸다. 그 이미지 안에서 세로는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어깨를 당당히 편 채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이걸 본 순간,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물론 인간이 동물에 빗대어 스스로를 설명하는 역사는 유구하다. 특히 의인화된 동물이 등장하는 우화는 인간의 자기 이해와 지혜가 고여 숙성되는 향기로운 술통과도 같은 장르다. 실제로 동물은 인간과 다양한 속성을 공유하므로, 그에 대한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우화는 인간이 설정해 온 동물들 간의 위계를 뛰어넘는 동류의식을 품고 있을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