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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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돼지를 그대 품 안에 기해년이 밝았다. 노란돼지(己亥)의 해라니, 제일 좋아하는 돼지 이야기를 하나 풀어놓을까 한다. 에코 페미니스트인 마리아 미즈가 <자급의 삶은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어머니와 암퇘지”라는 일화다. 1945년 초,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농부의 딸이었던 미즈는 독일 아이펠의 서쪽 마을에 살고 있었다. 당시 마을은 먹을 것과 온정을 구걸하는 독일 패잔병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어머니는 매일 저녁 수프를 끓이고 감자를 삶아 그들을 거둬 먹였다. 미즈의 다섯 오빠는 모두 집을 떠나 참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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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한 끗 차이’를 만드는 페미니즘 여성혐오를 예술로 포장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는 것 같다. 안티페미니스트 레토릭을 읊조리다 공연이 중단되고 말았다는 래퍼 산이의 ‘웃기고도 슬픈 에피소드’는 이를 잘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이제는 창작의 원천으로 페미니즘 인식론을 참고할 때다. 강의 중에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페미니즘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나요?” 나는 100점짜리 페미니스트 캐릭터의 전형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캐릭터와 이야기, 영상언어 등을 진부하지 않게 구성하고 조합해내는 페미니스트 상상력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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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두려워 말라, 그들은 그저 세상을 바꾸고 있을 뿐 지난 11월3일. 학생의날을 맞이하여 교사들의 교내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해결 및 예방책 마련을 촉구하는 ‘스쿨미투’ 집회가 열렸다. 이 집회에서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외쳤다. 2015년 이후 대중 페미니즘 운동은 대체로 익명의 청년 여성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자 운동의 형태였다. 얼굴과 이름을 내놓고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했을 때 여성들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와 2차 가해, 무고죄 고발, 그리고 조리돌림이었으므로 이는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미투에 이르러 여성들은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내걸고 싸우기 시작했다. #스쿨미투도 마찬가지다. 교사의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한 이후에 학생들은 진학과 취업 등을 빌미로 2차 가해를 당해왔다. 그들의 싸움은 이런 현실적 위협을 감수하고 있다. 그만큼 절박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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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페미니즘과 포퓰리즘이 만날 때 “극우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에 ‘가짜뉴스 공장’이 있었다.” 한겨레가 단독 보도한 “ ‘가짜뉴스’의 뿌리를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된다. 대한민국 언론사에 남을 만한 문장이다.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한 혐오를 조장하고 차별을 선동하는 가짜뉴스의 레토릭이 보수 기독교의 레토릭과 비슷하다는 점은 페미니스트들도 계속 주목해왔던 문제였다. 한겨레가 이 ‘합리적 의심’이 ‘팩트’임을 확인시켜준 셈이다. 가짜뉴스에는 올해 초 제주도에 들어온 예멘 난민에 대한 것도 있었다. 자극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퍼지면서 한국인들 사이에 난민에 대한 공포가 갑작스럽게 형성됐고, 그렇게 자라난 반난민 정서는 청와대 청원으로까지 이어졌다. 이 거짓말에 폭발적으로 반응했던 사람들 중에는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여성과 일부 페미니스트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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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가부장제 이후’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여성가족부가 ‘가부장제 이후’의 새로운 문화와 제도를 만들어 나가겠다.” 진선미 의원이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여성가족부 장관 내정 인사 중 일부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 모권사회가 됐다고들 해요. 결혼을 하게 되면 처갓집 근처에서 살아야 하고, 집안에서 여자 목소리가 더 크다고 말이죠.” 아, ‘가부장제 이후’란 이런 의미인 것인가? 하지만 과연 이런 일들이 한국 사회가 부권사회에서 모권사회로 넘어갔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 이는 사실 가부장제의 성역할 고정관념 안에서 여전히 육아와 가사가 여성의 몫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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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반지성적 의미 왜곡에 대응하는 법 안티 페미니스트의 “페미나치” 운운이나 홍준표의 “괴벨스 정당” 운운을 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최근 이런 반지성주의적 의미 왜곡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민하다 명쾌한 응답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미국 코미디계의 신성 트레버 노아의 발언에서였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이 진행하는 정치 풍자 토크쇼 <데일리쇼>에서 “프랑스 정부와 갈등이 좀 있었다”며 입을 열었다. 아프리카계 선수가 다수 포진하고 있는 프랑스 대표팀의 월드컵 승리를 축하하면서 “아프리카가 승리했다”고 던진 농담이 문제가 됐다. 프랑스 내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주미 프랑스 대사는 트레버 노아에게 항의 편지를 썼고, 이 발언은 개그를 넘어 미국식 다문화주의와 프랑스식 동화주의 사이의 날선 논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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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밥이 우리를 축복할 때 최근 몇 년 동안 예능의 최강자는 역시 먹방과 쿡방이었다. ‘푸드 포르노’라는 일부 평자들의 힐난에도 불구하고 이런 음식 예능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음식 예능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건 이 장르가 ‘남성들만의 리그’였기 때문이다. 아프리카TV 등 온라인에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먹방이 공중파와 케이블로 넘어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2008년 <식신원정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누가 더 많이 먹나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면서 인기를 끌었던 온라인 방송의 콘셉트가 주류 방송으로 옮겨오면서, 먹방은 많이 먹는 남자들에게 더 집중했다. 이후 음식 예능의 인기는 서바이벌 리얼리티 쇼 열풍과 만나면서 쿡방의 시대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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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남성들의 ‘나쁜 남자’ 판타지 한 남자가 트렁크 문이 열린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트렁크 밖으로는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여자의 맨다리가 삐져나와 있다. 이 이미지에는 ‘The Real Bad Guy(진짜 나쁜 남자)’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잖아? 이게 진짜 나쁜 남자야. 좋아 죽겠지?” 잡지 ‘맥심’의 2015년 9월호 표지였다. 여성들은 경악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심지어 살인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표지는 판타지로서의 ‘나쁜 남자’와 ‘범죄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위험함, 길들여지지 않음, 야만성이야말로 남자다움이라는 널리 퍼진 착각을 옹호하고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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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동일범죄 동일수사 1988년 탈주범 지강헌은 돈이 권력인 세계를 향해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다. 지금 온라인에서는 국민들이 “유○무죄 무○유죄”를 외치고 있다. 이 기막힌 구호는 어떻게 등장하게 된 것일까? 사건의 시작은 이랬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몰카가 한 장 올라온다. 대학의 크로키 수업에서 찍힌 누드 사진이었다. 커뮤니티 유저들은 그 사진을 보고 낄낄거리며 피해자를 희롱했다. 2014년까지 이런 정도의 사진은 그저 ‘보고 즐길 수도 있는 포르노’로 여겨졌다. 범죄라는 인식도 크지 않았다. 하지만 2015년 메갈리아 이후 여성들은 몰카 촬영과 공유가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는 범죄임을 강조하고 ‘디지털 성범죄’ 혹은 ‘불법촬영범죄’로 재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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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청소년 참정권을 허하라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의 빛나는 명문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땅의 현실은 법문을 따라가지 못한다. 이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바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다. 민주주의는 과정이다. 이를 협의로 구현하고 있는 대의제 민주주의조차도 지난한 변태와 확장의 과정을 달려오고 있다. 1987년 직선제 쟁취 이후 30년. 대한민국 국민은 스스로의 손으로 선출했던 무능한 지도자를 광장의 정치를 통해 끌어내렸다. 역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여전히 정치는 엉망진창이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것인지, 아득하고 또 숨이 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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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홍준표 대표님께 드림 연일 싱글벙글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 말이다. 그는 미투 운동이 진보 쪽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진보의 문제라며 손가락질한다. 그러나 다른 누구도 아닌 홍 대표야말로 걸어다니는 ‘성희롱 기계’처럼 보인다. 입만 열면 저질스럽고 불쾌한 말들이라, 나는 심지어 수치심까지 느낀다. “제1 야당 대표가 저런 수준이라니, 이 나라의 바닥은 도대체 어디인가.” 그는 19대 대통령 선거를 ‘돼지 발정제 논란’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친구들끼리 강간 모의를 한 것을 젊은 시절 추억거리로 여기며 자서전에 쓴 것이 문제가 되었다. 강간은 범죄이기에 앞서 여성을 자율성과 존엄을 함부로 침해해서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가부장제의 여성 지배가 드러나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런 실천은 “그리해도 괜찮다”는 남성연대의 허가하에 가능해진다. 그런 의미에서 친구들끼리 돼지 발정제 운운했다는 것은 청년의 치기가 아니라 성폭력 범죄의 사회적 조건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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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가장 시적인 것 연휴 기간에 말에 대한 영화 두 편을 보았다. 하나는 <위대한 쇼맨>(2017), 다른 하나는 <패터슨>(2016)이다. <위대한 쇼맨>은 ‘PR(홍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P.T 바넘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뮤지컬 영화다. 빈털터리 소년에서 세계적인 흥행사로 성장하는 바넘이 갖가지 기지로 위기를 극복할 때마다 “사기꾼이잖아”라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사기의 기술이야말로 별 의미 없는 물건을 화려하고 특별한 상품으로 도약시키는 자본주의의 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속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바넘의 어록에 기록되어 있는 이 말은 의미심장하다. 영화 속 그의 화려한 언변은 많은 사람을 사로잡았다. 어떤 말이 빼어나게 아름답다면, 그건 어딘가에 거짓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