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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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 문화연구자 앤 마리 발사모는 정보 테크놀로지와 여성이 맺어온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는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의 어머니는 ‘전자 회로를 이용한 고속 자동 계산기’인 기계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에, 계산을 담당했던 인간 컴퓨터(computer, 계산원)였다. 여성 컴퓨터의 모습은 영화 <히든 피겨스>(2017)에서 볼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이자 실존 인물이기도 한 도로시 본은 1960년대 초 미국 항공우주국(NASA·나사)에서 근무하던 여성 보조 계산원들을 이끄는 팀장이었다. 이후 나사에 IBM 컴퓨터가 들어오자, 이들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배워 이 신문물을 구동하는 일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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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은유에 반대한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뜬금없이 시를 읊은 것은, 그렇다, 은유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이야말로 은유의 대표적 예문 아닌가. 은유는 “시만큼 오래된 정신작용이며, 과학적 지식과 표현력을 포함해 각종 이해 방식을 낳는 기초”(수전 손태그)이다. 은유가 없었다면 인간의 상상력은 물론이고 이해력도 그만큼 제한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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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표 “언젠가 내게 말했지. 진실한 사랑은 정해진 룰에서 벗어나지 않는 거라고. 그럴 수도 있겠지 (…) 들어봐, 나의 사랑은 함께 숨 쉬는 자유. 애써 지켜야 하는 거라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지.” 21대 국회의원 선거 사전투표를 위해 길고도 긴 줄에 서서 윤상의 ‘사랑이란’을 흥얼거렸다. 예전에 즐겨 듣던 곡인데, 특히 ‘룰’과 ‘자유’의 대비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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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킹덤’ 낡은 세계의 끝 상상하기 역병이 퍼졌다. 병에 걸린 자는 이성을 잃고 사람의 피와 인육을 탐하게 된다. 전염성이 높고, 잠복기는 매우 짧으며, 결과는 치명적이다. 그렇게 조선의 왕자 이창(주지훈)에게 미션이 주어진다. 그는 지지자들을 모아 ‘어린 중전’과 부패한 외척을 물리치고, 역병으로부터 백성을 구해야 한다. 드라마 <킹덤>(2019~2020)의 줄거리다. 영화 <창궐>(2018)에 이어 <킹덤>까지 보고나니 궁금하다. 지극히 서구적인 괴물인 좀비는 어떻게 조선 땅에 떨어지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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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 아니다” 올해 초 <다크룸>이라는 책을 번역, 출간했다. 1980년대 미국에서 펼쳐진 페미니즘에 대한 전방위적인 공격을 다룬 <백래시>로 유명한 수전 팔루디의 2016년 작품이다. 이 책은 팔루디가 30년 가까이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버지로부터 “변화들”이라는 제목의 e메일을 받으면서 시작된다. 아버지는 자신의 달라진 모습이 담긴 여러 장의 사진과 함께 최근 태국으로 건너가 성별재지정 수술을 받고 “여자가 되었음”을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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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A하사와 함께 질문하자 “성전환 수술 후에도 군복무를 이어가고 싶다.” 2020년 1월16일. 중요한 뉴스가 전해졌다. 남성으로 임관한 A하사가 성전환 수술을 받았고, 육군이 그녀의 전역 여부를 심사할 예정이라는 소식이었다. A하사는 성별 정정을 신청해 놓았으며, 정정 후에는 여군으로 계속 복무하고 싶다는 의사를 군에 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하사의 전역심사위원회가 열리는 이유에 대해 육군은 “음경 훼손과 고환 적출이 각각 5급 장애이고, 5급 장애가 두 개면 심신 장애 3등급으로 분류된다. 이는 전역 심사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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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반군 지도자쯤은 돼야 ‘자궁’ 취급 벗어날까 지난 토요일 ‘페미니즘, 군대를 말하다’라는 포럼에 다녀왔다. 성평등에 대한 논의가 걸핏하면 “여자도 군대 가라”로 귀결되는 시대에 페미니즘이 병역과 군사주의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논하는 자리였다. 이때 군사주의란 군대의 존재 및 군대에 힘을 부여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지배이념이자, 위계질서와 복종, 무력의 사용이 효율적이라는 신념을 통해 사회 운영 원리를 군사화하려는 관습적 사고방식이다. 한국 사회 곳곳에 팽배한 군대문화는 군사주의에 경도된 군사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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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79년생 정대현’의 기막힌 타이밍 “79년생 정대현도 아프다.” 한 주간지가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 정대현(공유)의 옆모습을 커버사진으로 다루면서 붙인 표제다. 어쩌면 이렇게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가. 하지만 문득 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어졌다. <82년생 김지영>은 여러모로 동명 원작소설의 미래형이다. 소설이 김지영의 빙의로 끝났다면, 영화는 소설이 끝난 그 자리에서 시작한다. 이제 가족들은 김지영의 ‘아픈 상태’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복을 위해 마음을 쓰는 중이다. 영화는 고립되었던 김지영이 그들 덕분에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게 경력단절여성 김지영은 고난을 극복하고 작가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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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조커, 어느 인셀의 탄생 2012년 7월20일 미국.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상영 중인 오로라 극장에 여러 발의 총성이 울린다. “내가 조커다”라고 외친 청년 제임스 홈스는 이날 8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체포됐다. 요즘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커>를 본 뒤, 나는 내내 이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영화의 주인공 아서 펠릭과 제임스 홈스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혀있었기 때문이다. 실존 인물인 홈스가 조커와 동일시하면서 영화를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면, 허구적 인물인 아서는 홈스와 같은 실존 인물들에 이입해서 만들어진 캐릭터로 현실을 영화로 옮겼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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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추석 특집, 영화 추천 추석이 다가왔다. 밥상 위로 오고 갈 답 없는 설전을 어째야 할지, 벌써부터 골치 아픈 분들도 계시겠다. 내 코도 석 자인 마당에 가족 간의 정견 차를 피해갈 묘안을 제안하기는 어렵고, 오늘은 독자들께 추석 연휴 기간 중 즐기실 만한 영화 몇 편을 소개해드릴까 한다. 우선 화제작인 <우리집>(윤가은)과 <벌새>(김보라)부터 챙겨 보시면 좋겠다. 두 작품 모두 4만명 정도의 관객을 극장가로 유혹했다. 쌍 천만 시대에 4만명이라니. 별일이 아닌 듯하지만, 실제로 한 작품이 2000개 이상의 스크린을 점유하기도 하는 독과점의 시대에 단 몇 십개의 스크린으로 짧은 기간에 이 정도 관객을 모으는 건 쉽지 않다. 그야말로 입소문이 대단하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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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품격에 대하여 윤정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소장. 20년을 한 단체에서 일하면서 여성 등 소수자의 인권을 위해 싸워 온 사람. 2019년 8월8일. 그는 최선을 다했던 짧은 생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동료들은 그가 “위대한 활동가”였다고 말한다. 그런데 다음날, 조용하게 추모의 마음이 흐르던 온라인 공간에 고인의 생전 활동을 폄하하는 문장이 하나 올라왔다. 방송인이자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이정렬씨가 자신의 개인 트위터 계정에 쓴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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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이키 페미니즘을 타고 넘기 눈부시게 쏟아지는 조명과 광활한 축구장을 가득 채운 함성. 뜨거운 공기 속을 유영하는 카메라는 출전을 앞두고 있는 선수들을 비추고, 그들 사이로 잔뜩 긴장한 플레이어 에스코트의 얼굴이 보인다. 경기장까지 선수를 배웅한 에스코트는 경기가 시작되기 전 몸을 돌려 빠져나오려 한다. 그때, 그의 손을 끌어당기며 11번 선수가 말한다. “아직 안 끝났어.” 이때부터 한 소녀의 FIFA 월드컵 모험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