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희정
문학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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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닭과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아직도 있을까? 40년 전,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학교 정문 앞에 좌판을 깔고 병아리나 메추리 등을 파는 이들이 있었다.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채 삐약거리는 이 생명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한 마리에 500원, 당시에 아이스크림 다섯 개 정도의 가격이었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꾸중을 불사하고 구매를 감행했다. 한번은 병아리를 사다가 큰 사과상자 안에 작은 상자들을 넣어주고는 “이건 침대, 이건 책상” 하면서 집을 만들어 주었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서 살았으므로, 상자만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거주지였다. 하지만 잘해준답시고 넣어준 작은 상자에 걸려 넘어진 병아리는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날 아침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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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대학살들의 역사 “Never Again(다신 안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력과 살상 행위를 묵인하는 논리다. 이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기억하면서 다신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유대인의 생명과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판단 원칙’으로서 작동해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세계적 철학자가 이를 옹호하기도 했거니와, 내 주변에서도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대학살이 또 다른 학살을 정당화할 정도로 인류 문명사에 있어 그토록 특별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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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어떤 놀이의 결말 “아이들의 디지털 놀이터.” 한 시사프로의 진행자가 딥페이크 성범죄를 언급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아이들의 놀이터에 딥페이크라는 새로운 장난감이 주어지면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는 논평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자의 얼굴, 신체, 이름을 재료로 삼아 ‘가짜’를 만들어 짓밟고 낄낄거리는 행태는 전혀 새롭지 않다. 언론에서 딥페이크 범죄에 ‘놀이’란 말을 붙일 때마다 신경이 쓰인다. 물론 소년들 사이에서 이건 ‘놀이’지만, 이 말이 반사적으로 만들어내는 ‘순진함’이라는 이미지가 문제다. “이것이 범죄인 줄 모르는 10대, 20대 남성”이라는 게으른 설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딥페이크 성범죄를 키운 문화적 뿌리를 지우고 새로운 테크놀로지 탓만 하도록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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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낙태가 죄라면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오랜 구호다. 임신중지는 개인의 신체, 그 신체가 놓인 가족 구성, 함께 임신을 한 남성과의 관계, 출산 후 양육 환경과 모자녀가 처할 사회적 상황 등 연속적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관계적 사건이다. 그런데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단편적인 행위에 집중하여 그에 ‘범죄’라는 낙인을 찍는다면, 그건 국가의 문제라는 의미였다. 대한민국에서 낙태죄가 사라진 지 5년이 지났지만, 국가는 여전히 임신중지를 ‘죄’로 다루는 듯하다. 최근 벌어진 사건은 이런 심증을 확인시켜준다. 20대 여성 A씨가 36주차 태아를 낙태하는 과정을 담은 브이로그를 SNS에 올리면서 한국사회가 발칵 뒤집힌 뒤, 보건복지부가 경찰에 이 사건에 대한 수사를 의뢰한 것이다. 결국 A씨와 병원장이 형사입건됐다. 죄목은 살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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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흉가 체험장이 된 몽키하우스 “국내 흉가 몽키하우스 방문기.”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의 제목이다. 이외에도 ‘몽키하우스’로 검색하면 흉가 체험 영상을 여럿 보게 된다. 영상의 형식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야밤에 건물을 찾아가 카메라 시점으로 여기저기 탐색하는 와중 카메라가 갑자기 꺼지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발자국 등이 나타나는 식이다. 때로는 무속인이 출연해 “원환귀”와 마주치기도 한다. 몽키하우스의 이런 ‘오락적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봤다. 몽키하우스는 동두천에 있는 낙검자 수용소의 다른 이름이다. 1960~197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에게 안정적으로 ‘위안’을 제공하기 위해 미군 주둔지마다 기지촌을 조성했다. 기지촌 운영의 핵심 장치는 성병관리였다. 미군의 자유로운 성매매를 보장하기 위해 한국 여자들은 ‘깨끗하게’ 관리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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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학살이 돈이 되는 세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뼈만 남은 유대인, 사악한 나치, 혹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독일인 쉰들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 강제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한 나치 친위대 관사에서 자신이 꿈꿔온 중산층 정상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 영화 속 회스 가족의 가장인 루돌프 회스는 실존 인물이다. 4년간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소장으로 일하면서 100만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했고, 전후에 전범 재판을 통해 교수형을 당했다. 그가 아우슈비츠에서 누렸던 “낙원과도 같은 삶”은 정확하게 나치의 유대인 학살 덕분에 가능했다. ‘인종청소’라는 정치적 명분 뒤에 놓여 있던 현실적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 재산 약탈이었다. 그 재산에는 유대인이 사용하던 치약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유대인의 모든 것을 싹싹 긁어다 독일인의 배를 불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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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용기에 대하여 용기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최근 나는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다. 시작은 BBC 다큐멘터리 <버닝썬 -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였다. 다큐는 일군의 남성 K팝 스타들이 여성을 강간하고, 불법 촬영물을 돌려보며, 심지어 성상납을 했던 사건이 밝혀질 때까지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바로 이 다큐에 ‘용기’라는 단어가 나온다. 2019년 버닝썬 관련 단톡방을 처음으로 기사화했던 강경윤 SBS 기자의 인터뷰 내용에서다. 강 기자는 경찰유착, 성폭행, 불법촬영 등 총체적인 범죄 정황이 기록되어 있던 단톡방 내용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난관에 봉착한다. 대화에 언급되는 고위 경찰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그 고리를 풀어준 사람이 고(故) 구하라였다. 그는 강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도움을 주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고, 단톡방에 있었던 최종훈을 설득해 그 경찰 인사가 누군지 밝히도록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며 강 기자가 말한다. “구하라씨는 정말 용기 있는 여성이에요.” 아, 용기. 나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진 채로 그 말 앞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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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안티페미니스트의 프레임 비틀기 일본 에이브이(AV) 배우들이 참여하는 ‘성인 페스티벌’이 화제다. 주최 측인 플레이조커는 이 행사가 배우들의 패션쇼라고 소개했지만, 사실 AV 산업 홍보행사라고 보면 된다. 수원시와 파주시, 서울시, 서울 강남구 등이 행사 개최를 불허하면서 일단 4월 행사는 취소된 상태다. 한국에선 포르노 제작, 유통이 불법이고, 일본산 포르노의 다른 말인 AV 역시 그렇다. 하지만 온라인으로 유통되는 불법 동영상 시장은 물론, 특정 장면을 편집하거나 모자이크 처리를 해서 IPTV 등을 통해 합법적으로 유통되는 수정판 AV 시장 역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처럼 AV가 버젓이 유통되고 있고, 또 일본 AV 배우들의 한국 진출이 본격화된 현실에서, 함께 판단의 가이드를 잡아갈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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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남자를 배신한 자, 누구인가 “테스토스테론이 2016년을 접수했다.” “여성혐오가 이겼다.” “세상 천지에 백인 남자들의 승리가 울려 퍼졌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 미국 언론이 쏟아낸 말들이다. 2016년 대선은 미국에서 전례 없는 성별 전쟁을 불러왔고, 언론은 앞다퉈 트럼프 당선을 미국 백인 남성의 폭거이자 승리로 기록했다. 극우 포퓰리스트 관종 대통령의 탄생에 깜짝 놀란 언론인들과 정치 전문가들은 그를 대통령으로 세운 국민, 특히 백인 노동자 계급 남성에 대한 성토를 이어갔다. 그런데 이 난리법석을 지켜보며 “이건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닌데? 20년 전에 내가 <스티프트: 배신당한 남자들>(1999)에서 자세히 소개했잖아”라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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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후회 없이, 함께, 꿈을 꿀 수 있을까? 여러분은 영화를 좋아하시는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대답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내 경우엔 인생의 굽이굽이마다 열광했던 영화들이 있었고, 그런 영화와의 마주침이야말로 내가 삶에서 발견한 행운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기억에 남는 대사는 어떤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를 꼽는 것도 간단하진 않다. 너무 많으니까. 그런데 최근 우리의 기억을 물화한 놀라운 책이 한 권 나왔다. 이름 하여 <대사극장>. 총 850여 쪽에 달하는 이 작업에 붙은 부제는 “한국영화를 만든 위대한 대사들”이다. 출간의 변은 이렇다. “한국영화의 전통하에서 대사는 시대와 인간을 드러내는 압축적인 지도의 역할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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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내 고양이 수명은 당신의 농담거리가 아니다 “요즘은 개가 너무 오래 살아.” 오랜만에 만난 30년 지기들과 식사를 하던 중 나온 말이다. 지난 11년간 나와 함께했지만 한 번도 이 친구들에게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던 우리집 고양이들이 처음으로 대화의 주제로 막 등장한 참이었다. 농담이려니 하고 넘기는데, 다른 친구는 또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빨리 죽을까봐 개를 못 키우겠어.” 그러고는 개 키우는 사람들이 개에게 들이는 과도한 정성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오가는 말의 한가운데에서 어쩐지 애타는 마음이 된 나는 이내 어쩌라는 건가 싶어졌다. 일단은 내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가 왜 갑자기 다른 집 개 이야기로 튀었는지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친구들에게도 연결되는 맥락은 있었다. 하나는 개가 너무 오래 살아 문제고, 하나는 개가 너무 일찍 죽어 문제인 와중에, 둘 다 어쨌거나 한국의 반려동물 문화가 마땅치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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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견리망의 시대, 동료 시민 되기를 꿈꾼다 ‘연말연시’를 좋아한다. 어느 하루를 산다고 해도 ‘오늘’은 어제에서 이어져 내일로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고, 우리의 일상은 드라마틱한 단절이라기보다는 경계가 불분명한 그러데이션에 가깝다. 12월31일과 1월1일이 크게 다를 리가 없지만, 그래도 한 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다가온 해의 첫날을 맞이한다고 생각하면, 대나무가 자라듯 마디를 하나 얻은 느낌이다. 매년 이때가 되면 찾아보는 게 있다. ‘올해의 인물/단어/사건’ 등과 내년의 전망이다. 전문가들이 권위 있는 지면을 통해 발표하는 내용도 흥미롭지만, 지인들이 전문성과 상관없이 꼽아 개인 SNS에 소개하는 리스트도 재미있다. 세상을 보는 다양한 관점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기후 고통, 호모 이그노런스, 외로움, 그리고 ‘좋은 이야기’. 2024년을 시작하면서 내가 꼽은 단어들은 이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