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희정
문화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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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씨앗으로 미래를 꿈꾼 퓨리오사와 무한나 핵전쟁으로 사막화된 22세기, 물과 화석연료를 독점한 독재자 ‘임모탄’이 폐허 위에 군림하고 있다. 호위무사인 ‘퓨리오사’는 압제를 견디다 못해 임모탄을 배신하고 고향인 ‘그린랜드’를 향해 탈출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의 시작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에 도착하지만, 생명이 약동하던 그곳도 이미 사막이 되어버린 지 오래다. 푸르른 땅에서 농사를 짓던 ‘어머니들’은 이제 바이크 전사가 되었다. 결국 임모탄을 제거하고 세계를 해방시키기로 한 퓨리오사. 영화는 그가 독재자를 처단하고 ‘시타델’의 요새로 오르며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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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개 고양이 대학살 “우리는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했다. 전기, 식량, 물, 연료, 모든 것이 다 차단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 짐승들(human animals)’과 싸우고 있고,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 2023년 10월, 당시 이스라엘 국방장관이었던 요아브 갈란트의 말이다. 비인도적 행위에 대해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을 죽이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건 나치가 유대인을 학살할 때 사용했던 문화전략이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집권한 나치가 독일 국민들이 ‘인종 청소’에 동참하도록 선동한 것은 유대인을 철저하게 멸시했기에 가능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데 동원됐던 그 무기를 고스란히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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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강을 살리는 꿈 오늘 아침, 나는 마추픽추라는 경이와 마주했다. 마추픽추는 16세기 잉카 제국이 몰락하면서 버려진 채 긴 세월 숨겨져 있던 놀라운 고산 도시다. 잉카는 침략자들에 의해 처참하게 학살당했고, 그렇게 역사에서 지워졌던 마추픽추가 세계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낸 건 20세기 초가 되어서였다. 서울 집에서 마추픽추까지의 여정은 참 멀었는데, 그 과정을 함께한 여행 메이트는 아이우통 크레나키의 <세계의 종말을 늦추기 위한 아마존의 목소리>였다. 책은 문명과 자연을 분리해 자연을 오로지 ‘자원의 보고’이자 ‘개발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이 인간이 자연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그렇게 우리가 기거하는 행성을 손상했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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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캔슬’당한 그레타 툰베리 한때 세계 언론의 뜨거운 사랑을 받다가 어느 순간 조용해진 ‘셀러브리티’가 있다. 그레타 툰베리다. 호주 독립언론 ‘진주와 자극’이 최근 툰베리 실종(?) 이유를 분석했다. 보도에 따르면, 툰베리에 대한 주류 언론의 관심은 지난 7년 사이 급감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의 경우, 2018년 이후 매년 수백건씩 쏟아지던 기사가 2025년에 이르러서는 각각 3건과 2건으로 뚝 떨어졌다. 이유는 명확하다. 미국 녹색당 질 스타인의 표현대로, 세계 주류 언론이 그를 “‘캔슬’(취소)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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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새로운 대한민국’을 찾은 귀한 손님 “중동의 총성. 방산 ‘활짝’” “중동 불안이 기회. 돌아온 개미, 3000선 방어”. 이스라엘이 이란을 폭격했다는 소식과 함께 국내 언론이 내놓은 기사 제목들이다. 당황스러웠다. 전쟁을 삶과 생명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기회로 보는 건 트럼프와 네타냐후 같은 파시스트들만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 두 명의 귀한 손님이 한국을 찾았다. 베트남 퐁니 마을의 응우옌티탄씨와 하미 마을의 응우옌티탄씨다. 동명이인이라 한 사람은 ‘퐁니 탄 선생님’이라 불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하미 탄 선생님’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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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효 마라톤의 역주행 ‘천만 러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달리기를 즐긴다니, 이제 달리기는 단순한 붐을 넘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와 함께 달리기 대회도 성황이다. 인기 있는 마라톤 대회는 참가 신청 경쟁이 치열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웃돈을 얹어 배번을 양도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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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배우 김새론과 정치인 장제원의 죽음이다. 김새론은 죽기 전까지 황색언론과 사이버레커들의 표적이었다. 음주운전 사고 후 ‘촉망받는 배우’에서 ‘문제아’로 추락했고,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 등 져야 할 책임을 다했음에도, 틈만 나면 온라인 세계로 끌려 나왔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극적인 온라인 콘텐츠의 제목이 되고, 스펙터클이 되고, ‘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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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스스로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는 자들 지난달 16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1998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후 평생을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2월19일, 제168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진행되었다. 참담하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소속 극우 인사가 “길원옥은 돈 벌러 자진해서 (위안소로) 갔다”는 등의 망언을 외쳤다. 이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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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재림 흡혈귀와 내란 우두머리 18세기 말 프랑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클로드 피노슈.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졌고, 16세에 왕의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된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다. 인간이 아닌, 흡혈귀라는 사실을. 그즈음, 프랑스 혁명이 불처럼 일어난다. 왕과 왕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동안 피노슈는 “농민처럼 입고 혁명가 행세”를 하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왕의 충복으로서 세상의 모든 혁명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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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벌린 손가락으로 맞는 새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나 사람이 가난한 모양을 뜻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에서 왔다고들 한다. 푸른 뱀의 해, 그러니까 2025년이 바로 을사년이다. 설은 여러 가지다. 누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자리잡았다 하고, 다른 누군 1785년 을사년 대기근 이후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뭐가 됐든, 푸른 뱀의 해에 나라가 망하거나 수많은 이들이 배곯아 스러졌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 스며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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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주디스 버틀러의 초현실적 한국 방문기 12월3일 새벽, 인천공항 6번 게이트 앞.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그마한 사람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게 해서 미안해요. 수고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는 내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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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닭과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아직도 있을까? 40년 전,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학교 정문 앞에 좌판을 깔고 병아리나 메추리 등을 파는 이들이 있었다.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채 삐약거리는 이 생명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한 마리에 500원, 당시에 아이스크림 다섯 개 정도의 가격이었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꾸중을 불사하고 구매를 감행했다. 한번은 병아리를 사다가 큰 사과상자 안에 작은 상자들을 넣어주고는 “이건 침대, 이건 책상” 하면서 집을 만들어 주었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서 살았으므로, 상자만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거주지였다. 하지만 잘해준답시고 넣어준 작은 상자에 걸려 넘어진 병아리는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날 아침 차갑게 식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