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희정
문화평론가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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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효 마라톤의 역주행 ‘천만 러너 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국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달리기를 즐긴다니, 이제 달리기는 단순한 붐을 넘어 한국인의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아가는 모양이다. 이와 함께 달리기 대회도 성황이다. 인기 있는 마라톤 대회는 참가 신청 경쟁이 치열해 “아이돌 콘서트 티케팅을 방불케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 심지어 웃돈을 얹어 배번을 양도받는 일까지 벌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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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두 죽음, 아니 세 죽음 두 죽음이 머릿속을 맴돈다. 배우 김새론과 정치인 장제원의 죽음이다. 김새론은 죽기 전까지 황색언론과 사이버레커들의 표적이었다. 음주운전 사고 후 ‘촉망받는 배우’에서 ‘문제아’로 추락했고, 법적 처벌과 손해배상 등 져야 할 책임을 다했음에도, 틈만 나면 온라인 세계로 끌려 나왔다. 그의 죽음은 일종의 ‘사회적 타살’이었다. 게다가 그게 끝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자극적인 온라인 콘텐츠의 제목이 되고, 스펙터클이 되고, ‘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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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스스로 검은 봉지를 뒤집어쓰는 자들 지난달 16일, 일본군 ‘위안소’ 제도의 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였던 길원옥 할머니가 별세하셨다. 1998년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한 후 평생을 여성인권과 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분이다. 그를 기리는 추모제가 2월19일, 제1688차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진행되었다. 참담하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 소속 극우 인사가 “길원옥은 돈 벌러 자진해서 (위안소로) 갔다”는 등의 망언을 외쳤다. 이는 ‘위안부’ 피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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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재림 흡혈귀와 내란 우두머리 18세기 말 프랑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클로드 피노슈. 그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에게 버려졌고, 16세에 왕의 군대에 들어가 장교가 된다. 방탕한 삶을 살던 그는 어느 날 자신의 정체를 깨닫는다. 인간이 아닌, 흡혈귀라는 사실을. 그즈음, 프랑스 혁명이 불처럼 일어난다. 왕과 왕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동안 피노슈는 “농민처럼 입고 혁명가 행세”를 하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자신이 섬기던 왕의 충복으로서 세상의 모든 혁명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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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벌린 손가락으로 맞는 새해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있다. 스산하고 쓸쓸한 분위기나 사람이 가난한 모양을 뜻할 때 사용하는 단어다. 이 말은 ‘을사년스럽다’에서 왔다고들 한다. 푸른 뱀의 해, 그러니까 2025년이 바로 을사년이다. 설은 여러 가지다. 누군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을씨년스럽다’는 말이 자리잡았다 하고, 다른 누군 1785년 을사년 대기근 이후 이 말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뭐가 됐든, 푸른 뱀의 해에 나라가 망하거나 수많은 이들이 배곯아 스러졌던 고통스러운 기억이 한국인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말에 스며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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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주디스 버틀러의 초현실적 한국 방문기 12월3일 새벽, 인천공항 6번 게이트 앞.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자그마한 사람이 온화한 미소를 띠며 인사를 건넸다. “이른 새벽부터 움직이게 해서 미안해요. 수고해줘서 고맙습니다.” 그는 악수를 청하고는 내 차 뒷자리에 올라탔다.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였다. 그는 “민주주의와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제로 강연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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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닭과 함께 늙어갈 수 있을까 아직도 있을까? 40년 전,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에는 학교 정문 앞에 좌판을 깔고 병아리나 메추리 등을 파는 이들이 있었다.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채 삐약거리는 이 생명체들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한 마리에 500원, 당시에 아이스크림 다섯 개 정도의 가격이었다. 나는 가끔 어머니의 꾸중을 불사하고 구매를 감행했다. 한번은 병아리를 사다가 큰 사과상자 안에 작은 상자들을 넣어주고는 “이건 침대, 이건 책상” 하면서 집을 만들어 주었다. 마당이 없는 아파트에서 살았으므로, 상자만이 내가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거주지였다. 하지만 잘해준답시고 넣어준 작은 상자에 걸려 넘어진 병아리는 다리가 부러졌고, 다음날 아침 차갑게 식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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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대학살들의 역사 “Never Again(다신 안 된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차별 폭력과 살상 행위를 묵인하는 논리다. 이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기억하면서 다신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유대인의 생명과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일종의 ‘판단 원칙’으로서 작동해 왔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세계적 철학자가 이를 옹호하기도 했거니와, 내 주변에서도 이에 심정적으로 동조한다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대학살이 또 다른 학살을 정당화할 정도로 인류 문명사에 있어 그토록 특별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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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어떤 놀이의 결말 “아이들의 디지털 놀이터.” 한 시사프로의 진행자가 딥페이크 성범죄를 언급하면서 사용한 표현이다. 아이들의 놀이터에 딥페이크라는 새로운 장난감이 주어지면서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는 논평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여자의 얼굴, 신체, 이름을 재료로 삼아 ‘가짜’를 만들어 짓밟고 낄낄거리는 행태는 전혀 새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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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낙태가 죄라면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 낙태죄 폐지 운동의 오랜 구호다. 임신중지는 개인의 신체, 그 신체가 놓인 가족 구성, 함께 임신을 한 남성과의 관계, 출산 후 양육 환경과 모자녀가 처할 사회적 상황 등 연속적인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관계적 사건이다. 그런데 국가가 이를 무시하고 단편적인 행위에 집중하여 그에 ‘범죄’라는 낙인을 찍는다면, 그건 국가의 문제라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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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흉가 체험장이 된 몽키하우스 “국내 흉가 몽키하우스 방문기.” 한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영상의 제목이다. 이외에도 ‘몽키하우스’로 검색하면 흉가 체험 영상을 여럿 보게 된다. 영상의 형식들은 대체로 비슷하다. 야밤에 건물을 찾아가 카메라 시점으로 여기저기 탐색하는 와중 카메라가 갑자기 꺼지거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발자국 등이 나타나는 식이다. 때로는 무속인이 출연해 “원환귀”와 마주치기도 한다. 몽키하우스의 이런 ‘오락적 기능’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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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학살이 돈이 되는 세계 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아우슈비츠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뼈만 남은 유대인, 사악한 나치, 혹은 단 한 명의 유대인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간적인’ 독일인 쉰들러 등 우리에게 익숙한 이미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유대인 강제수용소 바로 옆에 위치한 나치 친위대 관사에서 자신이 꿈꿔온 중산층 정상 가족을 이루고 평범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회스 가족의 일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