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한문학자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진상품 마케팅 진상품은 국왕에게 바치는 지방 특산물을 말한다. 진상품의 종류는 조선시대 재정 백서 및 지리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전부 식재 아니면 약재다. 음식을 진상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향토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진상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일례로 부산의 향토음식 동래파전은 삼월 삼짇날 동래부사가 진상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냉동탑차도 아이스박스도 없는 조선시대에 부산 동래구에서 서울 종로구까지 파전을 상하지 않게 배달하는 방법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설령 상하지 않게 배달했다 한들, 그게 맛이 있겠는가. 재료만 가져와 대궐 앞에서 부쳐 따끈따끈하게 진상하는 방법도 있겠다만, 그걸 동래파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종로파전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
역사와 현실 국민사은대잔치 ‘고객사은대잔치’라는 행사가 있다. 기업이 고객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뜻에서 준비하는 이벤트다. 대개는 경품 행사다. 1등 경품은 어마어마하다. 승용차 정도는 보통이다. 한때는 억대의 현금이나 귀금속을 주기도 했다. 사행성을 조장한다는 비난 탓에 규모가 줄기는 했지만, 그래도 고가의 경품을 주는 행사가 드물지 않다. 그런데 경품은 운 좋은 사람의 차지다. 정작 충성 고객은 아무 혜택도 받지 못한다. 정말 고객을 감사하게 여긴다면 모든 고객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제품 가격을 낮추든지 양을 늘리든지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굳이 극소수만 혜택을 보는 경품 행사를 벌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분은 ‘사은’이지만 목적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
역사와 현실 보신각, 시간을 널리 알리는 집 1395년, 조선 태조는 운종가(현 종로1가)에 누각을 짓고 큰 종을 달았다. 아침저녁 종을 쳐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다. 조선 최초의 종각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종각이 불타자 건물을 새로 짓고 사찰의 범종을 옮겨 달았다. 그 뒤로도 종각은 누차 화재를 겪고 자리를 옮겼지만, 그 종은 변함없이 도성 사람들의 시계 노릇을 했다. 이른바 ‘보신각 종’이다. 종각에 보신각 이름이 붙은 경위는 자세하지 않다. 고종 시절 붙인 이름인 듯한데, 고종이 직접 붙였다고도 하지만 증거는 없다. ‘보신’ 의미도 분명치 않다. 혹자는 방위에 맞춘 이름이라 한다. ‘인의예지신’은 각기 동서남북과 중앙을 상징하는데, 동쪽에 흥인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홍지문이 있으니, 도성 가운데 자리한 종각의 이름에 ‘신’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대문 안 건물 이름에 전부 ‘신’이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게다가 ‘인의예지’를 넣은 도성 문들의 이름은 개국 초에 지은 것이다. 500년이 지난 고종 때 와서야 ‘신’을 채워넣었다니 이상하다. 무엇보다 건물과 성문은 다르다. 건물의 이름은 그 건물의 기능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
역사와 현실 동포의 명암 ‘동포’는 한배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한서>의 ‘동방삭전’에 처음 보이는데, 주석에 “친형제를 말한다”라고 했다. 한배에서 안 나와도 친한 사이를 형제에 비유하곤 한다. 공자의 제자 자하는 말했다. “군자가 공손하고 예의바르면 천하 사람이 모두 형제다.” 여기서 군자는 완벽한 인격자라는 도덕적 의미보다 사회 지배층이라는 계급적 의미가 강하다. ‘천하 사람’ 범주에 일반 백성은 포함되지 않는다. 군자의 형제가 될 수 있는 사람은 군자뿐이다. 고대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과 백성은 동등한 인간이 아니었다.
-
역사와 현실 숙녹피대전 조선시대 재정 백서 <만기요람>에 따르면 가장 값비싼 가죽은 표범가죽이다. 호랑이가죽의 가격은 표범가죽의 3분의 2에 불과했다. 호랑이의 줄무늬보다 표범의 둥근 무늬를 선호해서란다. 그다음이 사슴가죽이다. 가격이 호랑이가죽과 별 차이가 없다. 그다음이 수달가죽, 돼지가죽, 노루가죽 순이다. 노루는 사슴과 비슷한 동물이지만 노루가죽은 싸구려다. 사슴가죽의 10분의 1 수준이다. 사슴가죽이 비싼 건 특유의 신축성 때문이다. 섬세한 섬유다발로 이뤄진 사슴가죽은 잡아당기면 늘어나고, 손을 놓으면 원래대로 줄어든다. 무두질을 거치면 더욱 부드러워지고 탄력이 좋아진다. 그래서 ‘숙녹피대전’이라는 말이 생겼다.
-
역사와 현실 진실을 외면하는 정부 진나라 환관 조고가 자신의 권력을 시험하려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황제 호해에게 사슴(鹿)을 바쳤다. “이것은 말(馬)입니다.” 사실대로 사슴이라 말한 신하들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뒤로는 아무도 조고에게 바른말을 못했다. 사자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유래다. 조고의 행태는 일찍이 예견된 것이었다. 진시황이 지방을 순행하다 갑자기 사망하자 조고는 진시황의 죽음을 감추고 얼음을 가득 채워넣어 시신의 부패를 막았다. 평상시처럼 음식을 올리고 업무를 보고하게 했다. 맏아들 부소를 후계자로 지정한 문서를 파기하고, 자결하라는 문서로 바꿔치기했다. 죽은 사람을 살아 있다 하고, 후계자를 죄인으로 둔갑시켰으니, 이 역시 지록위마와 다름없다.
-
역사와 현실 격식과 실용 1884년 윤5월, 고종은 복식 제도 개혁안을 발표한다. ‘갑신의제개혁’이라고 한다. 복식의 간소화와 단일화를 지향하는 이 개혁안은 서구와의 교류가 잦아지면서 전통 복식의 불편에 눈을 뜬 결과였다. 급진개화파는 양복 도입을 바랐지만 당시로선 시기상조였다. 복식 개혁을 영향권 탈피 시도로 의심하는 청나라의 눈치도 봐야 했다. 결국 개혁안은 전통 복식을 약간 수정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공식 행사복인 ‘조복’, 제사 때 입는 ‘제복’, 상중에 입는 ‘상복’은 그대로 두고, 평상복만 바꾸었다. 활동에 편리하게 소매를 좁힌 ‘착수의’를 평상복으로 삼고, 그 밖의 ‘도포’니 ‘직령’이니, ‘창의’니 ‘중의’니 하는 복잡한 옷들은 전부 없애기로 했다. 관료의 복장은 양복을 본떠 검은색으로 통일했다.
-
역사와 현실 조선시대 성교육 <천자문>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도 ‘하늘 천, 따 지’ 정도는 알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아예 <천자문>이 뭔지 모른다. <천자문>을 마치고 이어서 읽었던 <동몽선습> <격몽요결> <소학> 같은 교육용 필독서 역시 알 턱이 없다. 세상이 변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가르치던 것과 똑같은 식으로 가르치는 과목이 딱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성교육이다. 조선시대 성교육의 구체적인 수업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야담으로 전하는 이야기가 더러 있지만 사실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흥미 위주의 음담패설에 불과하다. 이밖에 춘화(春화)를 보면서 성교육을 했다는 둥, ‘보정(保精)’이라는 성교육 과목이 있었다는 둥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도 전부 낭설이다. 어쩌다 발견한 성 관련 자료를 짜깁기한 것이다. 부모가 가르친 것 같지도 않다. 가르쳤다는 사람도, 배웠다는 사람도 찾을 수 없다. 하기야 오늘날 부모자식 사이에서도 성에 관한 이야기는 하기 어렵다. 조선시대는 오죽했겠는가.
-
역사와 현실 명복은 빌지 않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말이다. 명복(冥福)은 저승의 행복이다. 이승의 삶이 끝나면 저승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불교적 세계관에서 나온 개념이다.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느 종교나 대체로 비슷하지만, 불교는 독특한 점이 있다. 다른 종교에서는 생전의 행위와 신앙이 천국행과 지옥행을 결정한다. 따라서 사람이 죽고나서 명복을 빌어봐야 부질없는 짓이다. 반면 불교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 명복을 빌어주면 아귀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악인도 극락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 명복을 비는 게 효과가 있는 종교는 불교뿐이다.
-
역사와 현실 ‘세종스타일’과 광화문 한글 현판 자칭 ‘시민모임’이 광화문에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자 현판은 역동적이고 민주적인 시민의 광장을 상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해례본 서체로 제작한 샘플도 선보였다. 반드시 한글 현판을 걸도록 본격적인 시민운동을 벌이겠단다. 역동적이고 민주적인 광장 좋다. 현판만 바꾼다고 되겠는가. 이참에 광화문 앞 세종대왕 동상도 바꾸자. 근엄하게 옥좌에 앉은 모습은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다. 좀 더 친근한 모습으로 바꾸는 게 좋겠다. 월드스타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모습은 어떨까. ‘세종스타일’ 동상은 역동적인 대한민국을 상징하기에 충분하다. K팝의 위상과 품격도 높아질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선거는 예상에 불과하다 이번 투표에 사용한 기표용구에는 동그라미 안에 ‘점 복(卜)’자가 들어 있다. 원래는 ‘사람 인(人)’이었는데 용지를 접었다가 잉크가 묻어서 누구를 찍었는지 분간하지 못하는 사태를 피하려고 바꿨다고 한다. 대칭을 이루지 않는 글자라야 확실히 분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설명이다. 대칭 아닌 글자는 얼마든지 있다. 고작 혼동을 피하려고 사람 인을 비틀어 점 복으로 만들었다니. 일설에는 ‘사람 인’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ㅅ’을 연상케 한다는 논란이 있어 바꾸었다는데, 만약 이름에 ‘복’자가 들어가는 사람이 출마하면 그때는 또 어떡할지 모르겠다. 애당초 ‘사람 인’을 집어넣은 이유도 불분명하다. 이처럼 먼 옛날의 일도 아닌데 그리된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이 한둘이 아니다.
-
역사와 현실 요행을 바라지 말고 피하라 전염병 따위를 피해 거처를 옮기는 것을 피접(避接)이라고 한다. 전염병의 원인도 모르고 예방약도 치료약도 없던 시절, 그나마 전염된다는 사실만은 알고 있었기에 피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유일한 전염 방지책이다. 국왕도 예외가 아니었다. 궁궐에 감염자가 발생하면 국왕은 다른 궁궐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에 궁궐이 다섯 곳이나 있는 이유는 피접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경덕궁(慶德宮)은 애초에 피접할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궁궐은 원래 단절된 곳이니 굳이 서울을 떠나 멀리 갈 것까지는 없다. 왕자와 공주는 민가로 피접했다. 전염병이 아니더라도 궁궐은 어린이가 자라기에 적합한 곳이 아니다. 건물은 크고 넓은데 사람은 적으니 어린 왕자와 공주들이 무서워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조선 초기 왕자와 공주들은 대부분 민가에서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