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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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세는나이를 내버려두라 맬컴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캐나다 프로 하키 선수는 1~3월생이 많다. 어째서일까. 어릴 적에는 개월 수에 따라 성장차가 크다. 같은 해 태어난 아이들끼리 경쟁하면 1~3월생이 유리하다. 그 차이가 유소년 리그와 청소년 리그를 거쳐 성인 리그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제야 알겠다. 내가 초등학교 6년 내내 학급에서 키가 가장 작았던 이유를. 내 생일은 2월 하순, 속칭 ‘빠른 연생’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동급생보다 신체적 성장이 늦은 편이었다. 모르긴 하지만 지적 성장도 차이가 났을 것이다. 당시 1, 2월생 자녀의 부모들은 입학 시기를 일부러 늦추는 것도 고민해야 했다. ‘빠른 연생’이 유리한 점도 있지만 불리한 점이 많았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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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분서와 훼판 분서와 훼판은 조선시대의 금서 조치다. 분서는 시중에 유통되는 책을 모조리 수거해 소각하는 것이고, 훼판은 판목을 파괴해 더 이상 출판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결국 분서와 훼판은 책의 생산과 유통을 금지하는 방법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체제를 위협하는 책을 금서로 지정하고 탄압했다. 조선은 어느 나라보다 사상 통제가 엄격했지만, 국가가 분서와 훼판을 주도한 사례는 의외로 많지 않다. 불온한 사상을 담은 책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분서와 훼판을 결정짓는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저자다. <예기유편>이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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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저는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자기소개서에 넣으면 반드시 떨어진다는 마법의 문장이다. 인사담당자의 눈에는 진부하다 못해 혐오스러운 모양이다. 물론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는 죄가 없다. 아무렴 기업이 주정뱅이 아버지와 바람둥이 어머니 밑에서 자란 지원자를 선호하겠는가. “우리집은 어려서부터 가난했었고”로 시작하는 신파극형 자소서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다. 인사담당자는 바쁘다. 성의 없는 자소서를 찬찬히 검토할 여유가 없다. 상투적인 표현으로 점철된 자소서를 보면 표절부터 의심한다. 그리고 기업은 트렌드에 민감하다. 자소서의 트렌드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지원자를 어디에 쓰겠는가. 그러므로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어머니’로 시작하는 자소서는 쓰레기통으로 직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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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육식은 죄악이 아니다 채식이 생명을 위하는 길이라는 관념은 고대 인도의 산물이다. 모든 생명은 윤회하므로 동물을 먹는 건 사람을 먹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관념이다. 채식은 괜찮다. 식물은 윤회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불교의 육도윤회에 식물은 포함되지 않는다. 당시 사람들은 식물을 생명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과학이 발달한 지금은 식물도 생명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안다.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고, 피가 튀지 않는다고 생명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채식이 ‘생명’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육식이 악이면 채식도 악이고, 채식이 선이면 육식도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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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수나라 문제 양견은 태어날 적부터 손에 ‘왕’자가 새겨져 있었다. 손금이 ‘왕’자 모양이었나 보다. 그는 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 믿었다. 황후의 아버지로서 대장군의 자리에 오르고도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아홉 살짜리 황제를 쫓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았다. 양견은 아들 양광의 쿠데타로 목숨을 잃었다. 양광은 희대의 폭군 수양제다. 수양제의 죽음과 함께 수나라는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요나라 야율을신의 어머니는 양을 잡아 뿔을 뽑고 꼬리를 자르는 꿈을 꾸었다. 점쟁이가 말했다. “양(羊)의 뿔과 꼬리를 없애면 왕(王)이니 당신의 아들은 왕이 될 것이다.” 양치기 소년 야율을신은 황제의 신임을 얻어 위왕에 책봉되었다. 그 역시 끝이 좋지 않았다. 권력을 남용하다 황제의 의심을 사서 처형당했다. 가족도 몰살을 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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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장원급제는 실력이 아니다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하는 ‘공원춘효도’와 ‘평생도’의 소과응시는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풍경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두 그림의 구도는 비슷하다. 곳곳에 커다란 양산이 펼쳐져 있고, 양산 아래마다 예닐곱 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답안을 작성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각자 답안을 쓰는 게 아니라 하나의 답안을 공동으로 작성하고 있다. 김홍도는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부정이 난무하는 과거제도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다. 김홍도의 그림은 사회 비판과 거리가 멀다. 당시는 그것이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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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진심은 언제부터 빈말이 되었나 최창대(1669~1720)가 병으로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던 때의 일이다. 소동파의 시를 읽다가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다”라는 구절을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 구절을 부연하여 ‘진심음(眞心吟)’이라는 제목으로 9편의 시를 지었다. 9편 모두 “병으로 한가로운 것도 나쁘지 않으니,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因病得閒殊不惡 得閒因得見眞心)”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바쁜 일상에서는 진심이 드러나지 않는다. 한가롭고 여유로운 생활을 만끽할 때, 비로소 진심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한가로워야 진심이 드러난다고? 진심은 급할 때 드러나는 것 아닌가? 평소 성인군자처럼 행동하던 사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양심과 윤리를 내팽개치지 않는가? 오해다. 급박한 상황에 놓인 인간의 비윤리적 행동은 동물적 생존 본능에 가깝다. 본능과 진심은 다르다. 운전자는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나면 반사적으로 핸들을 꺾는다. 조수석에 탄 사람이 대신 죽기를 진심으로 바라서가 아니다. 급박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우선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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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 금속활자의 실체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점이 출토되었다. 이미 그 존재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물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인 발견이다. 특히 이 중에는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앞서는 갑인자(1434)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구텐베르크보다 200년 앞선 고려시대부터 금속활자를 사용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떠오른다. 구텐베르크 금속활자는 지식의 확산을 촉진하여 사회 변혁에 기여했는데, 조선 금속활자는 어째서 그러지 못했는가. 금속활자의 발명이 세계사적 사건으로 손꼽히는 이유는 서적의 다품종 대량생산이 가능해서다. 그러나 조선 금속활자는 그렇지 못했다. 우선 내구도가 문제다. 조선 금속활자는 10~20년마다 새로 만들어졌다. 활자의 수명이 그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100년 넘게 사용한 금속활자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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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의 묘정 묘정(廟庭)은 역대 국왕의 위패를 모신 종묘의 다른 이름이다. 그 국왕의 심복이었던 신하의 위패도 함께 모신다. 배향공신이라고 한다. 생전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선발하는 것이 원칙이다. 배향공신으로 선발되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다. 나라가 망해서 종묘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배향공신은 두고두고 국왕과 함께 제사를 받는다. 배향공신의 수는 국왕마다 다르다. 적으면 한두 명, 많으면 예닐곱 명이다. 이들은 국왕의 집권 과정과 통치 성격을 보여준다. 배향공신의 첫 번째 자격은 국왕의 집권에 기여한 공로다. 태조의 배향공신은 모두 개국공신이고, 태종의 배향공신은 왕자의 난에 가담하여 태종의 정권 장악에 기여한 자들이다. 세조의 배향공신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몰아낸 자들이고, 중종과 인조의 배향공신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축출한 반정의 주도자들이다. 국왕 즉위 전에 죽었더라도 즉위에 기여한 공로가 있으면 된다. 김창집은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지만, 세제였던 영조를 보호한 공로를 인정받아 배향공신으로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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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장인어른, 장모님인가 아버님, 어머님인가 한강 정구가 퇴계 이황에게 물었다. “아내의 친족을 형, 아우, 숙부, 조카라 부르고, 아내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아내의 서열을 따르는 풍습이 있는데 어떻습니까?” 퇴계가 대답했다. “오늘날 아내의 친족 호칭이나 아내의 서열을 따르는 풍습은 모두 옳지 않다. 아내의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풍습이 있기는 하지만, 결코 모범으로 삼을 수 없다.” 우리 결혼문화는 조선 중기까지 데릴사위제가 대세였다. 최근까지 신랑을 거꾸로 묶어놓고 발바닥을 때리는 악습이 유행한 것도 이와 관계가 있다. ‘동상례’라고 하는 오래된 풍습이다. 원래 가혹한 신고식은 새로운 구성원을 길들이는 방법이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장가드는 데릴사위제에서는 신랑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므로 신랑 신고식을 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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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감수자도 외국 영화를 원제 그대로 개봉하곤 하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외화 제목을 철저히 번역한다. 대개는 원제에 충실한 직역이거나 직관적으로 이해 가능한 의역이다. ‘어벤저스’는 ‘복수자들’, ‘캡틴 아메리카’는 ‘미국 대장’, ‘헐크’는 ‘녹색 거인’, ‘토르’는 ‘뇌신’이다. ‘브레이브 하트’는 ‘용감한 마음’, ‘킹덤 오브 헤븐’은 ‘천국왕조’, ‘마션’은 ‘화성 구원’으로 번역했다. 만화도 예외가 아니다. ‘라이언 킹’은 ‘사자왕’, ‘라푼젤’은 ‘장발 공주’다. 원제 그대로 개봉한 외화는 극히 드물다. ‘해리포터’를 ‘하리보더’로 번역한 정도가 고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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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무엇을 위한 기념일인가 지난달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한 ‘이십공신회맹축(二十功臣會盟軸)’은 1680년 열린 회맹제를 기념하여 만든 문서다. 24m에 달하는 이 문서는 원형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관련 기록도 충실하여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은 만큼 국보로 지정하기에 손색이 없다. 회맹제는 공신과 그 자손들이 모여 공신 책훈을 기념하고 국왕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연례행사는 아니지만 국가 주관의 공식 행사인 만큼 오늘날의 국가기념일이나 다름없다. 회맹제의 절차는 이렇다. 날을 잡아 제단을 설치하고 국왕이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지낸다. 제사를 마치면 국왕은 짐승의 피를 입술에 바르는 삽혈 의식을 거행한다. 두말하지 않겠다는 맹세다. 의식을 마치면 잔치를 열어 즐긴다. 참석자에게는 푸짐한 선물을 하사한다. 1680년 회맹제에는 개국 이래 당시까지 20차례에 걸쳐 책훈된 공신 및 그 자손 412명이 참석했다. 회맹제 참석은 공신의 권리이자 의무다. 정당한 이유 없이 불참하면 처벌을 받는다. 하기야 국가기념일 행사에 국가유공자가 빠지면 모양새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