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유승
한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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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위기를 기회로 삼는 사람들 1815년, 조선 선비 윤기는 경기 양근의 산골짜기로 이사했다.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이 야기한 세계적 대기근이 조선을 덮친 해였다. 모든 물건이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곡식은 물론 소금, 땔감, 옷감, 심지어 짚신조차도 구할 수 없었다. 서울 시장까지 가 보았지만 그곳도 마찬가지였다. 땔나무 한 짐이 무려 300~400전으로 폭등했다. 평상시 쌀 한 가마 값이다. 간신히 구한 소금은 메밀과 보릿가루를 섞은 가짜였다. 돈이 있어도 물건을 살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윤기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물건이 부족한가? 누군가 대답했다. “그야 죽은 사람이 많아서 그렇지. 농부도 죽고 나무꾼도 죽고 소금 굽는 염부도 죽었으니까.” 하지만 윤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기근과 역병이 심하다지만 죽은 사람은 열에 한둘도 못 된다. 나머지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생산자가 줄어들어 물건이 부족하다니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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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예의 성이성(成以性, 1595~1664)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인물이다. 전라도 암행어사로 내려와 거지꼴로 원님들의 잔치 자리에 끼어들어 ‘술동이에 담긴 술은 백성의 피요, 쟁반에 올린 안주는 백성의 기름’이라는 시를 짓고는 ‘암행어사 출두’를 외쳤다는 일화가 <필원산어>에 실려 있다. <춘향전>의 클라이맥스와 똑같은 이 일화가 발견되자 한때 국문학계가 떠들썩했다. 성이성은 십대 초반에 남원부사로 부임한 부친을 따라와 남원에서 살았다. 이 점도 이몽룡과 비슷하다. 하지만 춘향 같은 여인과의 로맨스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설령 있었다 해도 <춘향전>처럼 극적인 재회는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이성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가 33세, 암행어사로 전라도에 내려왔을 때가 45세였다. 춘향이 할머니가 되고도 남는 세월이다. 암행어사 출두 이야기도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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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강자와 약자라는 이분법 아첨은 남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다. 대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윤기(1741~1826)에 따르면 당시에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아첨하는 풍조가 만연했다. 주인은 노비에게 아첨하며 행여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하고, 상관은 부하에게 아첨하며 행여 인기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정승이 일개 야인에게 아첨하여 명성을 얻으려 하고, 사대부가 시정잡배에게 아첨하여 이득을 보려 한다. 그 결과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친구처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고 싸움하듯 소리를 질러댄다”(<무명자집>). 윤기는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고 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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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대입, 공정한 지옥? 밤 10시가 넘은 시각, 분당 정자동 앞을 지나는데 차들이 도무지 움직이질 않았다. 출퇴근 시간에도 좀처럼 막히지 않는 왕복 10차선 도로다. 사고라도 났나 싶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도로 가장자리 2개 차선은 학원을 마친 학생들을 기다리는 학원 버스와 자가용으로 주차장이 되었다. 그러고도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한 차들이 세 번째 차선마저 주차장으로 만들려는 판국이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 많은 버스와 자가용에 태울 수 있는 인원의 수십 배 학생들의 인파가 지하철역으로, 버스정류장으로 무리지어 움직이고 있었다. 흡사 프로야구 경기가 끝나고 수만 관중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안양 평촌동에서도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정자동과 평촌동은 경기 남부에서 손꼽히는 학원가다. 경기가 이 정도니 서울은 오죽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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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상상력의 한계 <태원지(太原誌)>는 한국 고전소설사에 보기 드문 판타지 소설이다. 원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던 시기, 중원 수복을 갈망하는 호걸 임성(林成)은 동지들과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다. 이들은 요괴가 사는 아홉 개의 섬을 거쳐 천신만고 끝에 낯선 대륙에 도착한다. 그 대륙의 이름은 태원, 중국의 존재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다. 태원의 면적은 사방 10만리, 그러니까 15억㎢가 넘는다. 지구 면적이 5억㎢이므로 애당초 불가능한 설정이지만, 어쨌든 스케일만큼은 대단하다. 참고로 <반지의 제왕>의 무대인 중간계는 유라시아 대륙(5400만㎢)과 비슷하고, ‘왕좌의 게임’이 벌어지는 웨스테로스 대륙은 고작 750만㎢이다. <태원지>는 주인공 임성이 이 거대한 대륙을 통일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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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인정의 나라, 인륜의 나라 성호 이익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인정의 나라다.” 마음씨 좋은 사람이 많다는 뜻일까? 아니다. ‘인정’은 뇌물의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아름답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뇌물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호가 본 조선은 뇌물의 나라였다. 인정이라는 명목의 뇌물이 가장 만연한 분야는 조세 행정이었다. 국가 재정을 지탱하는 전세(田稅), 군역(軍役), 공납(貢納)은 모두 뇌물의 온상이었다. 무슨 특별한 혜택을 바라서 뇌물을 주는 것이 아니다. 뇌물이 없으면 정상적인 세금 납부조차 불가능했다. 세금을 깎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금을 내기 위해 뇌물을 주어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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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돌고 도는 조리돌림 조리돌림은 여러 사람 앞에서 죄인을 끌고 다니며 망신을 주는 형벌이다. 회시(回示)라고도 하는데, 돌려보인다는 말이다. 조리돌림의 기원은 고대 중국의 기시형(棄市刑)으로 보인다. 저잣거리에서 집행하는 공개 처형이다. 굳이 많은 사람이 오가는 저잣거리에서 죄인을 처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기> 왕제에 “저잣거리에서 사람을 처형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버린다”라고 했다. 공동체 구성원의 합의에 따라 형벌을 집행한다는 점을 천명하기 위해서다. 다른 의도도 있었을 것이다. 죄인에게는 수치심을 주고, 대중에게는 경각심을 준다. 분노한 대중에게 분풀이할 기회를 제공하는 기능도 빠뜨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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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아베의 공과 조선 후기 문인 교와(僑窩) 성섭(成涉·1718~1788)은 경북 칠곡의 시골 마을에서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저술에 몰두했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곤 주변에 사는 선비 몇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를 만나본 사람은 누구나 그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했다. 성섭의 학문적 성향은 대개의 영남 선비와 사뭇 달랐다. 그의 독서 범위는 당파를 넘나들었으며, 명·청의 최신 서적도 입수해 읽었다. 광범위한 독서를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조망하는 그의 안목은 놀라울 정도다. 당시 명나라가 멸망한 지 100년이 넘었지만, 조선 집권층은 여전히 ‘오랑캐’ 청나라가 곧 멸망하고 새로운 한족 왕조가 출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성섭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 지배 이념이었던 대명의리론이 현실과 동떨어진 탁상공론이며, 노론의 집권을 공고히 하려는 수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성섭은 청나라가 안정을 누리고 번영을 구가할 것이라 예언했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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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너만 아니면 된다고? 포폄(褒貶) 문서라는 것이 있다. 조선시대 관원의 근무평정서다. 평가 주체는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장이며, 평가 대상은 직속 하급 관원들이다. 평가는 매년 두 차례 실시하며 상, 중, 하로 성적을 매긴다. ‘하’를 받으면 퇴출이 원칙이다. ‘중’을 받아도 안심할 수 없다. 거듭 ‘중’을 받으면 역시 퇴출이다. 게다가 상대평가다. ‘하’를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으면 평가자가 견책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현재 남아 있는 포폄 문서를 보면 평가 대상자 대부분이 ‘상’이고, ‘중’과 ‘하’는 한둘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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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사람이 먼저다 춘추시대 위(衛)나라 의공(懿公)은 학을 끔찍이 아꼈다. 학을 관직에 임명하고 녹봉도 지급했다. 귀족이나 탈 수 있는 수레에 태우고 다녔다. 어느 날 북방 이민족이 위나라를 침략했다. 의공은 백성들에게 무기를 나누어주고 맞서 싸우게 했다. 백성들은 거부했다. “학에게 싸우라고 하시지요.” 백성에게 외면당한 의공은 결국 이민족 군사들에게 죽고 말았다. 전국시대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말을 애지중지했다. 비단옷을 입혀 침대에서 재우고, 대추와 육포를 먹이로 주었다. 말이 죽자 장왕은 신하들에게 상복을 입히고, 귀족의 예법에 준해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려 했다. 반대하는 자는 처형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우맹(優孟)이라는 신하가 교묘하게 왕을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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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가족호칭은 언중의 선택 지난 15일, 여성가족부의 주최로 가족호칭 토론회가 열렸다. 불평등한 가족호칭의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시댁과 처가는 ‘시가’와 ‘처가’로 동등하게 대접하고, 시부모와 처부모는 ‘아버님’과 ‘어머님’으로 통일하며, ‘도련님’과 ‘아가씨’ 대신 이름을 부르자고 한다. 누구 아빠, 누구 엄마보다 ‘여보’, ‘당신’이,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보다 ‘큰삼촌’과 ‘작은삼촌’이 바람직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증조할아버지 대신 ‘최고할아버지’라는 색다른 호칭도 선보였다. 현재 가족호칭의 가장 큰 문제는 성별 비대칭이다. 쉽게 말해 남편이 사용하는 호칭과 아내가 사용하는 호칭이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오랜 관습이라 별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많지만, 호칭을 사용하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불평등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불평등한 호칭을 전통이라는 이유로 고집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어색하고 생소한 호칭을 새로 만드는 게 맞는지도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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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문제는 절차다 조선왕조는 국가 위기 상황에서 공훈을 세운 사람을 공신(功臣)으로 책봉했다. 공신 책봉은 총 28차례였다. 조선 건국에 기여한 개국공신(開國功臣),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선무공신(宣武功臣), 인조반정을 주도한 정사공신(靖社功臣) 등이 대표적이다. 공신은 등급에 따라 토지와 노비를 하사받고 세금과 부역이 면제된다. 관직 등용의 기회와 처벌 경감의 약속도 빠뜨릴 수 없다. 이 같은 혜택은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에게 주는 상이자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든든한 보험이다. 국난이 일어나면 공신의 혜택은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