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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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저기 병든 자들이 있다, 교회 문을 열라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코로나19 창궐이 마귀의 짓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마귀는 쫓지 못하고 ‘박근혜 시계’를 찬 채 큰절로 용서를 빌었다. 그렇게 스스로가 세상의 바이러스임을 인정했다. 그는 ‘평화의 궁전’ 문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평화는 결코 거창한 궁전에 깃들지 않는다. 결국 그는 예수 이름을 파는 속세의 노인이었다. 기성교단은 당장 사이비집단 신천지를 해체시키라 야단이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 특히 대형교회는 이단 논란에서 자유로운가. 한국 교회의 비약적인 성장에는 별난 것이 있었다. 바로 종말론 설파, 개인숭배, 주술적 종교의식, 헌금 강요 등이다. 이러한 물질만능주의, 권위주의, 신비주의를 청산했는가. 아니다, 여전히 세속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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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미담이 괴담을 밀어내고 있다 전쟁이 끝났어도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가난한 땅에 돌림병이 떨어졌다. 소리 없는 폭탄, 결핵이었다. 마을마다 기침을 했다. 변변한 치료약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가슴만 쥐어뜯었다. 거의가 죽어나갔다. 폐병쟁이의 각혈은 슬픔 속에도 스며들지 못했다. 그저 하늘 아래,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죄인이 되어야 했다. “푸른 하늘에게 죄스러워/ 기침을 하면 땅바닥에/ 빨간 피가 번져나가고/ 하늘에게 죄스러워/ 꾸부리고만 사는/ 결핵이란 벌레와 살고 있는 인간아.”(권정생의 시 ‘결핵2’) 결핵은 폐허의 산하에 들러붙어 1960년대에도 창궐했다. 이웃마을 친구 아버지도 결핵에 걸렸다. 초등학생 친구는 학교를 관두고 개구리를 잡으러 다녔다. 여름 내내 들로 산으로 쏘다녔다. 해 질 녘 개구리가 줄줄이 꿰어 있는 철사 줄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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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석유동물 시대의 종말 새해가 밝았다. 사흘째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는 보지 못했다. 추위가 물러가자 어김없이 미세먼지가 해를 가렸다. 기상캐스터는 중국에서 스모그가 유입됐다고 웃으며 말했다. 미세먼지가 해를 가림은 이제 웃어넘길 일이다. 나라마다 찬란한 인공의 빛이 새해를 장식했지만 정작 태양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던 박두진 시인의 ‘해’도 미세먼지에 가렸다. 마을 강가(고양시 공릉천변)를 걷다보면 덤프트럭이 슬금슬금 다가와 흙을 쏟아내고 달아난다. 흙 속은 오물 투성이다. 나만 목격한 것이 아니다. 공릉천에 살고 있는 왜가리와 오리들도 보고 있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사진을 올렸더니 친구들이 신고해서 혼을 내주라 했다. 신고하면 쓰레기가 없어질까. 아마도 쓰레기는 더 으슥한 곳에 더 은밀하게 버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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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새만금 갯벌의 저주 새만금 방조제는 세계 최장을 자랑한다. 무려 33.9㎞에 이른다. 하지만 생각을 뒤집어보면 갯벌과 그 속의 생명을 죽였던 세계에서 가장 긴 ‘학살의 둑’이다. 또 서울시 면적의 3분의 2(여의도의 140배)만큼 국토를 넓혔다고 자랑한다. 이 또한 죽임의 현장이 이리도 넓다는 뜻이다. 그래서 새만금 방조제에 서면 그저 슬프다. 직선으로 뻗은 방조제가 요새처럼 견고해서 더욱 그렇다. 물막이 공사가 한창일 때 새만금 갯벌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먼 남쪽나라에서 날아온 새들이 찰진 갯벌에 주둥이를 박고 날아갈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새들에게 새만금 갯벌은 에너지 공급기지였다. 생명평화순례단원들은 갯벌과 그 속의 생명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은 새들의 울음이 떨어지는 갯벌에서 바다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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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나는 먹방이 슬프다 마을마다 ‘배고픈 다리’가 있었다. 다리 가운데가 파여서 그리 불렸다. 지금은 사라져 지명으로만 남아있지만 옛날에는 흔했다. 허기져서 배가 홀쭉해진 사람에게는 움푹 꺼진 다리조차도 배가 고파 보였을 것이다. 배고픈 사람들이 짐을 지고 배고픈 다리를 건너는 광경은 상상만으로도 아프다. 지금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나온 배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가 허기를 면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조선시대만 해도 두 끼만 먹었다. 점심(點心)은 그야말로 좁쌀 한 움큼이나 미역 몇 조각을 씹어서 ‘마음에 점을 찍었다’고 한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일상이었다. 배 터지게 먹는 것이 소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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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신태인 100년 ‘신태인’ 역사는 역사(驛舍)에서 시작됐다. 호남선이 놓이면서 태인과 가까운 마을에 기차역이 생겨났다. 유서 깊은 태인이 인접해 있어 역 이름을 ‘새로운(新) 태인’이라 지었다. 1914년 1월 호남선이 개통되고 아주 작은 마을 ‘서지말’에 기적이 울렸다. 천둥소리보다 컸다. 철마는 거침없이 달려와 신식 물자를 내려놓았다. 신태인역은 수탈의 거점이었다. 일제는 인근 곡창지대에서는 가장 큰 도정공장을 세웠다. 쌀이 모든 것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신태인으로 향하는 길마다 볏가마를 실은 수레와 마차가 줄을 이었다. 역 구내에 쌓여 기차를 기다리는 쌀가마가 하늘을 가렸다. 쌀이 흔하니 돈도 흔했다. 역 앞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약국 등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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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봄날은 간다 바람이 분다. 나무로부터 사람에게로, 김소월로부터 진달래꽃으로, 사랑으로부터 슬픔에게로 바람이 분다. 우리를 앞질러간 봄은 흰 조팝나무 꽃 속에 숨었다. 봄은 슬프다. 하나의 꽃이 피는 것은 개벽(開闢)이지만 꽃들의 잔치는 혁명이 될 수 없다. 나비 한 마리가 조팝나무 꽃을 뒤져서 겨우 남아있는 한 줌의 봄을 끌어내고 있다. 날개 위에 실린 봄이 위태롭다. 다시 바람이 불고, 나비를 좇던 마음까지 나풀거린다. 그렇다. 우리 사랑 또한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꽃이 진다. 황홀하게 세상을 밝히고 떨어지는 잎 잎 잎……. 어디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우리네 슬픔이 스며있는 작은 못에도 꽃잎이 떨어진다. 분홍빛 작은 파문이 일면 눈물을 다 쏟아버린 슬픔이 희미하게 웃는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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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전라도 놈, 김 과장 정치학자 전인권의 글은 가수 전인권의 노래만큼이나 빼어났다.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글은 다시 읽어도 여운이 짙다. 그가 겪은 얘기 한 토막을 잘라서 옮겨본다. “나는 판매부서에 근무했던 영업사원이었다. 그 당시 광주·전남지역의 영업소장은 전라도 광주사람이었다. 이름은 김영진(가명)씨였고, 직급은 과장이었다. 어느 날 영업회의가 끝난 후 회식을 하는데 옆 부서의 박 부장이 동석했다가 아주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야! 김영진, 전라도를 뚝 떼어다가 대동강 김일성 별장 옆에다 갖다 붙이지그래!’ 나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그때가 85년, ‘광주사태’가 발생한 지 5년이 지난 후니까, 그것이 새삼스럽게 화제가 되리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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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하나의 달이 천 강에 양평 용문산에 큰 눈이 내렸다. 설산은 거대한 침묵이었다. 정월 대보름, 스님들의 동안거(冬安居)가 끝나는 날이었다. 수행을 마친 스님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상원사 용문선원에서 선방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동안거는 음력 10월15일에 시작해서 이듬해 1월15일까지 석 달 동안 이어진다. 화두 하나씩 품고 낙엽을 밟으며 선방에 모여든 선승들. ‘이번 겨울엔 성불하리라.’ 그들의 결기로, 또 눈빛으로 한국불교는 살아있다. 조선불교도 경허 선사의 한 평짜리 방에서 중흥의 기운이 뻗어 나왔다. 경허는 연암산 천장암 구석방에서 눕지 않고 정진했다. 누더기 차림에 미동도 없는 경허를 뱀이 들어와 지켜봤다. 경허의 깨달음은 달빛이며 죽비였다. 선방을 은은히 비추고 수좌들을 벼락처럼 두들겨 깨웠다. 한 평짜리 방이 조선의 선풍을 다시 일으킨 기적의 공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