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주의, 정하룡의 마지막 당부

김택근 언론인·시인

선거판을 지켜보다 비상한 책을 접했다. 동백림 사건의 사형수가 쓴 <정하룡 회고록-나의 20세기>이다. 사적인 회고록이 아니다. 변혁의 시기마다 느꼈던 사색의 산물이며 근현대사에 대한 관조이다. 밑줄을 치면서 다시 읽었다. 통일의 꿈이 멀어지고, 민생이 피폐해지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는 시점이라 그랬을까. 모진 풍파를 겪었지만 논리가 가지런하고 가식 없는 문장은 고졸하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에 희생된 수백만 인간의 피와 한숨으로 얼룩진’ 20세기를 살아냈다. 평생 두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 융단폭격을 당한 평양의 끝없는 폐허 속에서 전봇대 하나만 서 있는 풍경과 한 마을 사람끼리 서로를 죽인 시신이 수없이 뒤엉켜 있는 현장이다. 선생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입고 ‘절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을 찾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북한의 실상을 제대로 살펴 통일의 묘안을 찾아보려 평양을 방문했다.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와 돌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되었다.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박정희 정권은 개헌 의석을 확보하려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이를 덮기 위해 건국 이래 최대의 간첩단 사건을 기획했다. 박정희 지시로 제작한 사기극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에 거주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이 무더기로 잡혀왔다. 화가 이응노,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을 엮어서 ‘북괴의 문화계 침투’라는 삽화도 집어넣었다. 1967년 한국을 뒤흔든 동백림 사건은 그렇게 고문과 회유로 완성됐다.

학자 정하룡은 장 폴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을 좇는 지식인에서 생각이 붉은 사회의 이물(異物)로 추락을 했다. 그리고 그가 추앙했던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프랑수아 모리아크 등 당대 세계적 지성들의 구명운동에 힘입어서 풀려났다. 선생은 학자의 꿈을 접고 항공사에 취업하여 국제무대를 누볐다. 박정희가 밀어붙인 ‘경제개발’에 앞장섰다. 프랑스 정부가 주는 훈장도 받았다. 사회적인 지위가 안정되자 젊은 날의 자신에게 미안했다. 갈고닦은 통일관과 중도주의에 어긋나는 삶이기에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그가 설파하는 중도주의가 압권이다, 책의 백미이다. “중도주의는 그저 중간지점만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 옳고 유리한 쪽을 택하는 ‘자주’입니다. 좌·우 어느 한쪽에 항시적으로 치우치는 것은 사대주의이며 ‘예속’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현대사는 ‘나는 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이 지배했다. 중간지대가 없었다. 증오감, 복수심을 부추기면 언제라도 유혈참극이 벌어졌다. 가학과 피학의 톱니바퀴가 서로 물리면서 복수극을 되풀이했다. 한반도에서 자행된 대학살, 그 피의 진실을 밝혀내야 했건만 가학의 기억은 국가가 개입하여 이데올로기로 덮어왔다. 선생은 이를 ‘망각의 죄’라 했다. 선생은 ‘개혁은 산문이고, 혁명은 시’라고 했다. 우리 근현대사는 민중이 공명(共鳴)하는 시를 쓰지 못했다. 그래서 4·19와 5·16이 혁명일 수 없다. 혁명이란 민중이 부수고 없앤 그 자리에 새것을 세워야 하지만 4·19는 새것을 세울 중심세력이 없었고, 5·16은 민중의 참여가 없었다는 것이다. 아직도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극단주의를 청산하지 못하고 있음이 아프다. 야만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10일, 총선 투표를 하는 날이다. 선생은 우리 정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치졸하고 격렬하고 지리멸렬한 비난과 협박의 연속”이라며 질타했다. 치졸하고 지리멸렬한 이번 총선을 미리 본 것 같다. 사실 이런 극단주의와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혐오의 정치는 오래된 것이며 그래서 보지 않아도 보인다. “정치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예술입니다. 두 극단을 완화할 수 있는 길이 중도주의입니다. (…) 이런 식의 진영 상황은 정책의 불모지를 만듭니다. 정치 혐오가 만연합니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나쁜 역사’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중간지대라는 ‘중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20세기를 건너와 91세, 망백(望百)에 곧 떠나갈 조국을 바라보고 있다. 부인을 먼저 보내고 홀로 고창에서 지난 세월을 복기하고 있다. 자신은 이미 역사라는 바둑판에 사석(捨石)이 되었다. 마지막 희망은 한반도를 경영할 미래 세대가 그 사석을 활용하여 ‘민족 대통합’이라는 대마를 낚아주는 것이다. 정치 실종의 시대, 오늘 선택을 받은 선량들은 극단의 나쁜 정치를 청산할 수 있을까. 투표하는 날, 중도주의를 생각한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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