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언론인·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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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성공한 대통령이 있었다 2008년 10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대검찰청 국정감사장에서 김대중 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100억원짜리 양도성예금증서(CD) 사본을 흔들며 김대중 비자금의 일부로 추정된다고 수사를 촉구했다. 퇴임 대통령 김대중은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나라당 검사 출신 국회의원이 내가 100억원의 CD를 가지고 있다는 설이 있다고. 간교하게도 ‘설’이라 하고 원내 발언으로 법적 처벌을 모면하면서 명예훼손의 목적을 달성코자 하고 있다. 나는 그동안 사상적 극우세력과 지역적 편향을 가진 자들에 의해서 엄청난 음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는다. 하느님이 계시고 나를 지지하는 많은 국민이 있다. 그리고 당대에 오해하는 사람들도 내 사후에는 역사 속에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2008년 10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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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완패했다, 0.73% 차이로 2017년 5월 ‘장미 대선’에 이어 이번에는 ‘매화 대선’을 치렀다. 꽃 이름을 붙이니 몇 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마도 이런 선거판에 무슨 매화타령이냐고 눈을 흘길 것이다. 승패가 나뉜 지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선거판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에게는 봄밤이 아플 것이다. 갓 피어난 꽃들도 우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접선거는 줄곧 겨울에 치러졌다. 그 무도하고 잔인했던 권력다툼을 기억한다. 혹자는 이번 대선이 가장 혼탁했다고 혀를 차지만 지난 겨울선거에 비길 바가 아니다. 선거판에 오물이 가장 많이 묻었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최악은 아니라는 말이다. 양김 대결이 펼쳐진 1992년 대선은 음습하고 참혹했다. 여당 후보 김영삼은 민주화 동지인 김대중을 사상이 불순하다고 몰아세웠다. 언론은 지역감정을 자극해서 전라도를 고립시켰다. 김대중은 다시 빨갱이, 과격분자가 되어야 했다. 그렇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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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종교계의 위없는 실세들 종교인들이 대통령선거판을 휘젓고 있다. 세속으로 내려와 특정 진영과 거래를 하고 있다. 이러다가는 교회와 사찰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수도 있겠다. 종교와 권력이 우리네 상식이 설정한 거리 두기를 무시하고 종권(宗權)유착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여당 대선 후보가 며칠 전 서울 봉은사를 찾아가 불교계의 실세로 알려진 자승 스님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권력이 불교계에 쥐여준 것들을 서로가 확인하고 조계종은 반정부 집회를 철회했다. 사찰문화재 관람료를 둘러싼 ‘봉이 김선달 발언’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그 크기는 알 수 없다. 단지 속세의 셈법에 따른 주고받기식의 타협은 종교의 시간과 영역이 아니다. 비공개 만남을 공개함으로 자승 스님이 조계종 최대 실세임을 만방에 알렸다. 이로써 조계종과 총무원장의 위상이 왜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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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울지 않을게요, 아버지 정동길이 끝나는, 큰길 건너 언덕에 일식집 ‘다미락’이 있었다. 사장은 고씨였다. 경상도 사투리를 원단 그대로 구사했다. 그는 양복을 즐겨 입었고 옷매무새가 야무졌다. 성격도 까칠해서 사투리만 빼면 차가운 도시의 아저씨였다. 점심에는 대구탕, 알탕, 해물뚝배기가 인기 메뉴였다. 국물이 시원해서 속을 풀기에 그만이었다. 자연 단골이 되었고, 나이가 많았지만 그와 술친구, 말동무가 되었다. 고 사장은 취기가 오르면 곧잘 화려한 과거를 풀어놓았다. 탄광사업을 할 때가 그의 전성시대였다. 연탄이 모든 아궁이를 차지하던 시절, 탄맥을 찾아내 떼돈을 벌었다. 현금을 자루에 담아 운반했다. 생활비를 받아든 아내는 손을 떨었다. 집 사고 외제차 굴리고 아이들을 사립유치원에 보냈다. 식구 생일에는 워커힐식당에서 디너쇼를 보며 스테이크를 잘랐다. 무서울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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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언론 대통령’을 뽑자, 우리 손으로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언론개혁은 물 건너간 것 같다. 언론중재법을 놓고 벌인 기이한 논쟁에 정작 중요한 개혁과제들은 실종되었고 대통령선거판이 벌어지자 정치권은 오히려 언론의 눈치를 보고 있다. 언론개혁에 관한 개인적인 바람이 하나 있었다. 공영방송이 진정한 공영방송으로 태어나는 것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촛불정권은 방송에서 권력의 그물을 걷어내지 않았다. 권·언 유착의 유혹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음이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고 곧바로 방송 장악에 나섰을 때 언론노동자들의 정권과의 투쟁을 기억한다. 시퍼런 권력은 핏발 선 눈으로 방송을 노려봤고, 노동자들은 뭉쳐서 거세게 저항했다. 이렇듯 거대한 연대투쟁은 한국 방송사에 없었다. 당시 나는 문화방송(MBC) 시청자위원이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시청자 의견서에 의견 대신 격문을 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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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위험한 홍준표, 위험한 언론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홍준표 의원이 TV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94년도에 클린턴이 영변에 북폭(北爆)을 하려고 했을 때 YS(김영삼 대통령)가 막았다. 안 막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북핵이 발전됐겠나? 북핵을 만들지 못했겠지. 그만큼 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결심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다시 김영삼을 소환했다. “클린턴 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을 하려고 했을 때 YS는 이를 극력 저지하고 KEDO(북한의 경수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로 돌파하려 했으나 그건 오판이었다. 그때 영변 핵시설 북폭이 있었다면 북한은 핵개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대통령의 결단을 들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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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 1990년 새해 3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일거에 뒤집었다.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한 공룡정당은 무엇이든 삼켰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지방자치법을 무력화시키며 지방선거를 연기하려 했다. 야당 총재 김대중은 평생의 바람인 지방자치제가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단식투쟁을 벌였다. 여당 대표로 변신한 김영삼이 단식현장을 찾아왔다. “비록 여당에 가담했지만 민주주의를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오. 후광(김대중의 호), 나를 너무 욕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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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저 썩은 강을 다음 정권에 넘기지 마라 캐나다 서부 지역의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았다.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고, 산불이 수백 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에어컨이 필요 없었던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기상지식이 얕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지성 폭염이 이글거렸다면 바람에 실려온 열파(熱波)가 아닐 것이다. 게릴라성 폭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하늘에서 수만 갈래의 번개가 치고 화염이 주택을 삼키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종말론이 어른거린다. 가본 적이 없지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작은 마을 리턴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이는 불벼락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기후 재앙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인간들이 불러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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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백신을 맞았다 인도 바라나시는 죽어서 또는 죽기 위해서 찾아가는 곳이다. 순례자들도 이곳에서는 자신이 끌고 온 삶을 펼쳐들고 기도를 올린다. 4년 전 가을에 찾아간 바라나시는 더럽고 시끄러웠다. 낡은 도시에는 헐벗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났고 소나 염소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럼에도 영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갠지스강 때문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갠지스 강물을 마시고 꽃을 피웠다. 어림 2000년 동안 강물은 사람들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새벽 갠지스강은 안개가 자욱했다. 일행을 태운 보트가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안개 속에도 화장터 불빛이 보였다. 시신을 태우는 장작불이 강가의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일생이 한 줌 재로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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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1년과 정권 재창출 국민의정부는 역대 최약체였다.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꾸렸고 의회권력은 여소야대였다. 그럼에도 대통령 김대중은 뛰어난 개인기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금융·기업·공공·노사 등 4대 부문 개혁, 한류를 불러온 대중문화 개방, 정보기술(IT) 강국 건설, 전자정부 완성, 국민연금 등 4대보험 실시, 의약분업 실현, 4대강국과 선린의 외교망 구축, 국가인권위원회·여성부 출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그럼에도 업적 중에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정권 재창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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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미나리와 애틀랜타 누님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이야기다. 일가족이 트레일러하우스(이동식 주택)로 이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지만 나는 우리 누님과 매형이 생각나서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떠났지만 꿈이 조금씩 작아져 결국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는 내내 쓸쓸했다. 1975년 초겨울, 누님은 매형을 따라 영화 속 부부보다 일찍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조지아주 애틀랜타였다. 누님은 ‘춥고 슬픈 날’로 기억한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 미국은 이름대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미제(美製)는 단연 향기로웠다. 누님은 갓 돌이 지난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은 늘 눈물에 젖어있었고,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은 ‘공항의 이별’ 노랫말처럼 이 땅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고, 끝내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하늘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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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폭력을 폭로함은 정의로운 복수이다 권력이 불순하고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면 폭력이 기승을 부린다. 우리 근현대사는 100년도 넘게 폭력이 지배했다. 일제강점기는 ‘헌병국가’였다. 백성들은 거대한 폭력에 무방비로 당했다. 1904년 대한제국을 찾은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일본인에게 두들겨 맞는 한국인들을 목격했다. 난쟁이처럼 작은 일본인이 회초리를 쥐고 한국인들을 쫓아다니며 때렸다. 이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부산역의 이 북새통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그 무리들 중에서 제일 왜소한 일본인이 키 크고 떡 벌어진 한 코레아 사람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면서 발로 차고 때리다가 내동댕이 치자, 곤두박질을 당한 그 큰 덩치의 코레아 사람이 땅에 누워 몰매 맞은 어린애처럼 징징 우는 모습이었다.”(<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