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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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위험한 홍준표, 위험한 언론 국민의힘 대선 경선 후보 홍준표 의원이 TV토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94년도에 클린턴이 영변에 북폭(北爆)을 하려고 했을 때 YS(김영삼 대통령)가 막았다. 안 막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북핵이 발전됐겠나? 북핵을 만들지 못했겠지. 그만큼 대통령 자리는 순간적 결심이 나라의 미래를 좌우한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다시 김영삼을 소환했다. “클린턴 정부가 영변 핵시설 폭격을 하려고 했을 때 YS는 이를 극력 저지하고 KEDO(북한의 경수로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국제 컨소시엄)로 돌파하려 했으나 그건 오판이었다. 그때 영변 핵시설 북폭이 있었다면 북한은 핵개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면서 다시 대통령의 결단을 들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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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좋은 정치인은 갑자기 솟아날 수 없다 1990년 새해 3당(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하여 민주자유당이 출범했다. 여소야대 정국을 일거에 뒤집었다. 299석 중 221석을 차지한 공룡정당은 무엇이든 삼켰다. 여야 합의로 통과된 지방자치법을 무력화시키며 지방선거를 연기하려 했다. 야당 총재 김대중은 평생의 바람인 지방자치제가 폐기될 위기에 처하자 단식투쟁을 벌였다. 여당 대표로 변신한 김영삼이 단식현장을 찾아왔다. “비록 여당에 가담했지만 민주주의를 잊은 적이 없는 사람이오. 후광(김대중의 호), 나를 너무 욕하지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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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저 썩은 강을 다음 정권에 넘기지 마라 캐나다 서부 지역의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았다.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떨어졌고, 산불이 수백 건이나 발생했다고 한다. 에어컨이 필요 없었던 마을이 잿더미로 변했다고 한다. 기상지식이 얕아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국지성 폭염이 이글거렸다면 바람에 실려온 열파(熱波)가 아닐 것이다. 게릴라성 폭우처럼 하늘에서 떨어졌을 것이다. 하늘에서 수만 갈래의 번개가 치고 화염이 주택을 삼키는 광경을 상상해보라. 종말론이 어른거린다. 가본 적이 없지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작은 마을 리턴은 그렇게 사라져버렸다. 이는 불벼락과 다름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기후 재앙은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인간들이 불러온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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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백신을 맞았다 인도 바라나시는 죽어서 또는 죽기 위해서 찾아가는 곳이다. 순례자들도 이곳에서는 자신이 끌고 온 삶을 펼쳐들고 기도를 올린다. 4년 전 가을에 찾아간 바라나시는 더럽고 시끄러웠다. 낡은 도시에는 헐벗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넘쳐났고 소나 염소 같은 동물들이 어슬렁거렸다. 그럼에도 영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갠지스강 때문이었다. 오랜 옛날부터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가 갠지스 강물을 마시고 꽃을 피웠다. 어림 2000년 동안 강물은 사람들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새벽 갠지스강은 안개가 자욱했다. 일행을 태운 보트가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안개 속에도 화장터 불빛이 보였다. 시신을 태우는 장작불이 강가의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누군가의 일생이 한 줌 재로 강물에 떠내려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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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김대중 정부의 마지막 1년과 정권 재창출 국민의정부는 역대 최약체였다.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꾸렸고 의회권력은 여소야대였다. 그럼에도 대통령 김대중은 뛰어난 개인기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과 6·15공동선언, 금융·기업·공공·노사 등 4대 부문 개혁, 한류를 불러온 대중문화 개방, 정보기술(IT) 강국 건설, 전자정부 완성, 국민연금 등 4대보험 실시, 의약분업 실현, 4대강국과 선린의 외교망 구축, 국가인권위원회·여성부 출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그럼에도 업적 중에 간과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정권 재창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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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미나리와 애틀랜타 누님 영화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의 이야기다. 일가족이 트레일러하우스(이동식 주택)로 이사하며 영화는 시작된다. 많은 이들이 영화의 작품성을 논하지만 나는 우리 누님과 매형이 생각나서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떠났지만 꿈이 조금씩 작아져 결국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보는 내내 쓸쓸했다. 1975년 초겨울, 누님은 매형을 따라 영화 속 부부보다 일찍 미국으로 떠났다. 당시에는 생소했던 조지아주 애틀랜타였다. 누님은 ‘춥고 슬픈 날’로 기억한다. 한국은 가난한 나라, 미국은 이름대로 아름다운 나라였다. 미제(美製)는 단연 향기로웠다. 누님은 갓 돌이 지난 아기를 친정어머니에게 맡겼다. 당시 김포국제공항은 늘 눈물에 젖어있었고, 이민을 떠나는 젊은이들은 ‘공항의 이별’ 노랫말처럼 이 땅에 하고 싶은 말을 못하고 떠났다. 언제 돌아올지 몰랐다. 입술을 깨물고, 주먹을 쥐고, 끝내 돌아서서 눈물을 훔쳤다. 그렇게 하늘 멀리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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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폭력을 폭로함은 정의로운 복수이다 권력이 불순하고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면 폭력이 기승을 부린다. 우리 근현대사는 100년도 넘게 폭력이 지배했다. 일제강점기는 ‘헌병국가’였다. 백성들은 거대한 폭력에 무방비로 당했다. 1904년 대한제국을 찾은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는 부산항에 내리자마자 일본인에게 두들겨 맞는 한국인들을 목격했다. 난쟁이처럼 작은 일본인이 회초리를 쥐고 한국인들을 쫓아다니며 때렸다. 이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부산역의 이 북새통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그 무리들 중에서 제일 왜소한 일본인이 키 크고 떡 벌어진 한 코레아 사람의 멱살을 거머쥐고 흔들면서 발로 차고 때리다가 내동댕이 치자, 곤두박질을 당한 그 큰 덩치의 코레아 사람이 땅에 누워 몰매 맞은 어린애처럼 징징 우는 모습이었다.”(<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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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백기완 선생께서 묻고 있다 하늘이 큰일을 맡길 때에는 그 몸을 수고롭게 하거늘 필시 천명(天命)을 받음일 것이다. 붓을 들면 비와 바람이 숨을 죽였지만 길 위에 서야 했다. 길에서는 묘수와 재주가 통하지 않는다. 높고 낮음이 없다. 백기완 선생. 그는 평생을 세상의 가장 아픈 곳에, 서러운 곳에 있었다. 고문을 당해 육신이 으스러졌어도 포효했다. 시위 현장마다 선생의 백발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우리 시대 아주 익숙한 삽화였다. 많은 이들이 영웅적 서사로 선생의 투쟁을 감싸지만 거리의 투사는 지독하게 고독했을 것이다. 용기만이 공포와 유혹을 떨쳐낼 수 있지만 무작정 저항하는 맨 용기였다면 한시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스스로에게 비겁하지 않아야 했다. 날마다 자신의 둥지를 부수고 퇴로를 끊었다. 선생은 스스로를 다스렸기에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았다. 비로소 벼랑 끝에서 손을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불의에 맞서는 ‘장산곶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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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용균이 어머니, 우리는 작은 사람이 아닙니다 국회에서 단식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시간이 무심히 흘러 의로운 싸움이 태연히 과거가 되어가고 있음이 무섭다. 문득 김용균의 어머니 김미숙씨와 강은미 정의당 원내대표의 안부가 궁금하다. 단식의 후유증은 없는지, 마음은 잘 추스르고 있는지. 분노와 슬픔은 다스릴 수 있겠지만 무력감은 참으로 삭이기 어려울 것이다. 사람을 살리자는 중대재해처벌법에 우리 시대 비참한 죽음이 그대로 들어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 사람의 벽은 해머로도 깨뜨릴 수 없었다. 결국 정치인들은 가진 자들의 편이었다. 하청 노동자의 죽음은 오로지 개인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누더기 법안은 통과되었고, 현장을 지켜보던 기자들도 노트북을 닫았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나처럼 울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변한 것은 없었다. 거대 정당에는 정의가 없었고, 의원들에게는 가슴이 없었다. 어머니는 끝내 탄식을 쏟아냈다. “국회가 사람 목숨을 놓고 정치놀음을 하다가 보여주기식 법안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김용균의 하늘을, 정의당은 법안을 처음 발의한 노회찬의 하늘을 차마 쳐다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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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요새로 올라간 문재인 정권 마을 주민이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 고령의 중환자였다. 확진 판정을 받고도 병실이 없어 집에 머물렀다. 6일 동안 갇혀 있다가 머나먼 대전의 한 병원으로 실려갔다. 구멍 난 방역망에 낙담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찾아온 구급차가 오래된 약속처럼 따뜻했다. 마을을 짓누르고 있던 공포도 구급차가 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분노가 치솟는다. 역병이 창궐하는데 정치는 무얼 하는가. 온통 ‘윤석열 굿판’이다. 아수라의 정치판이다. 검찰개혁은 우리 시대의 급하고도 간절한 과제이다. 검찰이 우리 현대사, 특히 민주화 여정에 끼친 해악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진다. 그렇기에 개혁에 미온적인 윤석열 검찰총장이 무소불위의 검찰권을 유지하려는 파쇼세력의 수괴처럼 보일 만했다. 여권에서는 추미애 장관이 퇴마사(退魔師)가 되어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추미애도 윤석열을 찍어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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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서해 끝에 격렬비열도가 있다 주꾸미를 끌어올리면 고려청자가 딸려 나오는 태안 앞바다, 그곳에서 뱃길로 백리 남짓에 격렬비열도가 있다. 서쪽바다 끝 섬이다. 가거도보다 중국에 더 가깝다. 아득한 옛날에는 중국 산둥반도의 닭 울음소리가 이곳까지 건너왔다고 한다. 격렬하거나 비열한 섬이 아니다. 북, 동, 서쪽의 3개 섬과 이에 딸린 9개의 작은 섬들이 늘어서있는 열도(列島)이다. 그래서 격렬비열도(格列飛列島)는 이름처럼 ‘새들이 줄지어 날아갈 듯 떠있는 섬’이다. 선박 접안시설이 없어서 바다에 일체의 노기(怒氣)가 없어야만 섬에 갈 수 있다. 다행히 바다가 바람을 재워서 섬을 연모하는 사람들과 함께 북격렬비열도에 오를 수 있었다. 이곳에는 등대가 있다. 가을은 물에 젖지 않고 건너와 11월의 무인도는 군데군데 초록이 지워져 있었다. 그럼에도 청갓과 유채가 지천으로 깔려 있고 우거진 동백, 사철, 산뽕나무가 아직 씩씩했다. “다양한 난대식물, 수백 그루의 동백나무, 무리지어 사는 괭이갈매기, 박새, 매, 가마우지 외에도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동식물Ⅱ급인 ‘장수삿갓조개’를 비롯해 희귀종과 한국 미기록종이 다수 서식하고 있다.”(김정섭 <격렬비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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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택근의 묵언 청와대에 누가 있어 도서정가제를 흔드나 1945년 가을, 33세 정진숙(1912~2008, 을유문화사 창립자)은 출판업을 해보자는 주위의 권유를 받고 고민에 빠졌다. 이때 집안 어른인 정인보 선생(1892~1950)이 조언을 했다. “36년 동안 일본놈들에게 빼앗겼던 우리 조선의 문화유산, 언어, 문자, 이름까지 되찾으려면 36년이 다시 걸리네. 우리말, 우리글, 우리 민족의 혼을 되살리는 유일한 문화적인 사업이 출판인데 왜 망설이고 있는가.” 이후 정진숙은 출판 외길을 걸었다. 해방이 되었지만 우리글로 쓰인 책이 없었다. 우리말을 제대로 구사하는 작가도 없었다. 어쩌다가 입수한 원고는 문맥이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 출판사 편집자들은 우리말을 찾아내어 글에 맥(脈)이 흐르도록 바로잡았다. 그들이 갈고닦아 놓은 언어가 존재한 덕분에 저자들은 비로소 집필을 할 수 있었다. 출판은 이렇듯 잃어버린 우리 것을 찾아내는 숭고한 사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