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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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기후위기는 피할 수 없다 지난 7월 빌 맥과이어의 저서 <찜통 지구(Hothouse Earth)>가 출간되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알리고 시급한 행동을 촉구하는 책은 지금까지 많았지만, 이 책이 주는 울림은 새롭다. 용감하게도, 지금까지 금과옥조처럼 여겨져 온 “평균 기온 1.5도 상승 예방”이라는 목표가 이미 실패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2040년 즈음에는 2도 상승까지 벌어질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인 맥과이어는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영국의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명예교수로서, 화산 연구를 중심으로 지질학과 지구의 기후위기 전반을 연구한 권위자이며 IPCC(정부 간 기후문제 자문기구)의 보고서의 최종 요약본 집필에도 참여했던 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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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인플레이션, 임금인가 이윤인가 인플레이션이 걱정거리로 부상하자 아니나 다를까 임금 인상 자제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여러 경제신문에서 학자, 언론인 가릴 것 없이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으며, 심지어 추경호 경제부총리 또한 한 달 전 그러한 발언을 하였다. 일반인들 중에도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시장조사기관인 IPSOS는 지난 6월 주요 산업국가들의 국민을 대상으로 임금 인상 요구가 물가 상승을 초래한다고 믿는 이들의 비율을 조사하여 순위를 발표하였거니와, 여기에서 한국은 67%의 숫자를 기록하여 인도(70%), 남아프리카공화국(70%)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였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이 수치는 전 세계 평균인 45%보다 훨씬 높은 수치이며, 잘 발달된 자본주의 선진국이라 할 일본(25%), 독일(33%), 프랑스(37%) 등은 그 평균보다 한참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인플레이션 악화의 주범은 임금 인상”이라는 생각은 당연한 상식이 아니며, “글로벌 스탠더드”는 더더욱 아니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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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코비드플레이션, 지구적 시스템의 혼돈 얼마 전 어느 작은 식당 주인의 푸념을 들었다. 코로나19 사태가 겨우 진정되는 기미를 보이면서 희망을 가지려고 했더니 이번에는 물가 상승이라는 새로운 사태가 펼쳐진다고. 코로나19는 본인의 각고의 노력과 혁신, 악착같은 위생조치 등이라도 발동하여 대응할 수 있었지만 물가상승 같은 사태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거의 포기 상태인 그분의 축 처진 어깨에서 우리 모두가 느끼는 마음을 읽었다. 코로나19가 끝나면 2019년의 세상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이제는 해도에도 나오지 않는 바다로 배가 나가는 느낌이다. 이 무력감을 어떻게 할 것인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짚어볼 수도 없는 깊은 변화가 오고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이럴 때 ‘이것이 해결책이다’라고 외치는 약장수, 부적장수에게 속지 않고 또 ‘모두 다 망했다’라는 비관론에 속지 않는 방법은, 벌어지는 일을 찬찬히 지켜보면서 정리할 수 있는 생각의 틀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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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2022년 5월16일 지방선거는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아직도 생각의 갈래를 잡지 못하는 유권자가 많다. 또 지지 정당이 있는 유권자 중에서도 확신이 없는 이들이 많다. 그 중요한 원인 하나는, ‘도대체 이번 선거의 시대적 맥락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갈피를 잡기 힘들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시대정신이라고까지 할 것은 없어도, 우리들의 정치적 선택은 항상 지금 우리 사회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래서 지금 어떤 나라가 필요한지의 맥락과 흐름에 대한 나름의 진단과 견해에 기반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특히 이번 대통령선거를 전후하여 펼쳐지고 있는 상황은 지도에도 해도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전인미답의 것인지라 많은 이들이 이러한 방향감각을 잃고 당혹해 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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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정당 없는 민주주의를 꿈꾸자 대통령선거가 끝났다. 아무리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꼭 있는 정당들 중 하나를 고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로 괴로워한 이들이 많을 줄 안다. 아니다. 민주주의는 반드시 정당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학 박사입네 교수입네 하는 이들이 뭐라고 하든, 정당과 민주주의는 개념적으로 별개의 문제이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가능하고, 또 지금 절실히 필요하며, 지금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죽음에 이른 대의제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절실히 필요한 문제이다. 1. 생시몽 “옛날 정치는 끝났다” 현대 정치학의 아버지가 마키아벨리라는 말은 크게 틀린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산업혁명과 거기에서 나온 산업사회를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00년 동안의 산업사회 정치학을 주의 깊게 지켜본 이들은 사실상 현재 그리고 미래의 정치학의 아버지는 앙리 드 생시몽이라고 말한다. 그의 방대한 사상 가운데 정치와 관련된 논지는 이러하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생산자 계급과 지배 계급이 철저히 나뉘어 있었다. 농사짓고 소 기르고 물고기 잡는 평민들과, 술 먹으며 시나 짓고 혹은 사냥이나 다니는 지배 계급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때의 정치는 사실 그 불한당 지배 계급끼리 누가 정치 권력을 먹느냐라는 싸움이었다. 왕이니 뭐니 있지만, 사실은 그 뒤에 도사린 집단 어디가 먹느냐의 싸움이 정치였다. 이를 생시몽은 ‘권력 정치’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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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우크라이나 친구의 이야기 지난주에 잘 아는 우크라이나 친구와 통화를 했다. 국제정치학과 역사사회학을 공부하여 스위스와 프랑스를 오가며 연구자의 길을 가는 이이다. 이 지면에는 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고자 한다. 이 전쟁에 대해 국제정치학과 지정학, 그리고 추상적 도덕 및 규범과 평화라는 관점의 이야기들은 사방에 넘쳐나지만, 막상 우크라이나인 본인들의 마음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별로 없는 것 같아서이다. 우리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리의 복잡한 운명과 상황을 모두 뼈저리게 알고 있다. 몽골, 폴란드, 오스트리아, 소련의 지배를 받으면서 누적된 말로 다 못할 처절한 역사, 가장 비옥한 토지와 엄청난 부존 자원을 가진 지리적 조건, 서방과 러시아와 아시아 사이에 끼인 지정학적 상황, 미묘하게 얽힌 경제와 교역의 조건 등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바보가 아니다. 러시아나 서방이나 어느 한쪽에 그냥 기대는 식으로는 우리의 생존과 미래를 보장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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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나라 곳간’은 없다, 집단 책임이 있을 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여야 후보 모두 대규모 재정 지출을 가져오는 공약들을 내놓고 있다. 이에 대해 한쪽에서는 나라 살림 거덜내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으며, 다른 쪽에서는 무작정 자신들이 주장하는 의제를 내걸면서 국가 재정 지원을 요구하는 이들이 쏟아진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나라 곳간’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지겹게 되풀이된다. 이를 멈추기 위해 몇 가지 사항을 분명히 해두어야 하겠다. 첫째, ‘나라 곳간’이란 없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열었던 영국의 마거릿 대처가 경제 정책에 남겨놓은 최악의 유산은 ‘나라 살림이나 집안 살림이나 똑같아서 수지 균형이 최고’라는 잘못된 생각을 마치 경제 법칙처럼 통용되게 만든 것이다. 이는 보통 사람들의 소박한 상식을 고의적으로 이용하는(혹은 악용하는) 역사상 최고의(혹은 최악의) 정치적 수사학일 뿐이며, 국가 재정이라는 것이 곧 왕실 재정을 뜻하는 전근대 사회에서만 통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17세기 이후의 근대 금융 재정 시스템의 진화 과정에 대해 아니면 현행 금융 통화 제도에 대해 최소한의 이해라도 가지고 있는 이라면 국가의 재정은 중앙은행을 매개로 나라 전체의 통화 및 금융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인프라’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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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고성능 민주주의를 향하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나누어 각자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삼권분립은 지금도 민주주의 정치를 떠받치는 기둥이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아니 될 금과옥조로 여겨진다. 하지만 2020년대의 오늘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산업사회의 현실을 무시하고 그 발전과 효율성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비판이 터져 나오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이 삼권분립으로 갈라진 정부 그리고 그 틀을 이용하여 똬리 틀고 앉은 정당정치라는 것에 분노와 공격이 모아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몇 달 앞두고 좌절과 한탄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이제 삼권분립이라는 것이 과연 현대사회 나아가 미래사회에 유지될 수 있는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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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주 4일제와 정규직 중심주의 일부 대선 주자들이 북유럽 여러 나라에서 검토되고 있는 ‘주 4일제’를 공약으로 언급하고 있다. 노동과 일상의 균형을 회복하여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의 속도를 늦추어 탄소위기 대응으로도 큰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의 사회와 경제에서 작업장, 그것도 제대로 규제되고 있는 정규적 작업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를 도외시한 무리한 주장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진보’ 진영에 깊숙이 뿌리박은 정규직 중심주의가 표출된 극적인 예라고 생각된다. 이는 당연히 임금 삭감 없이 노동일만 줄어드는 조치를 뜻할 터이니, 이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은 급격한 실질임금 상승을 얻을 뿐만 아니라 여가 시간의 증가로 인해 ‘워라밸’ 개선 등 화폐로 계산되지 않는 다양한 실질적 소득 상승의 효과를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주 52시간 노동도, 최저임금도, 심지어 작업장 안전조차 일률적으로 감시와 규제가 이루어지지 않는 작업장이 허다한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이러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게는 그 혜택이 제대로 갈 리가 없다. 뿐만 아니라 각종 불안정 노동자, 프리랜서, 영세 자영업자 등에게는 완전히 무의미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삶의 불편과 상대적 박탈감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결국 은행, 관공서, 공기업, 대기업, 대학과 학교 등 정규적 작업장의 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이 돌아가겠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게는 돌아가는 혜택이 극히 불균등하거나 전혀 없거나 오히려 ‘벼락거지’가 되는 허탈함만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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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빈의 두 번째 의견 왜 지금 ‘두 번째 의견’이 필요한가 배가 좀 아파 병원에 갔다가 이리저리 검사를 받았더니 6개월 후 죽을 것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송곳니 쪽이 좀 거북하여 치과에 갔다가 입안을 사진과 거울로 몇 번 털리고 났더니 무려 600만원의 견적이 나왔다. 사무실의 가벽을 헐어 공간을 넓히려고 아는 분의 소개로 업체를 불렀더니 예상 액수의 세 배를 부른다. 무시할 수 있는 이야기들도 아니지만 그대로 따르자니 황당하다. 이럴 때 우리는 다른 병원 다른 의사를 찾아 검진을 받으며, 다른 치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며, 다른 업체를 불러 견적을 내어 본다. 이를 ‘두 번째 의견’이라고 한다. ‘두 번째 의견’을 찾게 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들고 갖은 어려움을 꾹 참아가며 그들이 내놓는 처방을 충실히 실천하였건만 장구한 시간이 지나도록 차도가 없는 경우이다. 이 경우에는 오히려 그러한 기존의 처방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악순환 고리의 하나가 되었을 가능성까지 있다. 따라서 시급하게 ‘두 번째 의견’을 구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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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플랫폼 자본주의’는 권력의 문제 비단 중국만이 아니다. 미국과 유럽 어디라 할 것 없이 주요 산업국들에서는 초거대 플랫폼 기업들에 대한 강력한 규제와 개입을 국가 정책으로 시행하려 하고 있다. 한때 ‘혁신’과 ‘미래’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심지어는 ‘공유’라는 어림도 없는 명분까지) 둘러쓰고서 사회 전체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듯싶었던 플랫폼 기업들이었다. 그래서 ‘공장식 축산으로 유니콘을 키워내자’가 국가의 산업 정책으로 떡하니 올라오기도 하는 등 바야흐로 자본주의의 미래는 플랫폼 자본주의인 듯 보였다. 그런데 20년도 채 지나기 전에 지금 전 지구적인 분위기의 대반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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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공정보다 평등이 필요하다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취임을 계기로, 이른바 ‘공정’에 대한 논쟁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사회가 워낙 팍팍하다 보니 이 논쟁도 아주 격한 목소리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특히 반론을 제기하는 측은 현실의 사회적 조건으로 인해 사람마다 제각각 ‘출발점’이 다르고 그래서 달리기 시합의 규칙만 엄정하게 지킨다고 공정이 담보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출발점’도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달리기 트랙도 땅을 고르게 해야 한다고도 주장한다. 공정이 중요한 가치임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공정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는 다른 것이며, 지금 전 세계적으로 화급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전자가 아니라 후자라는 사실이 쉽게 망각되고 있는 것 같다. 여기에서 잠깐 이 ‘산업사회에서의 (불)평등’의 문제를 가장 오랫동안 집요하게 해결하려 했던 민주적 사회주의 사상사의 곡절을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