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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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감정적 투표’는 정권을 부패시킨다 우리나라가 진짜 민주공화국인지 그리고 민주공화국으로 남을 것인지를 결정하는 투표일이 다가왔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1조에 명시된 이 문장은 정권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정치인들의 입에 자주 오른다. 이 말을 빈번히 사용하면 할수록 입에 발린 상투어가 되는 역설은 모호한 상징성 때문이다. 이 말이 구체적인 현실에서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직 ‘투표’뿐이다.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혁명과 쿠데타가 원천적으로 배제된 민주 사회에서 정권을 갈아치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투표이다. 현대적 혁명은 오직 투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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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탄핵 이후, 정치 혁명을 바란다 탄핵이 끝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헌법 질서를 위기에 빠뜨렸던 윤석열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지만, 계엄 사태를 유발한 정치 구조는 여전히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국민이 거의 예외 없이 느끼는 것처럼 우리 사회의 갈등은 봉합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국민이 가장 심각한 갈등으로 꼽는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대립은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선거철마다 염불처럼 외우는 사회통합은커녕 갈등을 오히려 부추긴다. 대립하면 할수록 유리하다는 기괴한 공식에 감염된 도착적 정치 문화가 지속되는 한 헌정 위기는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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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정치가 실종되고 온통 법률만 따지는 사회는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회다. 사람들은 최소한의 민주주의를 법치주의로 이해하고, 모든 것을 법에 따라 해결하는 것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한다. 오해이고 착각이다. 법치주의는 민주주의에서 양날의 칼이다. 법 규범의 내용이 이성적이고 입법 과정이 정당하고 법 운용이 합리적이라면, 민주주의는 실제로 ‘법의 지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역사적 사례와 현재 신권위주의 정권에서 볼 수 있듯이 법은 국민보다 독재자의 이익에 맞게 설계될 수도 있다. 법률 시스템은 엄격한 절차를 따르지만, 그 법률이 비이성적이거나 억압적이거나 선택적으로 시행된다면 여전히 부당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법치주의가 그 자체로 민주적인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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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오징어 게임’의 다수결 정치 지금 우리 정치는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선풍적 인기를 끌며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두 번째 시즌이 작년 말 공개돼 다시 수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와 중첩된 <오징어 게임 2>는 우리 정치의 야만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시즌 1은 엄청난 재정적 어려움을 겪는 456명의 참여자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일련의 어린이 게임을 하여 참가자 한 명당 1억원씩 총 456억원의 상금을 얻기 위한 서바이벌 스릴러 게임이었다. 어린이의 즐거운 게임을 살벌하고 야만적인 생존 게임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무엇이든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의 사악한 논리를 비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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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자제하지 못하는 권력의 광기 동트기 직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다.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암흑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을 때 이 속담은 종종 인용된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할지 두렵기만 하고 아무런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다시 밝힐 한 줄기 희망을 간절히 바란다. 칠흑 같은 밤이 드리웠다는 것은 어떤 돌파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장 어려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이 속담에서 위로와 희망의 빛을 보지만, 그 이면에는 쉽게 지울 수 없는 절망과 비관의 기운이 숨겨져 있다. 낮고 짙게 드리운 구름 때문에 새벽인데도 동이 트지 않을 수 있다. 상황이 악화하면, 자기 위로의 이 말은 결국 헛된 희망으로 자기를 기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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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삼류정치가 괴물을 낳는다 ‘계엄 선포’라는 윤석열 대통령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나라가 비상사태로 치닫고 있다. 실제로 위급한 상황이 아닌데도 대통령의 어처구니없는 말 하나로 정말 비상사태가 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 선포 대국민 특별담화문에서 탄핵과 특검을 남발하는 민주당의 입법 독재로 국정이 마비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전복될 위기에 처해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계엄을 선포했다고 강변했다. 많은 사람이 처음 들었을 때는 가짜뉴스로 생각할 정도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한 국가의 지도자가 국정의 난맥과 마비를 민주적 절차에 따라 풀지 못하고 폭력에 의존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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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트럼피즘’에서 배운다 ‘트럼프 2.0’ 시대가 시작되면서 우리가 이제까지 낯설고 기이하게 생각하던 ‘트럼피즘’(trumpism)이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트럼프라는 이름으로 대변되는 ‘기괴한 정치’와 익숙해져야 한다. 좋은 정치를 바란다면 적어도 트럼피즘의 기괴함을 이해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는 권위주의적이고, 반항적이며, 극우적이다. 트럼프는 거짓말을 하고, 천박한 언행을 일삼고, 법을 어긴다. 미국의 보수주의 세력은 이 깡패이자 거짓말쟁이고 반동적인 정치인을 47대 대통령으로 뽑았다. 정말 기이하고 이상한 일이다. 본래 보수주의는 미덕, 조화, 위계와 영원한 진리에 관한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는데 트럼피즘은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간다는 사실이 괴이하다. 무엇보다 기괴한 것은 거짓말이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정치의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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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영부인’이라는 정치적 리스크 ‘영부인’이 정치를 실종시키는 가장 커다란 위험이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의 절반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정치적 논란만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역대 대통령의 퇴임 후 좋지 않은 삶은 많은 부분 가족과 연관이 있다. 어떤 대통령은 혁명과 쿠데타로 하야하고, 어떤 대통령은 군사반란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어떤 대통령은 뇌물과 비자금 조성으로 구속되고, 그리고 어떤 대통령은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하는 ‘대통령 퇴임 잔혹사’는 근본적으로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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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AI 디지털 교과서, 혁신인가 유행인가 “잠자는 교실을 깨우겠다”고 윤석열 정부가 인공지능 디지털 교과서 도입을 야심만만하게 추진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딥페이크 성범죄 사태로 드러난 인공지능의 부작용과 문제점에 관한 우려가 증대하고 있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인공지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딥페이크의 위험에 관한 소란스러운 공포가 오히려 인공지능의 혁명적 성격을 은폐한다면, 심도 있는 논의와 토론은커녕 소리 소문도 없이 진행되는 인공지능의 개발과 활용은 우리의 삶과 사회에 훨씬 더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이제까지 종이책 교과서로 가르치던 전통적 교육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AI 디지털 교과서가 그렇다. 딥페이크 성착취물에 가장 취약한 국가인 대한민국을 디지털 교육 강국으로 탈바꿈하겠다는 듯이 현 정부는 AI 디지털 교과서 도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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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새로운 디지털 성범죄 ‘딥페이크 성착취물’ 생성형 인공지능은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과 현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세계가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현실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시대나 가짜가 있게 마련이지만 그만큼 진짜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으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든 새로운 현실이 펼쳐졌다. 진짜만큼 많은 그리고 영향력이 더 큰 가짜가 만연한 세계는 그야말로 ‘페이크 현실’이다. 이런 세상에서는 우리와 현실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그것이 쉽게 감지할 수 없는 인공지능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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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뉴 노멀’이 된 탄핵 정치 정치는 다른 수단으로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 정치를 계속하는 것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말을 뒤집어 놓은 이 말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지긋지긋하지만 우리의 감각이 무뎌져 이제는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생각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전쟁터로 변하였다. 이러한 전쟁이 일어나는 두 가지 공간이 특히 두드러진다. 하나는 포퓰리즘 물결과 함께 폭력적인 투쟁의 장소가 된 ‘정치’이고, 다른 하나는 대중을 감정적으로 선동하는 프로파간다가 난무하는 ‘소셜미디어’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감성 커뮤니케이션은 사회적 논의는커녕 적대적 혐오와 원한 감정을 강화하는 증폭기일 뿐이어서 투쟁으로 전락하고 타락한 정치는 사회 전체를 폭력적인 전쟁터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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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우의 거리두기 ‘규범’을 파괴하는 ‘사실’의 힘 도덕은 실종되고 적나라한 현실만이 지배한다.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기준과 도리를 통상 규범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갈등을 겪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합의가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사람들이 종종 ‘양심’ 또는 ‘상식’이라 부르는 행동 기준은 설령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과 다를지라도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과 당위로 여겨졌다. 당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상주의자’가 되고 사실을 중시하면 ‘현실주의자’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당위 사이에는 일종의 생산적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현실을 무시한 당위는 공허하게 들리고, 당위를 배제한 현실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우리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 도덕과 규범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의 사실적 힘에 완전히 예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