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원
청년참여연대 사무국장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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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도 ‘가족’이다 코로나19로 이전과 어떻게 일상이 달라졌느냐 묻는다면 역시 답은 ‘단절’일 테다. 표정도 알 수 없게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은 마스크, 서로 만나 대화하지 못하고 줌(Zoom)으로만 안부를 묻는 사람들. “밥이나 한번 먹자”라는 제안조차 더는 가볍지가 않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단절과 고독을 체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모님과 같이 사는 나는 그나마 고독하지 않은 편이다. 회사도 다니고 있으니, 좋든 싫든 사람과 부대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기적으로 출근을 해야 하는 회사도, 얼굴 보며 밥 먹을 식구도 없이 혼자 온전히 하루를 지내야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내가 사는 아파트 뒤의 체육문화센터는 벌써 6개월이 넘도록 무기한 휴관 중이다. 오후 시간이면 그 앞에 옹기종기 모이던 아이들과 아이 보는 어른들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1인 가구 청년, 취업준비생 청년들이 무료로 드나들던 청년 공간도 문을 닫았다. 그런가 하면 뒷골목의 노인복지관, 실버센터 문 앞엔 아예 철창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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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공허하게 울리는 ‘노동의 가치’ 부쩍 청년과 주식이란 단어를 같이 쓰는 글을 자주 본다. 아마 비트코인 가격 폭등 때부터였을 거다. 각종 코인을 포함해 청년 세대가 주식 투자 등을 자본증식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기사가 쏟아졌다.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빚내서 투자한다’는 뜻의 ‘빚투’라는 단어엔 그런 우려의 시선이 담겨 있다. 위험한 투자를 즐기는 청년들의 자본증식 방식과 소비패턴이 걱정될 만도 하다. 물론 나에게도 주식 투자는 남의 일이다. 돈이 돈을 벌고, 내 자산의 정도가 성과의 크기를 결정하는 생산(?) 방식은 어쩐지 싫다. 하지만 주변의 주식에 투자하는 친구들 말을 들어보면, 그들의 주식 투자는 세간의 우려처럼 ‘위험한’ 외줄 타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이다. 내가 공부한 만큼 벌 수 있어서다. 직장에서의 노동력의 대가가 집 한 채 못 구할 만큼의 적은 월급이라면, 발로 뛰어 정보를 습득한 만큼 수익을 낼 수 있는 주식 투자가 더 ‘가성비’ 좋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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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소유’ 아닌 ‘거주’의 보장을 언제부턴가 ‘내 집’을 갖고 싶단 생각을 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내 집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나 매달 들어오는 귀여운 월급만으로는 ‘내 집 마련’의 꿈은 먼 곳의 이야기다. 얼마 전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10억원을 돌파했다. ‘영끌’이니, ‘빚투’니 유용자금 200만원도 없는 나에겐 “그게 그래서 어떤 청년의 이야기야?” 싶기만 하다. 그저 가까운 미래엔 내 소득 수준에 맞는 이자를 낼 수 있을 정도만 대출해 나만의 전세방을 구하고 싶을 뿐이다. ‘빌려 쓰는 사람’이 되는 것도 이렇듯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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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나도 A씨다 처음 대학 동기와 선배들을 만난 자리는 학교 앞의 작은 술자리였다. 나와는 멀고 이질적인 집단처럼 보이던 ‘○○대학교 ○○학과’는, 고작 20명 남짓 앉아있던 작은 술자리에서 대면으로 만나자 한 명 한 명의 개성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나는 학과 친구들을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개인으로 대할 수 있었다. 학교 온라인 게시판에 만연한 혐오 표현을 만나며 학교라는 공동체를 잃은 기분이 든 건 조금 지나서의 일이다. 중국인 유학생을 향한 편견 담긴 평가, 학교 본관 앞에서 파업하는 노동자를 앞에 두고 형체도 없는 ‘학교 인풋’만을 걱정하는 이기적인 말들, 총여학생회의 존립 이유를 부정하는 혐오와 차별의 언어들. 나와 같은 캠퍼스를 공유하며 언젠가 옷깃도 스쳤을 사람들의 말이라고 믿을 수 없었다. 온라인 게시판에 만연한 각종 혐오가 학교의 주류 정서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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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코로나 블루’ 사람에 목마른 청년들 ‘코로나 블루’라고 했던가. 나조차도 이렇게 우울감에 빠질 줄은 몰랐다. 퇴근 후 자연스레 트위터에 접속해 또 하나의 ‘부캐’로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나다. 열 살을 갓 넘겨서부터 버디버디라는 메신저로 같은 반 친구에게 “우리 사귈까?” 이야기하고, 대학 시절 팀 과제는 서로 얼굴을 보지도 않고 네이트온으로 진행했던 디지털 네이티브다. 그런 내가, 코로나19를 만난 지 8개월 만에 사람과 만나고 싶은 목마름에 몸부림치고 있다. 무기력증에 빠져버렸다. 내가 하는 일에 ‘만남’의 중요성이 커서 더 무기력해진 건지 모른다. 얼마 전 청년들과 어떤 놀이 행사를 하면 좋을까 기획회의를 한 적이 있었다. 하늘도 높고 바람도 선선한 가을, 환경영화제 출품작을 대여해 통인동 명물이라는 참여연대 옥상에서 청년들과 옥상영화제를 하는 건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코로나19 앞에서 대면 행사 계획은 휴지조각이 됐다. 결국 온라인 영화상영회로 행사는 변경됐지만, 같이 기획에 참여했던 한 친구의 말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는다. “영화제의 목적은 영화 내용을 같이 보는 것에만 있지 않잖아요. 영화를 같이 보면서 그때의 공기, 감정을 공유하는 건데, 온라인으로 그게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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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청년들은 왜 ‘카공족’이 되었나 “오전 9시에 스타벅스에서 보자”가 인사인 시절이 있었다. 취업을 준비할 때,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확인받을 길은 같은 어려움을 겪는 취준생들과 교류하는 방법뿐이었다. 부지런히 일어나 책과 노트를 챙겨 카페로 가는 데엔 물론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언제 취업이 될지 모르는 막막함과 죄인이 된 느낌에 집에 있기 버거웠다. 그나마 할 수 있는 건 스터디 모임을 전전하며 열심히 미래를 위해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설득하는 일뿐. 최근 이때의 막막한 심정과 다시 마주했다. ‘카공족’을 향한 비난의 말들을 보면서다. 물리적 거리 두기가 강화되면서 8월30일부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매장 내 음식, 음료 섭취가 금지됐다. ‘카공족’이 갈 곳을 잃었다는 것과, 카공족이 카페를 못 가니 제과점으로 몰린다는 기사가 함께 나왔다. 그것 며칠 못 참냐는 비난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쏟아졌다. 카페로 나갈 수밖에 없는 청년들의 처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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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기성세대와 다른 ‘청년의 정무적 판단’ ‘정무적 판단’이라는 말을 종종 쓴다. 한 사안에 판단이 필요할 때 논리나 윤리에 근거하기보다는 정치적 상황, 행정적 환경 등을 고려하여 판단한다는 뜻인 것 같다. 쉽게 말해, 정치적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정치인들이 책임회피할 때나 사용하는 단어인 줄 알았는데, 막상 그렇지도 않다는 걸 깨닫고 있다. 지난 7월9일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의 죽음은 개인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와 일면식 없는 나조차도 첫 실종 기사가 떴을 때 “이제 우리는(아마도 서울 청년 시민을 의미했던 것 같다) 어떡하지”라는 말만 반복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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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행복주택’ 반대 목소리 유감 한 달쯤 되었을까. 요즘 출근길에 “서울시 행복주택 결사반대”라는 현수막을 본다. 보고 싶지 않아도 지하철역을 둘러싼 세 아파트 입구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현수막이 있어 마주치지 않을 수 없다. 찾아보니, 동대문구의 도심 행복주택은 세 개의 아파트 한가운데 서 있는 이문체육문화센터 부근에 세워질 것이란다. “행복주택 건설반대”란 글 아래엔 “○○아파트 주민 일동”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음엔 화가 났다. 행복주택에 ‘어떤’ 청년이 살 수 있느냐는 정책적 결함은 차치하고, 행복주택이 청년을 포함한 주거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정책이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아무런 반대 이유 없이 걸린 “행복주택 건설반대”라는 문구 때문인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없는 청년인 내가 거부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메모를 써내려갔다. 이 아파트의 주민인 나는 찬성한 적이 없으니, 우리 다시 논의하자고. 여기까지 적는데 엄마가 말했다. “너는 주민이 아니야. 우리는 세입자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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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당사자들의 절박한 외침, ‘온전’하게 들으시라 요즘 부쩍 피해자와 당사자, 활동가의 구별에 대해 생각한다. 청년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는, 청년문제 해결의 당사자가 되길 원하는 청년 활동가다. 청년문제가 지금 우리 사회가 복합적으로 겪고 있는 구조적 불평등의 한 현상이라면, 나는 이 불평등한 구조의 피해 당사자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세 정체성에 뚜렷한 구분을 둘 수 있을까. 최근 청소년 활동가들과 대담할 기회가 있었다. 그날 만난 활동가들은 기후위기, 청소년 참정권, 여성인권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누구보다 예민하게 세상을 감각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도 모르게 감수성 떨어지는 실언을 하지는 않을까, 식은땀이 절로 났다. 아니나 다를까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그레타 툰베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영겁과 같은 5초였다. ‘갑자기요?’ 하고 묻는 듯한 표정을 보자마자 잘못된 질문임을 알았다. 단지 10대라는 공통점 하나를 가진 인물, 질문에는 별 맥락도 없었다. 그의 활동방식, 그의 활동이 세계와 우리에게 끼친 영향, 그를 소비하는 기성세대의 잘못된 방식, 뭐 이런 질문이라도 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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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혐오’라는 이름의 작은 세계 초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가 있었다. 친구 손을 잡고 인기 많던 만화영화 이야기를 하며 친구네 집에 가는 것이 그 시절 나의 일상이었다. 가끔 친구 어머니는 라면을 끓여주었고, 그럴 때면 친구 오빠와 마주 앉아 먹었다. 오빠는 6학년이었다. 그런데도 젓가락질을 잘 못했다. 내 이름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재촉하지 않고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와 대화하는 방법임을 알았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모두 그 오빠를 ‘특수’라고 불렀다. ‘특수’는 특수학급에서 따로 교육을 받는 장애 학우를 말하는 나쁜 은어였다. 오빠는 발달장애 학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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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지겹겠지만 그래도 들어라 세상은 대체 언제쯤 바뀌는 걸까 뼈가 시리게 슬플 때가 있다. 최근에는 집으로 배달된 선거 공보물을 보다가 그랬다. 내 거주지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 중 90%가 남성이고, 그나마도 한 명을 제외하고는 우리 아빠보다 나이가 많으며, (당선 가능성이 큰) 한 명은 이번에 당선되면 4선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슬펐다. 나이뿐인 ‘청년’ 정치는 필요 없다는 게 내 생각이지만, 후보의 고령화는 그래도 좌절스럽다. 그토록 외치던 세대교체, 당사자 정치라는 키워드가 선거라는 ‘실전’에서는 무용한가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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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설 교육은 공공재여야만 한다 나에게는 두 명의 대학생 동생이 있다. 한 명은 집에서 먼 대학에 다니느라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나머지 한 명은 학교에서 운영하는 고시준비반에 주말에도 간다. 부모님도 모두 출근하고 나면, 5명이 사는 집의 적막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것은 보통 나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럴 새가 없다. 코로나19 때문이다. 대학교 개강이 2주나 연기되고, 학교 건물이 폐쇄되며 동생들은 갈 곳을 잃었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으로 부여된다면, 동생들은 지난 2주 본업을 잃어버렸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니다. 생각해보니 학생의 신분은 그렇게 쉽게 잃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리적으로 등교는 하지 않지만, 이미 등록금은 냈으니까. 수업도 들을 수 없고, 학교 건물도 사용할 수 없지만, 학생이 되기 위한 비용은 지불했으니 아직 학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