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한 임대인’만 기다리게 하지 마라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8년 전 이야기다. 친구들과 같이 살기로 하고 발품을 어지간히 팔았다. 전세를 알아봤지만 결국 40만원 월세를 끼고 계약을 하게 됐다. 예정에 없던 부담이 생겼지만 집을 잘 구했다고 느껴질 때가 많았다. 2년이 다가오면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 드디어 우리는 ‘묵시적 갱신’이 이루어진 것을 자축했다. 집도 좋고, 집주인도 좋으니, 우리 운도 좋다며.

미류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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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세를 보내는 날쯤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앞으로는 50만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네? 따로 연락 없으셔서 이전 계약대로 계속 산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래요? 그런데 처음에 너무 적게 받았어. 이번에 10만원은 올려야겠는데?” 친구들과 회의를 했다. “안 낸다고 버티다가 2년 후에 나가야 하면 어떡해?” 억울했지만, 우리는 법을 운운하지 않기로 했다. 인정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5만원의 은총을 입었다.

동료들이 놀렸다. 주거권운동 한다더니 법에 있는 권리도 못 챙기냐? 그러나 누구도 비웃지는 않았다. 세입자로 살면, 더 오래 살고 싶은 그 마음 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를 비웃게 됐다. 다시 2년이 지났을 때 집주인은 월세 90만원을 불렀다. 권리를 또박또박 내세우지 않았던 우리의 호의는 쓸모가 없었다. 아무렴, 세입자가 감히 착하려고 했다니. 올리지만 않아도 세입자는 고마워하지만, 집주인은 세 올려준 걸 고마워할 이유가 없었다.

작년 7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으로 계약갱신청구권이 도입되었다. 몇 년 전에도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조금 덜 올렸으려나, 마음고생을 조금 덜 했으려나…. 어쨌거나, 다시 2년이 지나 마주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집주인의 선의에 호소하거나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거나. ‘사적 자치’의 영역이 훼손됐다며 법 개정에 반대했던 이들에게 묻고 싶다. 여기 어디 사적 자치가 있는가. 임대인의 통치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임대인은 착할 수 있다. ‘착한 임차인’은 불가능하다.

세입자를 보호할수록 세입자에게 불리하다는 주장이 많다. 더 받으려고 더 내보낼 것이라는 예측이다. 모든 임대인이 착할 리 없으니 당연한 예측이다. 그러면 세입자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는 조건을 강화하기 위한 법제도 개선이 이어져야 한다. 임대인이나 임차인이나 착하기까지 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법의 범위 안에서 서로 원망할 일 없게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들”에게 “송구한 마음”이라는 대통령은 주택 공급 확대만 약속한다. 서울과 부산 보궐선거를 앞두고 여야도 방안을 조금 달리할 뿐, 개발과 주택 공급을 경쟁하고 있다. 성공해본 적 없는 정책이다. 설령 여러 변수가 환상적으로 맞물려 집값이 안정된다 치자. 주거 안정을 위한 선택지로 주택 구매를 포함시킬 수 있는 계층은 이미 제한적이다. 임대료가 집값을 따라 내려갈 가능성은 더욱 적다. 주택을 공급한다고 주거가 안정되지 않는다.

세입자와 집주인은 대등하기 어렵다. 계약 쌍방에 협상의 무기가 되는 계약 해지의 의미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집주인에게 집이 잠시 비거나 보증금을 처리하는 번거로움이라면, 세입자에게는 다시 발품을 팔고 거처를 옮기고 살던 방식을 바꾸고 새로 적응해야 하는 문제다. 부동산과 주거의 차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이 많다. 숙박과 음식 등 대면서비스 업종과 임시일용직에서 감소가 크다. 청년층 일자리는 40만개 이상 줄었다고 한다. 10년 전부터 월세가 전세보다 많아졌고 소득이 낮을수록 월세 거주가 많다는 점을 떠올려보자. 당장의 월세 걱정을 사람들은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까. 전세라면 조금 나으려나. 계약을 갱신하며 5% 올리자고 할 게 벌써부터 걱정이지 않을까.

언제까지 ‘착한 임대인’만 기다리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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