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원
장애인권법센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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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나에게 맞는 언어를 쓸 권리 현충일인 일요일 오전, 사이렌이 울린다. 묵념을 하고 나니 추념식 화면이 들어온다. 화면 귀퉁이에 자리 잡은 수어통역사의 손이 표정과 함께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장애인복지법 시행령 일부 개정안에 의하면 6월4일부터 정부 주관 기념일 행사는 반드시 한국수어 통역이나 점자자료를 제공해야 한다. 기존에는 국경일과 일부 기념일에만 수어 통역이나 점자자료가 제공되었지만, 이제는 3·15의거 기념일을 비롯해 정부가 정한 53개 ‘모든 기념일’에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수어와 점자는 대표적인 ‘정당한 편의’이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은 이 정당한 편의를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하게 같은 활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장애인의 성별, 장애의 유형 및 정도, 특성 등을 고려한 편의시설·도구·서비스 등 인적·물적 제반 수단과 조치’라고 규정하고 있다. 쉽게 설명하자면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이 누릴 수 있도록 제공되는 모든 것’을 정당한 편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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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우범소년이 아니라 위기아동이다 학창 시절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라도 숨고 싶은 기억이 하나쯤은 있다. 잠시 그 시절 나에게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에 해당한 적이 있는지 한 번 물어보자. 첫째,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한 적이 있었다. 둘째,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한 적이 있었다. 셋째, 술을 마시고 소란을 피우거나 유해환경을 접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 중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람을 소년법은 ‘우범소년’이라고 본다. 말 그대로 범죄를 저지를 ‘우려’가 있는 10세 이상의 아동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아동은 어떻게 취급받고 있을까? 우범소년을 발견한 보호자 또는 학교의 장, 시설장, 보호관찰소의 장은 이를 관할 법원의 소년부에 알려 아동을 소년보호재판에 회부할 수 있다. 법원 소년부로 통고된 아동은 소년분류심사원에 위탁될 수 있다. 아동이 12세 이상이라면 최대 2년의 소년원 처분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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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다음 선거 전에 꼭 바꿔봅시다 성인 대다수는 첫 투표의 기억이 있다. 설렜을 수도, 귀찮았을 수도 있는 그 처음 투표의 경험은 ‘나도 이 사회에 중요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되었구나’라는 주권의식으로 자연스레 연결되기도 한다. 투표 방식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불편함의 정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21세기가 된 지 언제인데 아직도 전자투표가 아닌 종이투표를 고집해야 하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선거의 공정성과 중요성을 감안할 때 그 정도 고생은 시민이라면 당연히 감내할 만한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떠들썩한 재·보궐 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한 중증 지체장애인 A씨에게 연락이 왔다. 특수휠체어에 누워서만 생활하며 활동지원사의 지원 없이는 혼자 이동하기도 어려운 A씨는, 코로나19 상황 이후 더욱 외출을 자제했다. 집에만 있으니 몸이 더 약해져서 도저히 투표를 하러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 투표는 집에서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어 우편으로 보내는 거소투표 방법으로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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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내 안의 소수성 찾기 연습 10년 전, 사법연수원 수료를 앞두고 큰 고민이 있었다. 결혼하기로 한 애인이, 결혼식 마치고 열흘 만에 입대해서 3년간 의무 군복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시도 떨어지기 싫었던 나는 군대에 함께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당시에는 여성 수료생이 군법무관을 지원하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었고, 성적도 안정권이었기에 지원만 하면 별 문제없이 함께 입대할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다. ‘한쪽 눈에 시각장애가 있으니 지원해도 서류 통과도 어려울 것 같다’는 비공식적인 의견을 전해듣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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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새로운 명절, 새로운 가족이 온다 벌써 세 번째 집콕명절을 겪었다. OTT 정주행족이 연휴 중 좋은 작품을 SNS로 추천하는 새로운 문화활동이 활황인가 하면, 명절맞이 가사노동을 경감시켜줄 AI 탑재 인공지능 로봇청소기가 주변 물체를 스스로 식별하고 분류하며 자율주행을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특히 이번 설연휴에는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골자로 하는 정부 방역지침을 내심 반기는 분위기가 많았다. 평소에는 기름지고 손이 많이 가서 엄두도 안 내는 음식들을 산더미처럼 만들어 상다리 부러지게 차리던 차례상이 없어지면서 허례허식이나 불필요한 노동이 없어진 신세계를 경험했다는 간증이 줄을 이었다. 아이들 데리고 짧은 연휴 기간 동안 양가 부모님을 모두 방문하느라 연휴 막바지에 몸살이 났다는 소리 대신 코로나19 시국으로 결혼 전 명절의 일상을 보낼 수 있어 좋았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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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학대 피해 아동을 제대로 분리하려면 구속 피고인 호송 버스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치며 날카롭게 울었다. 그 모두의 눈물에는 분노를 넘어 원통함이 스며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귀한 생명을 얼마든지 지켜낼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음에 깊이 원통하여 울면서 묻고 있다. 왜 세 번씩이나 기회가 있었는데 아이를 분리해내지 못했냐고. 이 사건은 작년 10월 세상에 알려졌다. 경찰청과 보건복지부는 그로부터 약 50일 후 사건을 인식한 듯 이런 제목의 보도자료를 낸다. “아동학대 두 번 신고되면 즉시 분리 보호한다.” 이어서 아동복지법을 재빨리 개정해 “1년 이내에 2회 이상 아동학대 신고가 접수된 아동에 대하여 현장조사 과정에서 학대 피해가 강하게 의심되고 재학대가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공무원이 아동을 분리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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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탈시설이 필요한 사람들 며칠 사이 두 사건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나는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는 A씨를 위해 인권 침해 진정을 넣었고, 성폭력을 가한 피의자들이 혐의 없다는 결정을 받아든 피해자 B씨를 위해 그 불기소 결정에 대한 항고를 했다. 사건의 당사자인 두 사람은 서로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그 둘은 비슷했다. A씨는 벌써 10년 가까이 정신병원에서 살고 있다. 병원을 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방법을 찾기 어렵다. 법이 바뀌어 정신병원에서 퇴원이 쉬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남에게만 해당되는 일 같았다. A씨가 병원에 있는 근거는 항상 서류상으로 ‘적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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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생명은 정상가정보다 더 존귀하다 “엄마, 저기 난자에서 쉬었다 가요.” 나들이를 갔던 어느 해 가을, 유치원생 첫째가 멀찍이 있는 정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말을 들으며 이 아이도 어떻게 아기가 생기는지 배웠다는 것을 직감했다. “저건 난자가 아니고 정자야, 난자 짝꿍 정자랑 저 정자는 서로 달라.” 설명을 해주면서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을 멈추기 어려웠다. 생명이 잉태되는 방법을 유치원생도 다 아는 세상이지만 어떤 생명은 참 어렵게도 세상에 온다. 성폭력 피해로 일상생활 유지가 어렵다는 한 여성을 만난 날, 남산만큼 불러 있는 배에 깜짝 놀랐다. 배안 아기의 아빠는 가해자였고, 몇 달 째 잠적 상태였다. 지적장애와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던 이 여성은 두 달 후면 성별도, 건강 상태도 모르는 아기를 만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하루에 한 갑씩 담배를 피웠고, 몇 년 전부터 정신과 약을 먹어왔다는 그녀의 아기가 많이 걱정되었다. 일단 긴급하게 통합사례지원체계를 연결하고 아기 출생을 기다리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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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2차 피해인 줄 몰랐다는 거짓말 실행력만큼은 넘친다고 자부하는 ‘프로민원러’로서, 나는 수시로 여기저기 민원을 넣는다. 세상을 왜 그렇게 삐딱하게 보고 피곤하게 사냐며 핀잔 주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하는 일이 이렇다보니 자꾸 보이고 들리는 걸 어쩌랴. 한 이주여성이 어린아이 앞에서 건장한 체격의 남편에게 가차 없이 두들겨 맞는 동영상이 뉴스에 도배되던 날이 있었다. 눈을 의심하며 그 동영상을 보다가 분노에 기름을 뿌리는 뉴스 멘트를 들었다. 피해 여성이 어떤 방법으로 그 동영상을 촬영했는지에 대한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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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그때도 지금도 “당신이 옳다” 살면서 피하고 싶은 것을 한 가지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무엇을 골라야 하나. 질병을, 부도를, 노화를 피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다. 사건 지원을 위해 만나러 다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의외로 자주 듣는 대답이 있다. “그날이오. 되돌아가서 그날을 인생에서 지우고 싶어요.” 아무도 범죄 피해를 원하지 않는다. 뉴스에서만 듣던 일이 내게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일은 매일 일어난다. 지금도. 술자리를 마친 후 직장 상사에게 성폭력을 당한 A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존경하는 상사였기에 더 충격이 컸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이 A씨를 짓눌러 몹시 힘들다고 했다. 정신적 충격으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며 지내던 A씨를 처음 만난 날, 나는 A씨에게 무엇 때문에 그렇게 자책하게 되었는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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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성적 자기결정권’ 핑계는 이제 그만 판자촌 동네에 살던 지적장애 여성이 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그녀의 일상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유일한 낙은 동네 작은 공원에 나가서 사람을 구경하는 일이었다. 공원에서 그녀보다 50살 정도 많은 한 남성이 접근해왔다. 그는 이 여성에게 심한 지적장애가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먹을 것과 선물을 사주며 환심을 얻는 데 성공한 그는 급기야 이 여성의 성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우여곡절 끝에 이 사건은 수사기관에 입건되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이 사건을 수사하는 수사관과 이야기하는 중에 나타났다. “둘이 사귄 것 같은데, 맞다면 고소를 취하하라고 피해자를 설득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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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견디는 세상 전화로 억울함을 직접 말할 수 있는 사람보다는 그럴 수 없는 사람을 주로 지원하고 있기에, 전화는 별 부담감 없이 받는 편이다. 그런데 가끔 평소와 다른 전화를 받는다. 여느 전화 통화와 거의 비슷하지만 수화기 너머로 뭔가 매캐한 기운이 전해지는 전화들이다. 한 번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아빠랑 떨어져 지내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라고 묻는 남성이 있었다. 다 큰 어른이라서 아버지와 살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걸 왜 법률사무소에 물어보나 싶다가 목소리 끝에 왠지 힘이 없기에 물어보았다. “선생님, 혹시 복지카드 가지고 계시나요?”라고.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다가 ‘네’라고 했다. 정신이 확 들었다. 이 발달장애인이 어떤 마음으로 용기를 내어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을까. 길게 통화하기가 어렵다기에 “다음에 또 이야기 나눠도 될까요” 묻고 허락을 받아냈다. 아무래도 이상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당사자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지원기관에 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심각한 학대 상황에 놓여 있던 그 발달장애인이 구출되고 가해자인 친부가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화기 속 그 발달장애인이 견뎌왔던 세상은 지옥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