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
청년연구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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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시혜와 비난을 넘어 제22대 총선이 마무리되었다. 성적표를 보면 정권심판론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여소야대 국면이 이어지게 됐다. 혜성처럼 등장한 조국혁신당과 당을 박차고 나가 생존한 개혁신당도 주목할 만하다. 정작 그 와중에 녹색정의당은 국회에서 퇴장하게 됐다. 3%의 벽을 넘지 못해 의석을 잃었고, 심상정 의원은 은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울산 출신인 나는 “권영길이 뽑으소, 영 아이다 싶으면 노무현이도 괜찮고”라는 말로 2002년 대선을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권영길을 뽑아달라 당부하는 노조 아저씨들이 있었고, 노무현의 이름도 가끔 호의적으로 언급됐다. 당시 나는 권영길을 뽑으라면서 왜 그를 “영 아이다 싶은”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지, 그리고 당이 다른데 왜 노무현도 “괜찮다”고 말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후 조금 더 자랐을 무렵,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를 ‘한강과 실개천’으로 비유하는 걸 보고 아리송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을 품고 스무 살이 된 2008년의 나는 당시 진보신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해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3%의 벽 앞에 가로막혔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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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고귀함을 알아볼 의무 어느덧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당시의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도 ‘어른’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응축되어 벌어진 일이었고, “미안하다”는 고백은 분명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간절한 반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공동체는 과연 더 나은 곳에 도착했을까. 단언컨대 한국 사회는 그 마음에 값하지 못했다.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찾아온 건 적나라한 각자도생과 혐오의 세상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가 나오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이 사회가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는 걸 모두에게 재차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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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왕이나 독재자는 자그마한 불평도 크게 처벌했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의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랬던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면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서면 나는 아닌 척하면서 늘 학생들의 눈치를 본다. 졸거나 딴짓을 하지 않는지 그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내 강의가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는 건가 가늠해보고, 딴짓을 하는 모습에 나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한다. 보통은 약자인 학생이 강사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짐짓 아닌 체할 뿐 나 역시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불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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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민폐’, 주어는 누구인가? 내 친구의 10년 전 사연이다. 한창 연애 중이던 이성애 커플이었는데, 어느덧 남성이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으로 병사가 사망하고 박정훈 대령을 향한 부당한 재판이 이뤄지는 게 군대다. 여성은 애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군인이 된 애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다 찾은 방법은 군인권센터의 후원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병사마저도 언제든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신은 대한민국이 국민을 상대로 저질러 온 폭력의 현대사를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과거 이와 관련된 말 중 하나는 ‘민폐(民弊)’였다. 조선시대에도 쓰인 민폐란 단어는,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바탕으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특혜를 추구하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를 일컫는 데 쓰였다. 오늘날의 민폐가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끼치는 폐를 의미한다면, 과거엔 관이 시민에게 폐를 끼치는 걸 지칭할 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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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의 의무 해가 바뀌고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1월이다. 사람들은 신년 달력을 구매하며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올해 1월은 이상하게도 들뜨기보다는 가라앉는다. 새해 벽두부터 쏟아진 뉴스들마저 온통 부정적인 것들이라, 갈수록 세상이 더 나빠질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을 앗아가 버린 탓이다.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가져볼 만한 소식들은 드문데 세상은 거꾸로 퇴행하는 요즘이다. 비단 윤석열 정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예의가 사라지고 더 약한 이를 향한 혐오는 더 거세져 간다.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고 돕지 않는다. 사회는 무너져가는데 기후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소식들은 미래마저 비관하게 만든다. 정치마저 제 역할을 손에 놓은 지 오래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길을 잃은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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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외국인 유학생은 돈이 된다? 11월27일 한신대학교는 자교의 한국어학당에 다니던 우즈베키스탄 국적 어학연수생 22명을 ‘외국인등록증 수령을 위해 출입국관리소에 가야 한다’며 버스에 태운 다음, 이대로 ‘출입국관리소에 가게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설명한 뒤 그들을 강제출국시켰다. 연수생들은 기숙사의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경호원들의 통제 속에 인천공항으로 가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이다. 지난 12일 한겨레 보도 이후 논란이 되자 경찰은 수사에 나섰고 국가인권위도 진정을 접수해 조사에 착수했다. 한신대학교 총장은 15일 담화문을 통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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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억상실과 평화의 논리 현재의 사실에서 출발하자.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지난 22일 팔레스타인 사망자를 약 1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사망자 중 열에 일곱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이다. 물론 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며 사상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삶의 터전을 파괴당하고 기본적인 의료적 조치와 생필품 공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16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것을 학살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팩트’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이런 사실의 나열마저 거부한다.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가 이스라엘인 사망자의 10배를 넘는다는 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대응은 정당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현재 벌어지는 학살을 설명할 ‘서사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서사의 시작은 10월7일 하마스의 공격이다. 그 서사는 이스라엘을 정당한 피해자로만 본다. 하지만 다른 서사도 있다. 지금의 사태를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문제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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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호박귀신의 표정으로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고 성숙해지는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 알게 되는 게 있다. ‘상실’은 아프고 괴로운 것이지만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우리는 반드시 소중한 사람을 잃게 된다. 동물이나 식물, 물건, 장소, 기억까지도 소중하지만 언젠가 반드시 우리 곁을 떠나간다. 한국 사회가 상실을 겪는 사람들에게 잔인한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떠나간 이가 남긴 자국을 어루만지며 슬퍼할 수 있는 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인 이상 온전히 슬퍼하고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언제 어떤 계기로 슬픔이 다시 찾아올지 모른다. 상실은 어쩌면 평생을 함께해야 하는 악우 같은 걸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종 사람들은 상실을 마치 삼일장 치르는 걸로 후딱 해치울 수 있는 양 취급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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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구하러 가자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느닷없이 닥쳐온 비극 앞에서 사람들은 황망한 기분으로 자책과 후회를 토로한다. 지하차도에서, 거리에서, 교실에서, 최근 몇달간 일어난 여러 사회적 죽음들 앞에서 나는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안다. 되돌아갈 수 없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을 품지만 불가능하다는 걸 안다. 그 마음이 간절할수록 과거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차갑고 단단하다. 그래도 상상해 본다. 만약 4월15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배가 출항하는 걸 막기 위해 무슨 수든 쓸 작정이다. 단원고에 전화를 걸어 사고가 날 거라고 경고할 거다. 인천으로 달려가 사고가 날 거라며 어떻게든 세월호의 출항을 방해할 것이다. 배에 불을 지를지도 모른다, 인질을 잡고 협박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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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지옥, 도덕이 무너진 사회 과거 ‘강남좌파론’이 유행할 때 그에 대한 반박 논리로 ‘도덕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진보적이라고 해서 강남에 살면 안 되냐, 그것은 개인에 대한 과도한 도덕적 요구라는 것이었다. 이런 도덕주의 비판론은 진보도 개인적 욕망을 추구할 수 있고, 진보라고 해서 그런 욕망을 억압받아서는 안 된다며, 보수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금욕’을 진보에게 요구하는 이중잣대를 비판했다. 이 도덕주의 비판론은 고삐 풀린 욕망과 도덕에 대한 냉소를 배양하는 효과를 낳았다. 조국 사태는 교수로서의 지위와 자원을 활용해 사적 욕망을 추구했던 조국 일가의 면모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이를 지적하면 과도한 도덕주의라는 반론을 받고는 했는데, 그런 논리는 이 사회의 엘리트들에게 공적으로 부여된 권위와 권한에 상응하는 도덕적 책임을 면제해 주는 효과를 낳았다. 도덕이라는 최소한의 책임조차 지지 않아도 된다면 엘리트는 더 무거운 책임 대신 더 달콤한 특권을 누리는 자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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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극한사회’를 살아가는 일 참담한 소식들이 연달아 전해지는 7월이다. ‘극한호우’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의 폭우가 쏟아지면서 인명피해만 사망 47명, 실종 3명, 부상 35명(7월23일 기준)을 기록했다. 인명피해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의 결과라고 볼 수 없다. 14명이 사망한 오송 지하차도 참사에서 보듯 호우 상황에서 행정의 안전통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는 재해 대응에 대한 ‘국가의 실패’를 시사한다. 문제는 재난대응 책임을 지고 있는 이들이 실패의 책임을 부정한다는 점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호우피해가 발생하고 있음에도 귀국 대신 예정에 없던 우크라이나 방문을 결행했다. 이는 국민적 재난을 함께해야 할 대통령의 상징적 책무를 저버린 것이다. 대통령실은 “대통령이 당장 서울로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는 입장”이라고 변명했다. 그렇게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정부가 주재해야 할 컨트롤타워가 작동하지 않으며 오송 참사가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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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정전과 종전 냉전의 망령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소위 신냉전 얘기가 아니다. 지난달 28일 윤석열 대통령의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기념식 축사가 그러하다. 그는 문재인 정부를 두고 “반국가세력”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종전선언’이 “북한이 다시 침략해 오면 유엔사와 그 전력이 자동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막기 위한 종전선언”이며 “우리를 침략하려는 적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는 허황된 가짜평화 주장”이었다고 했다. 놀라운 언설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구사하는 언어는 정확히 냉전시대의 유산에 기대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로 선출된 정부 및 야당을 불구대천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도 냉전적 사고의 전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