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신기사
-
세상 읽기 벽을 두드리는 기억과 목소리 탁월한 연설가인 노무현의 역사적 연설 중 하나는 2002년 울산지역 국민경선 연설이다. 그는 처절하게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 기억을 공유하는 지역민과 자신을 묶어 하나의 ‘기억의 공동체’로 호명했다. “저와 같은 뜻을 가지고, 울산에 야당을 건설하자 울산에 민주정당을 건설하자는 충정 하나를 가지고, 끊임없이 도전하고 도전하고 실패하고 좌절하고 죽어가고 패가망신한 많은 가슴 아픈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그 동지들 지금 이 자리에 계시잖습니까.” 노무현은 울산에서 1위를 차지하며 이변을 일으켰다. ‘노무현 돌풍’의 시작이었다.
-
세상 읽기 인지전 시대, 평화의 언어 새 학기다. 매년 3월이면 평화학 강의로 신입생들과 만난다. 실천적 성격이 강한 평화학의 특성상 매년 강의의 초점이 조금씩 달라진다. 작년에는 민주시민교육에 방점을 두었다. 항상 하던 것처럼 올해도 왜 ‘평화’에 대해 배워야 하는지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설명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황이 보도되는 지금, 평화는 왜 중요한지 설득할 필요가 없는 문제가 되었다.
-
세상 읽기 평균 압력에 지지 않는 삶 남들 다 한다는 것에 별 관심 두지 않고 산다. 그러다 어느덧 평균적 삶과는 무척 멀어졌음을 실감한다. 지난 문재인 정부 시기 내 또래 세대가 ‘공정’을 부르짖을 때 그랬다. 공정이란 말로 표출된 부당함과 억울함은 평균적 삶을 누리기 위해 무척 노력해야 하며, 노력 이외의 수단은 모두 반칙이라는 인식에 근거한다. 그 인식 이면에는 사회가 말하는 평균에 도달하지 못한 삶은 모두 실패한 것이며 결코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모종의 깊은 공포감이 서려 있다. 그만큼 한국 사회의 ‘평균 압력’은 강고하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자가 아파트, 결혼과 육아를 달성하는 삶의 궤적이 실제 평균일 리가 없음에도, 마치 중력처럼 달성해야 할 규범적 압력으로 작용한다.
-
세상 읽기 평화의 시대로 이어지는 길 1999년 12월31일, 시민들은 서울 광화문 일대에 몰려들어 새천년의 전야를 맞았다. 인류는 20세기의 상처를 뒤로하고 21세기를 향한 희망과 기대를 품었다. 한반도는 분단의 역사와 대면해 평화로 나아가던 참이었고, 유엔은 미래를 향한 낙관을 품고 새천년개발목표를 제시했다. 당시를 돌아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낀다. 어느새 낙관은 힘을 잃었다. 새천년의 희망은 증발했고, 세계가 더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이 가득하다. 1월3일 미국의 베네수엘라 마두로 대통령 납치가 온 세계를 뒤흔들었다. 국제법을 무시한 채 군을 파견하고 베네수엘라를 운영하겠다 선언한 트럼프 대통령의 행보는 일정한 논리적 일관성을 갖춘 노선의 발로라 보기 어렵다.
-
세상 읽기 제천 화재참사, 여덟 번째 12월21일 부당한 일을 겪는다고 누구나 저항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닥쳐올 불이익을 계산하며 억울함을 삼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누구나 적당히 비겁하다는 걸 나는 꽤 뒤늦게서야, 어른이 된 후에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손해의 계산을 선순위에 두지 않았고, 그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걸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는 피멍이 들도록 교사가 학생을 패는 게 일상이었다. 언젠가 나는 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고 죽도록 학생을 패는 교사들을 제지하고 언쟁하며 그들에게 대항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이상한 애’라며 학교에서 고립되고 불이익과 비난이 닥쳐왔다. 무척 억울한 일이었지만, 나를 고립시킨 교사나 친우에 대한 원망은 크지 않았다. 고립된 상황에서 겁이 나 용기 내기를 주저하는 자신을 질책하며 몰아붙이는 데 마음의 대부분을 썼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당시엔 그 누구도, 나 자신마저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
세상 읽기 각자의 민주주의 모멘트 지독히 더웠던 여름을 지나 날씨가 제법 차가워졌다. 찬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지난겨울 날들이 새록새록 되살아난다. 내란 청산은 아직 진행형인데, 아득하니 멀게 느껴지는 12·3 내란 이후 1년 시점이 벌써 다가온다. 다 지난 후에 돌이켜 보니, 고백건대 지난겨울은 아름다워서 즐거웠다. 지독하게 괴롭고 우울한 가운데서도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일을 해낼 수 있는지, 어디까지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는지 지켜보는 감격과 흥분이 있었다. 형형색색의 빛깔이 한겨울 밤거리에 흘러내렸고, 무수한 사유와 문장이 자유발언과 SNS로 쏟아졌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가 되어 손에 꼽을 만큼 생의 가장 반짝이는 비일상의 시간을 보냈다.
-
세상 읽기 스캠 단지 인신매매, 정치와 미디어의 ‘아무 말’ 사람 본모습은 그가 바닥을 칠 때 드러난다는 말처럼, 한 사회의 성숙함은 충격적 사건 앞에서 공동체가 보이는 모습에 달려 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 스캠 단지에서 일어난 감금·폭행·강제노동 등 인신매매 범죄는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정치권은 이때가 기회라며 짐짓 분노한 표정으로 강경 발언을 쏟아낸다. 아예 외교를 포기한 듯하다. 미디어도 이를 제목으로 삼아 자극적 보도를 일삼는다.
-
세상 읽기 첫차와 막차 사이에서 1990년대 학생운동은 스스로를 ‘막차 탄 세대’라 불렀다. 학생운동이 최절정에 달하고 점차 퇴조하던 시대의 분위기를 자조하는 말이었다. 작년 12·3 계엄 포고문에서 대학이 언급되지 않은 건 그 장기적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30년이 지나도 ‘막차’는 끊기지 않았다. 비주류일지라도 학생운동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더욱이 대학생 대신 다른 이름을 지닌 다양한 운동이 성장해왔다. 겨울의 광장을 가득 메운 깃발과 응원봉은 그 결과다.
-
세상 읽기 목소리의 문턱 앞에서 2019년 8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 지명 이후의 극단적 갈등은 해소되지 않았다. 최근 광복절 특별사면은 이 갈등을 재점화했다. 당시도 지금도 조국 사태를 둘러싼 논의 지형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고, 당시 겪었던 여러 겹의 계급적 장벽이 건재하다는 걸 확인한다. 그 장벽은 담론들 사이에 놓여 있다. 우선 조국 사태의 성격을 위선과 ‘내로남불’로 규정하는 건 조국과 민주진영을 ‘위선자’로 만드는 걸로 족한 정치 공세다. 이 논리는 개인의 도덕성을 초점으로 삼기에 구조적 불평등에 침묵한다. 더욱이 위선을 강조할수록 차라리 뻔뻔하고 노골적인 악이 낫다고 여기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할 수 있다.
-
세상 읽기 갑질 부정의 사회적 해악 강선우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의 갑질 의혹에 문득 <김지은입니다>를 펼쳤다. “고통스러웠던 일은 노동자로서 내가 할 이유가 없으며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업무 범위가 불분명하고 종속성이 강한 수행비서의 특성에 더해, 평판이 중요한 정치권의 특성이나 압도적인 권력관계 등이 김지은씨가 겪은 갑질과 성폭력의 원인이었다.
-
세상 읽기 마음의 전쟁과 절멸의 상상력 대중문화에서 마법이나 약물을 통한 정신 지배는 단골 소재다. 스타크래프트의 ‘마인드 컨트롤’이 대표적이다. 개인의 마음을 장악하고 통제한다는 발상은 전혀 낯선 것이 아니지만, 그것이 발발 75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이 남긴 유산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한국전쟁에서 개개인의 마음은 ‘주전장’이었고, 마음을 포획하고 장악하려는 기술들이 서로 경쟁했다. 일제강점기에서 이어진, ‘빨갱이’의 전향을 목적으로 한 사상 통제가 대표적이다. 고문은 한 개인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지배해 전향시키려는 기술이었고, 고문이 가해지는 나약한 인간의 몸과 마음은 곧 ‘사상전’의 전장이었다.
-
세상 읽기 나를 알아주는 후보를 알아보는 법 대선 후보 토론을 시청하며 참담한 기분이 들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는 시민이 선거 때만 주권자이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고 했다. 하지만 루소가 틀렸다. 선거 때마저 시민은 주권자가 아니다. 상대에 대한 비난과 낙인, 사실이 아닌 거짓말, 소수자를 향한 혐오 선동이 가득한 대선에서 정치는 시민들에게 누가 더 잘 싸우는가를 투표의 기준으로 삼도록 만들고 있다. 지난 4개월 동안 열린 광장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사연과 공동체의 미래에 관해 수많은 말을 했지만, 대선 국면에서 그 모든 열망과 논의가 실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