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
청년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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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평범한 이웃의 몫 대학에서 강의하게 되면서 서 있는 자리의 변화를 실감한다. 박봉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강사 월급 때문은 아니다. 한 학기 동안 강의를 꾸려나가고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도와야 할 강사로서의 책임 때문이다. 어른이 되는 시기가 늦어지는 시대에 나는 여전히 청년세대에 속하지만, 어느덧 사회에 그저 도전하고 요구하는 것보다 사회에 대한 ‘책임’을 고려하게 된다. 그래서다. ‘텔레그램 딥페이크 성범죄’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에 대한 책임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 다수가 10~20대라고 한다. 그들을 피해자와 가해자로 만든 것이 사회라면, 나는 이런 사회를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만약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이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피해자와 가해자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이 이 사태의 끔찍한 측면이기도 하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친구가 알고 보니 가해자라면 피해자는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가족을 대상으로도 성범죄가 벌어진다니 딸이 피해자, 아들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물을 수밖에 없다. 학교는, 집은, 직장은 과연 안전한 공간일까? 친구, 가족, 동료가 피해자이고 가해자라면, 이 사태로부터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성폭력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린다. 딥페이크 성범죄만이 아니라 성폭력은 많은 경우 가족, 친구처럼 피해자와 익숙한 관계에서 발생한다. 일상 곳곳이 위험으로 가득 차고 주변의 누군가가 나에게 은밀하게 악의를 품고 있다면, 대체 누구를 믿고 어디에서 안심하고 쉴 수 있을까? 마치 땅 전체가 흔들려 안전한 곳을 찾을 수 없는 지진처럼 익숙한 일상의 지반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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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태도로서의 마음 일전에 한 선생님이 물었다. “글로 읽은 저와 실제 보는 제가 많이 달라 실망하지 않았나요?” 그 순간에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내가 그의 글을 좋아하고 그의 팬이 된 것은 단순히 그가 훌륭한 사람일 거라 믿기 때문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가 일상에서 어떤 모습을 하는지 알 만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그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변을 얻게 된 것은 한 뮤지션을 ‘덕질’하면서였다. 지금은 내 ‘최애’가 된 그를 처음 목격한 공연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태도’였다. 당시 그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노래를 만들면서 사랑을 마치 지켜나가야 할 태도라고 정의했다. 갚기 어려운 깊은 애정을 알려준 팬들을 향해, 자신의 사랑의 태도를 계속 점검하면서 단어 하나하나 신중히 골라 말하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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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사람 잡아먹는 배터리 영어 단어 ‘배터리’는 포병부대나 요새화된 포대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배터리의 의미는 전지(電池)다. 이 용법은 18세기 미국의 벤자민 프랭클린이 전기를 모으기 위해 고안된 라이덴 병을 연결한 것을 대포들이 모여 있는 모습(배터리)에 비유하면서 시작됐다. 오늘날 일상 곳곳에 쓰이는 배터리는 그 어원처럼 군대나 전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일례로, 과거 한국 전기산업을 석권한 굴지의 기업 로케트전지(구 호남전기공업)는 해방 이후 미군이 버린 군용전지를 재활용해 건전지를 만들었고, 이후 미군 및 국군에 군용전지를 납품하며 크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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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군대, 예외에서 상식으로 횡문근융해증. 육군 12사단 훈련병의 사인으로, 타격 및 압력이나 무리한 운동 등으로 근육이 괴사해 장기를 손상시키는 증상을 뜻한다. 낯선 의학 용어지만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단어다. 2014년 5월 윤 일병 사망의 수사단장이던 6군단 헌병대장은 음식물에 의한 기도폐쇄를 사인으로 발표했다. 이후 유가족이 공개한 의과대학 법의학 전문가의 감정서는 횡문근융해증을 윤 일병의 사인으로 지목했다. 정확히 10년의 시차를 두고 등장한 횡문근융해증. 누군가에게 그 시간은 짧았다. 분노와 슬픔을 몸에 간직한 채 인권운동가로 살아온 유가족이 보기에 이번 사건은 되풀이되는 구조적 문제다. 하지만 12사단 훈련병을 죽음으로 몰고 간 중대장의 성별을 사건의 원인처럼 여기는 이들이 있다. 사망의 원인을 고인의 체력 탓으로 돌리는 이들도 있다. 그들은 10년 전을 기억하지 못한다. 윤 일병 이후에도 군에서는 여전히 사람들이 죽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들은 이 ‘구조적 죽음’을 잊은 채 누군가를 손쉽게 비난하는 데 열을 올린다. 마치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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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또 다른 5월과 팔레스타인 “옛날에 사격장은 유일하게 구타가 허용되는 곳이었다.” 갓 입소한 훈련병이라면 지금도 접하게 되는 풍문이다. 첫 사격훈련을 위해 총을 쥐고 제 차례를 기다리는 훈련병들에게 그 풍문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혹시 무언가 일이 잘못돼 누군가가 다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훈련병들을 휘감아 잔뜩 긴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사격의 경험은 허탈할 만큼 별것 없었다. 한번 쏴보면 마치 신기루처럼 긴장이 사라지고, 이내 사격은 일상적인 군 생활의 일부가 된다. 습하고 무더운 여름날의 훈련소에서,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향해 쏘는 것도 처음이 힘들 뿐 익숙해지지 않을까. 남자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인간이 폭력에 길들여지는 걸 보았다. 등교 첫날부터 휘둘러진 ‘빠따’ 소리. 공기를 가르며 몸에 착 달라붙는 소리에 다들 질겁했지만, 한 달이 지나자 엉덩이의 피멍은 보통의 일상이 됐고, 인간이 폭력과 친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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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시혜와 비난을 넘어 제22대 총선이 마무리되었다. 성적표를 보면 정권심판론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여소야대 국면이 이어지게 됐다. 혜성처럼 등장한 조국혁신당과 당을 박차고 나가 생존한 개혁신당도 주목할 만하다. 정작 그 와중에 녹색정의당은 국회에서 퇴장하게 됐다. 3%의 벽을 넘지 못해 의석을 잃었고, 심상정 의원은 은퇴를 선언하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 광경 앞에서 문득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울산 출신인 나는 “권영길이 뽑으소, 영 아이다 싶으면 노무현이도 괜찮고”라는 말로 2002년 대선을 기억한다. 동네 사람들에게 권영길을 뽑아달라 당부하는 노조 아저씨들이 있었고, 노무현의 이름도 가끔 호의적으로 언급됐다. 당시 나는 권영길을 뽑으라면서 왜 그를 “영 아이다 싶은”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건지, 그리고 당이 다른데 왜 노무현도 “괜찮다”고 말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후 조금 더 자랐을 무렵,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의 차이를 ‘한강과 실개천’으로 비유하는 걸 보고 아리송하기도 했다. 그런 기억을 품고 스무 살이 된 2008년의 나는 당시 진보신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해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3%의 벽 앞에 가로막혔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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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고귀함을 알아볼 의무 어느덧 세월호 참사 10주기다. 당시의 “미안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그리 곱게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나도 ‘어른’이 되어버렸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의 모순들이 응축되어 벌어진 일이었고, “미안하다”는 고백은 분명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것에 대한 간절한 반성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 우리 공동체는 과연 더 나은 곳에 도착했을까. 단언컨대 한국 사회는 그 마음에 값하지 못했다. 사회가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 찾아온 건 적나라한 각자도생과 혐오의 세상이다. 그러나 무에서 유가 나오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는 이 사회가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곳이라는 걸 모두에게 재차 확인해 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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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 왕이나 독재자는 자그마한 불평도 크게 처벌했는지 아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우물쭈물하며 답하지 못하는 사이에 “두려워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시의 나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랬던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면서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강의실에 서면 나는 아닌 척하면서 늘 학생들의 눈치를 본다. 졸거나 딴짓을 하지 않는지 그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간다. 그 모습을 보며 내 강의가 지루하거나 재미가 없는 건가 가늠해보고, 딴짓을 하는 모습에 나를 무시하거나 얕잡아 보는 건 아닐지 걱정을 한다. 보통은 약자인 학생이 강사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짐짓 아닌 체할 뿐 나 역시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불안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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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민폐’, 주어는 누구인가? 내 친구의 10년 전 사연이다. 한창 연애 중이던 이성애 커플이었는데, 어느덧 남성이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으로 병사가 사망하고 박정훈 대령을 향한 부당한 재판이 이뤄지는 게 군대다. 여성은 애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군인이 된 애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다 찾은 방법은 군인권센터의 후원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병사마저도 언제든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신은 대한민국이 국민을 상대로 저질러 온 폭력의 현대사를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과거 이와 관련된 말 중 하나는 ‘민폐(民弊)’였다. 조선시대에도 쓰인 민폐란 단어는,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바탕으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특혜를 추구하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를 일컫는 데 쓰였다. 오늘날의 민폐가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끼치는 폐를 의미한다면, 과거엔 관이 시민에게 폐를 끼치는 걸 지칭할 때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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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의 의무 해가 바뀌고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는 1월이다. 사람들은 신년 달력을 구매하며 목표와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올해 1월은 이상하게도 들뜨기보다는 가라앉는다. 새해 벽두부터 쏟아진 뉴스들마저 온통 부정적인 것들이라, 갈수록 세상이 더 나빠질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을 앗아가 버린 탓이다.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가져볼 만한 소식들은 드문데 세상은 거꾸로 퇴행하는 요즘이다. 비단 윤석열 정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예의가 사라지고 더 약한 이를 향한 혐오는 더 거세져 간다.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믿지 못하고 돕지 않는다. 사회는 무너져가는데 기후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소식들은 미래마저 비관하게 만든다. 정치마저 제 역할을 손에 놓은 지 오래다.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길을 잃은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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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외국인 유학생은 돈이 된다? 11월27일 한신대학교는 자교의 한국어학당에 다니던 우즈베키스탄 국적 어학연수생 22명을 ‘외국인등록증 수령을 위해 출입국관리소에 가야 한다’며 버스에 태운 다음, 이대로 ‘출입국관리소에 가게 되면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설명한 뒤 그들을 강제출국시켰다. 연수생들은 기숙사의 짐도 챙기지 못한 채 경호원들의 통제 속에 인천공항으로 가 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에 탑승한 것이다. 지난 12일 한겨레 보도 이후 논란이 되자 경찰은 수사에 나섰고 국가인권위도 진정을 접수해 조사에 착수했다. 한신대학교 총장은 15일 담화문을 통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사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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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읽기 기억상실과 평화의 논리 현재의 사실에서 출발하자. 유엔 인도주의업무조정국은 지난 22일 팔레스타인 사망자를 약 1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사망자 중 열에 일곱은 어린이, 여성, 노인들이다. 물론 이 숫자는 정확하지 않으며 사상자는 더욱 많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삶의 터전을 파괴당하고 기본적인 의료적 조치와 생필품 공급을 받지 못하는 이들은 160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것을 학살이라고 하는 건 그야말로 ‘팩트’다. 안타깝게도 누군가는 이런 사실의 나열마저 거부한다. 하마스의 공격에 대한 정당한 대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팔레스타인인 사망자가 이스라엘인 사망자의 10배를 넘는다는 점에서 이미 이스라엘의 대응은 정당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아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현재 벌어지는 학살을 설명할 ‘서사의 기점’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다. 누군가에게 서사의 시작은 10월7일 하마스의 공격이다. 그 서사는 이스라엘을 정당한 피해자로만 본다. 하지만 다른 서사도 있다. 지금의 사태를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에서 시작된 팔레스타인의 식민지배 문제로 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