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폐’, 주어는 누구인가?

최성용 사회연구자

내 친구의 10년 전 사연이다. 한창 연애 중이던 이성애 커플이었는데, 어느덧 남성이 군 입대를 하게 되었다. 지금도 호우 피해 실종자 수색으로 병사가 사망하고 박정훈 대령을 향한 부당한 재판이 이뤄지는 게 군대다. 여성은 애인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군인이 된 애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그러다 찾은 방법은 군인권센터의 후원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국가를 위해 복무하는 병사마저도 언제든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신은 대한민국이 국민을 상대로 저질러 온 폭력의 현대사를 볼 때 충분히 납득 가능한 것이다. 과거 이와 관련된 말 중 하나는 ‘민폐(民弊)’였다. 조선시대에도 쓰인 민폐란 단어는, 민주국가 대한민국에서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바탕으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특혜를 추구하며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경우를 일컫는 데 쓰였다. 오늘날의 민폐가 시민이 다른 시민에게 끼치는 폐를 의미한다면, 과거엔 관이 시민에게 폐를 끼치는 걸 지칭할 때 사용했다.

언론 기사를 검토해 보면 민폐의 용법이 뒤바뀐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80~1990년대에 사회적 약자(부랑인, 장애인)나 사회운동(대학생의 농활, 노조 파업)에 대해 민폐를 끼친다는 언급이 있지만 이는 극히 소수의 사례다. 이 소수의 사례에 깃든 용법은 점차 확장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2000년대 들어 직장이나 공동체에 폐를 끼치는 이기적 행동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점차 넓어진다. 다만 이 시기까지도 민폐를 끼치는 주체로 언급된 건 대부분 정치인과 공무원이다. 2010년대에 본격적으로 민폐라는 단어의 사용 빈도가 급증한다. 민폐의 주어로 여성이나 청년이 등장하고 ‘비매너’ 일반을 통칭하는 말로 확장되면서 지금의 용법에 가까워진다.

이렇듯 민폐의 주어가 관에서 민으로 뒤집히는 과정은 사회문제의 원인을 국가라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와 사회운동으로 돌리는 시대적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정치권의 언어는 이런 책임 뒤집기의 거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한동훈 비대위원장과 국민의힘은 아마추어에 민폐를 끼치는 ‘86 운동권’을 청산하자는 말을 연일 쏟아내는 중이다. 이합집산 중인 소위 제3지대 정치인들도 동일한 언어를 되풀이하고 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앞뒤가 안 맞다. 윤석열 정부의 고위직에 포진한 과거 뉴라이트 인사들 역시 운동권 출신이 적지 않지만, 누구도 현 정부를 운동권 정부라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민주당 정치인 중 일부가 30년 전 운동권이었을 뿐이다. 현재 이들을 지칭할 정확한 말은 운동권이 아닌 ‘정치권’이다. 사실 과거 민주당 인사들 역시 선거철마다 정의당을 두고 아마추어에 합리적이지 못한 운동권 정당이라고 비난했고, 정의당 역시 운동권 정당을 탈피해 책임정치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려왔다. 정치권 모두가 운동권이라는 말에 달라붙은 부정적 어감을 공유하며 서로를 비난하는 데 사용해온 것이다.

그럼 모두가 비난하는 운동권의 실체는 무엇일까. ‘나는 쟤와 달라’라는 말은 타자화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쟤’에게 비합리적, 감정적, 아마추어적이라는 이미지를 덧씌우면서, 그것을 비난하는 ‘나’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가진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걸 타자화라 한다. 이때 ‘나와 쟤’의 이미지는 실체와 무관하다. 실체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 보이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민폐의 주어는 정치권에서 운동권으로 뒤바뀐다.

요즘 제3지대 정당들이 퇴행적인 군 공약을 던지고 있다. 민폐라는 단어의 용법이 뒤집히듯 국가의 무책임이 여성의 문제로 뒤바뀐다. 그러나 정작 부당한 일을 걱정하거나 당한 시민들 곁을 지키는 건 책임전가하는 정치권이 아니다. 첫 문단의 사연처럼, 정치권 전체가 작은 시민단체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

최성용 사회연구자

최성용 사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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