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스님
중앙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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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갈등, 화쟁으로 해결하세요 달마산에도 차밭이 있다는 말을 듣고 부리나케 산길로 들어섰다. 20년 전쯤 마을의 청년이 차나무를 심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숲을 헤치며 찾고 보니 차밭이라기보다 차라리 칡덩굴 밭이었다. 3000평쯤의 산자락에 차 씨를 심었는데 칡이랑 뒤섞여 자라다보니 차나무는 마치 무덤처럼 칡덩굴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칡덩굴 제거작업을 했는데 중장비로도 쉽지가 않았다. 그러나 어쩌랴. 향기로운 차 한 잔을 얻으려면 칡뿌리를 뽑아낼 수밖에. 이렇게 세 해쯤 정성을 기울이니 제법 차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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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날마다 좋은 날 가을비 지나간 숲길에 낙엽이 수북하다. 푹신한 감촉을 느끼며 한발 한발 기분 좋게 걷는다. 나뭇가지에 매달려 흔들리는 단풍잎을 보면서 ‘예쁘다, 예쁘다’ 몇 번이고 웅얼거렸다. 문득 마음 깊은 곳에서 ‘체로금풍(體露金風)’이라는 울림이 떠오른다. 공부하는 이라면 가을에 한 번쯤 들어보았을, 책상 앞에 놓고 새겨볼 좋은 글귀이다. 스승과 제자가 가을 숲길을 걷다가 묻고 답한다. “나무가 마르고 잎이 떨어질 땐 어찌합니까?” “가을바람에 온몸이 드러났다(體露金風).” 숲길에서 옛 선사들의 문답을 떠올리는 건 수행자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언제나 마음을 근본 뿌리에 두기 때문이다. 이는 현상을 보면서 과거와 비교하거나 미래를 기대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마음이 살아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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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이 가을에 무엇을 할까 김포엔 스님들만 다니는 대학이 있다. 공항 인근이라 비행기 지나는 소리가 들리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고 높다란 가을 하늘이 공활하다. 오랜 시간 발길이 닿지 않은 운동장은 풀들로 무성하고, 온갖 풀들은 씨알을 잔뜩 머금었다. 아무래도 내년에는 풀이 잔디처럼 빼곡할 것이다. 수행관에서는 사미스님들이 새벽부터 예불하고, 공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면서 몸과 마음의 청정을 유지하려 애쓴다. 출가자 특유의 걸림 없는 말이며, 꾸밈없는 얼굴, 산을 뛰어다니듯 활발한 모습들이 아름답다. 이런 광경들을 보노라니 문득 언젠가 도반 스님이 불러주었던 노래가 떠오른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은 아무도 먼저 가지 않은 길/ 지금 당신이 걷는 그 길은 아무도 먼저 걷지 않은 길/ 저마다 길이 없는 곳에 태어나/ 동천 햇살따라 서천 노을따라/ 길 하나 만들며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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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무한경쟁 하지 말고 무한향상 하세요 한 선사가 좌선하고 있는 제자에게 물었다.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마음을 보고 있습니다.” “보는 것은 누구이고, 마음은 어떤 물건인가?” 마음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행동과 감정들을 잘 조절할 수가 있다. 눈으로 보고 욕심을 일으키는 행동들을 자세히 살필 줄 알면 그로 인한 충동구매나 식욕, 성욕 등에 대한 생각은 줄어들고 생활은 간결·담백해진다. 나를 무시하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 그 감정을 정확하게 볼 줄 알면 곧바로 평정심을 찾을 수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고 있는 마음의 작용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든 바르게 판단하는 지혜가 생겨날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보는 방법을 옛사람들은 관법(觀法)이라 했고, 요즈음에는 명상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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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하루 중 걱정 없는 시간을 만들어라 비 온 뒤, 아침 하늘이라 맑고 푸르다. 뭉게구름이 하얀 솜털처럼 곱고 한라산과 둥근 오름들이 손에 닿을 듯이 가깝다. ‘아! 이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를 인류가 언제부터 누렸으며 언제까지 누릴 수 있을까.’ 과학적으로 살펴보면 45억년 지구의 역사 속에서 이렇게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를 만나는 기간도 그리 많지 않았다. 20억년 전 대기 중에는 산소가 1% 정도였고, 그때부터 계속 산소가 증가해서 현재 지구의 공기는 21%의 산소, 78%의 질소, 그리고 0.036%의 이산화탄소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현생인류는 약 20만년 전에 시작된 호모사피엔스가 빙하기를 거쳐 2만년 전 최종빙기 극성기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수많은 시간 속에서 온갖 환경적 고난들을 극복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웠을 것이다. 거기에 인간들의 끝없는 대립갈등과 약육강식의 전쟁역사는 어리석은 반복이었다. 인류가 아름답고 행복한 정신적 삶의 깊이를 향유하던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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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고요한 마음 바라보기 ‘코로나19 방역 4단계로 인하여 취소합니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여름 내내 바쁘게 지낼 뻔했다. 사람들이 마음을 쉴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또다시 준비하고 조금은 무리하게 일정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계획을 세웠다 해도 지금은 모두의 안녕을 위하여 멈추어야 한다. 그 덕분에 고요한 시간이 늘었다. 예년에 비해 이번 여름은 ‘열돔현상’ 등으로 숨이 막힐 만큼 무덥다고 한다. 인연 닿는 분들에게 부채를 선물해볼까 하는 생각이 문득 일어, 내친김에 오래전부터 거래해온 서울 인사동 사거리의 한 지업사에 부채를 주문했다. ‘진공묘유(眞空妙有), 고요한 마음에서 지혜가 나옵니다’라는, 부채에 쓸 글귀까지 일사천리로 정했다. 코로나19 거리 두기 4단계의 답답함을, 한 생각 돌려서 ‘다시 멈추고 고요하게 마음을 바라보는’ 좋은 기회로 삼아달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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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면 내 마음속으로 들어가자 지난해부터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했거나 외국에서 입국한 사람들은 누구나 2주 동안 자가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 자의적인 것과 타의적인 것에는 차이가 있다. 타의적인 것은 자칫 몸에 난 상처처럼 마음에 트라우마가 형성되기 쉽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긴급재난 비용이나 기본소득 비용보다 사회적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든다. 주변에 14일 동안의 자가격리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하면 그 시간을 마음공부하는 수행의 시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할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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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오래 살기를 바라는가!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에는 비가 잦다. 이 시기의 비는 여름을 재촉하는 비라서 맵다. 바다 가까이 살다보면 비 오기 전에 바람이 먼저 오는 것도 알게 된다. 어느 때 오랜만에 만난 선배 스님과 늦은 밤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서야 설핏 잠을 청했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비바람 소리에 벌떡 일어나 혼잣말로 “숲속에 산새들은 안녕한가! 지금쯤이면 한창 알에서 나온 작은 새들이 위태로운 새집에 매달려 전전긍긍할 터인데…”라고 읊조리니, 선배 스님이 “산에 오래 살다보니 숲에 있는 동물들까지 식구로 걱정하는군” 하며 웃는다. 사람의 집은 수백년 여러 세대가 살 수 있게 튼튼하게 짓지만, 새들은 한철만을 위해 얼기설기 허술하게 집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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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세한 속의 비약 해차가 화개, 보성, 해남으로부터 봄 길 따라 차례로 도착했다.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세 곳에서 보내온 차 모두가 향긋하고 달다. 지난해 봄 해남의 달마산 부도전 아래 20여년 방치된 차밭을 발견하고는 보물을 찾은 듯 기뻐했다. 올봄 그 차밭과 만나지 못해 몹시 아쉬웠는데 고맙게도 차를 만들어 보내온 것이다. 맛이 깊고 청정했다. 오래된 절집에는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곳이 있다. 부도전이 그런 곳이다. 대개 산사의 초입이나 양지바른 곳에 자리해 있다. 제자들이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을 모아, 그 시대 최고의 장인들에게 맡겨 석조물을 조각하고, 수행의 상징인 사리를 안치하고, 행적을 적은 비를 세운 곳이다. 스님들의 무덤 같은 곳인데 나는 그 자리에 서면 어려운 생각들을 뛰어넘고 비약하는 마음을 얻곤 한다. 일반인들의 죽음과 수행자들의 평화로움이 함께 떠오르는 것이다. 지금의 삶에서 평화롭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다. 그러나 동쪽을 원하면서 서쪽을 향해 걷는다면 원하는 삶을 살지도 못하고 죽음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막다른 길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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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슬픔은 DNA처럼 그 사회에 유전된다 제주도의 베리오름(별도봉)에 왕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오늘 비바람에 후드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벚꽃은 향기가 없는 줄 알았는데 왕벚꽃은 향기가 진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땅끝마을 해남에서 30년을 살다가 바다 건너 제주섬에 들어온 지 두 달 가까이 되었습니다. 새롭게 정착한 곳이 공교롭게도 해남에서 농사지은 쌀을 실은 배가 닻을 내리던 화북(禾北)입니다. 화북천을 사이하고 절과 베리오름이 서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벚꽃 필 무렵부터 매일 향기를 따라 화북천의 개울을 건너갑니다. 개울가에 노란 유채꽃들과 보랏빛 무꽃들도 피어 있습니다. 봄꽃길 따라 이끌리듯 베리오름을 휘돌아 가면 잃어버린 마을 곤흘동이 나옵니다. 집도 사람도 없는 돌담장과 아이들 웃음소리도 없는 올레길들 사이에 제비꽃, 광대나물, 방가지똥 꽃들만이 반깁니다. 돌담길 사이를 도량석 하듯 반야심경을 읊조리며 한 발 한 발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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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우리는 서로의 스승입니다 예전 스님들은 겨울 동안거 공부 기간을 마치면 철새들처럼 여름 하안거 때 살 곳을 찾아 이동을 합니다.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마을사람들을 만나 여러 근심걱정도 들어주고, 가족들이나 마을의 크고 작은 일들을 상담하고 지혜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특출한 아이를 만나면 다음 세대의 스승을 만들기 위해 부모의 허락을 받고 산으로 데려가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어릴 적 시골집에 한 스님이 찾아와 탁발하고 가면서 제 부모님께 한마디 툭 던지고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몇 해 전 큰스님이 돌아가셨는데 이 아이 하는 행동이 똑같습니다.” 귓등으로 들은 한마디가 내 삶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오랫동안의 울림이었습니다. 절집에 와서 보니 나와 같이 탁발승들에게 세속수명이 짧다거나 하는 말을 듣고 어린 나이에 입산한 스님이 몇 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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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와 성찰 아름다운 회향 새벽예불을 나서는데 달빛을 받은 기와지붕 위에 소복이 내린 하얀 눈이 반짝입니다. 밤하늘에는 별들이 가득합니다. 눈 내리는 날 하늘은 푸른 바다처럼 깊고도 별이 더 초롱하다는 것을 가슴 시리도록 좋아했습니다. 마당에도 마치 별들이 밤사이 내려온 듯합니다. 이제 하룻밤만 더 자면 30년을 가꾸어 온 미황사를 떠나 또 다른 수행처를 찾아 걸어가야 합니다. 함께했던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사실 나는 새로운 희망의 일들을 생각하며 움직이고 있는데 사람들은 벌써 과거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까맣게 잊은 이야기들이 문득문득 찾아온 이들의 말에서 튀어나올 때는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인생을 마치는 이별을 하듯 천천히 그 마음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10년 전 법정 스님이 병실에서 가까운 이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초대하여 눈빛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던 고마운 마음을 나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회향을 할 때는 그 모습을 잊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것이 오늘 내가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