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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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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나라를 거덜 내는 뻔뻔한 헌법 모독 12·3 내란 사태가 엉뚱하게 장기화되고 있다.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내란이 묻지마 옹호세력을 집결시키면서 심리적 내전 수준으로 번질 조짐이다. 전 세계가 생중계로 목도한 현실마저 부정하고 ‘대안적 사실’이라는 허구가 만들어내는 황당한 궤변을 내세워 나라를 거덜 내고 있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대중을 현혹하는 법리논쟁을 결합시켜 애당초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사안을 정쟁으로 만들거나 사법절차를 통해 논박되어야 할 사항을 공권력을 부정하는 정치선동으로 둔갑시키길 서슴지 않는다. 탄핵심판에서 내란행위를 헌법위반 문제로 한정하는 과정을 정쟁화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탄핵심판이 형사소송과 구별되는 징계절차임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탄핵심판에서는 직무집행이 헌법과 법률에 중대하게 위배되는지만 심판하면 된다. 형사책임을 묻는 절차는 헌재의 관할이 아니며 별도로 형사법정에서 다툴 일이다. 국회의 소추사실을 바탕으로 탄핵심판의 대상을 헌재의 관할에 맞게 정리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이 과정은 그동안의 탄핵결정에서 확고히 확립된 바 있다. “소추사유를 판단할 때 국회의 소추의결서에서 분류된 소추사유의 체계에 구속되지 않으므로, 소추사유를 어떤 연관관계에서 법적으로 고려할 것인가 하는 것”, 즉, 내란죄와 관련한 ‘소추사유’를 형법의 관점이 아니라 헌법의 관점에서 ‘탄핵사유’가 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전적으로 헌재의 판단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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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탄핵 골든타임, 섣부른 개헌론을 경계함 자유를 내세웠지만 내심으론 독재자를 꿈꾸던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소추되었다. 위대한 대한국민들이 저항권을 성공적으로 행사한 결실이다. 헌정의 중대 고비마다 민주화를 직접 쟁취해온 국민이 거둔 또 한 번의 승리다. 군과 경찰의 봉쇄시도에도 계엄해제의 고삐를 당겨 국민대표의 역할을 제대로 해낸 국회도 칭찬해야 마땅하다. 아직도 내란죄 피의자의 손을 놓지 못하고 내란 방조의 굴레를 자임하고 있는 국민의힘 다수 국회의원들을 제외하고. 이번 사태를 대통령제 탓으로 돌리려는 시각이 있다.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가 내란의 현실을 회피하면서 개헌론을 꺼내든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내란혐의자들에 대한 조사와 책임추궁에 집중해야 할 중대한 ‘헌법의 순간’에 섣부른 개헌론은 경계해야 마땅하다. 어설픈 권력구조 개헌론으로 헌정회복의 골든타임을 결정적으로 지체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의 근본원인을 정확히 진단하고 인과관계를 충분히 따져서 개헌을 비롯해 미래를 향한 대응을 모색하는 것이 순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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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트럼프가 돌아왔다. 더 극적이고, 더 강력하게. 트럼프 2기의 막무가내를 어떻게 견제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경험하지 못한 제왕적 대통령의 출현에 대한 우려가 팽배하다. 이런 우려를 우리나라의 정치문화에 대입해 보면 어떤 시사점을 얻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였다면, 틀림없이 개헌론이 먼저 등장하지 않았을까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받아들이기 힘든 선거 결과를 두고 대통령제 자체를 탓하지 않았을까? 세상에 완전무결한 제도는 없다는 명백한 진실은 200년이 넘는 낡은 제도를 탓하는 선동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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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정위기의 불편한 진실 한국형 민주공화제가 시나브로 국정공백 사태까지 초래할 정도로 퇴행하고 있다. 헌재, 인권위, 방통위 등 인권보장과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주요 국가기관이 기능정지 혹은 축소의 늪에 빠지고 있다. 법원마저 형사사건의 외피를 쓴 정치적 사건들 때문에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악순환의 소용돌이를 맞고 있다. 87년 민주화 40주년을 목전에 두고 한국형 민주공화제가 전례 없는 최대 위기에 빠진 듯하다. 우선 민주화의 든든한 뒷배로 자리매김했던 헌재가 기능부전 상태에 빠졌다. 9인 합의제 기관인데 퇴임한 재판관 3인의 후임선출이 지체되고 있어서다. 법률의 위헌결정, 탄핵결정, 공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를 확인하는 헌법소원 인용결정 등 헌재의 핵심적 결정은 재판관 6인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하는데 6인 재판부에서 1명이라도 이탈하게 되면 종국심리에 참여한 절대다수 의견에도 불구하고 헌법수호를 위한 결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궐석된 재판관 3인 전원의 의견이 모두 위헌상태를 옹호하는 의견으로 간주되어 버리는 꼴이다. 이처럼 사실상 헌법재판의 정지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입헌주의 헌정의 위기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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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국무총리의 존재이유 국무총리는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관건이 되는 헌법기관이다. 총리는 대통령의 보좌기관이면서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각부를 통할하고 국정 최고심의기관인 국무회의의 부의장을 맡는 정부의 2인자이다. 장관으로 불리는 행정각부의 장을 맡기 위한 자격요건이 되는 국무위원의 임명을 제청하거나 그 해임을 건의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행정권 2인자의 지위를 확인할 수 있다. 군사사항을 포함하여 대통령의 국법상 행위도 총리의 부서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막중한 지위의 총리는 대통령이 혼자서 임명할 수 없다. 반드시 국민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정부 2인자의 임명에 국회 동의라는 족쇄를 채운 것은 대통령제의 구조적 문제점인 행정독재의 위험과 의회와 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를 해소하려는 한국형 민주공화제의 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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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법관의 ‘헌법적 역할’ 정치가 없다는 세간의 한탄 속에 정치적 파급효과가 적지 않은 사법 결정들이 아쉬운 대로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 지난번 칼럼에서 재구성해보았던 ‘방통위 사태’는 행정법원에서 방문진 이사 임명처분에 대한 효력정지 결정이 내려졌다. 윤석열 대통령의 자의적 인사권 행사로 초래된 방통위 2인 체제에서의 처분이 위법의 합리적 의심을 받은 결과다. ‘비정상적’ 공권력 행사가 확인됨으로써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방송장악’을 도모하려는 대통령의 무도한 구상에 제동이 걸린 셈이다. 하급법원이 ‘일개’ 단체의 임원 선임에 대해 내린 잠정적 결정이지만 방송을 둘러싼 정치권력의 충돌 상황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헌법적 의미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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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방통위 사태의 재구성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는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사실상 무법천지로 전락하였다. 방통위원장 국무회의 배제를 시작으로 장기간의 표적 감사와 수사가 이어지는 한편 위원장과 위원의 해임과 임명이 오로지 대통령의 자의적 인사권 행사로 점철되면서 헌법과 법률에 따른 정상적 조직 구성을 갖춘 적이 없다. 방통위원 정원이 자의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위원장 대행체제나 2인 체제라는 위법적 조건에서 YTN의 민영화나 KBS·MBC의 지배구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처분이 적법절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속도전 치르듯 이루어져 왔다. 현재는 세 번째 임명된 이진숙 위원장이 국회의 탄핵소추를 받아 권한행사가 중지된 2인체제이며, 이 사태를 제도적으로 개선할 방통위법 개정안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표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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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민주공화적 대통령제 다시 보기 윤석열 대통령이 채 상병 특검법을 또다시 거부했다. 총선 패배에도 대통령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 듯하다. 그러나 이는 대통령과 맹목적 지지자들의 정신승리에 불과하다. 민의에 따른 국회의 결정을 거부만 할 뿐 그 어떤 국정과제도 주도하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무슨 미래가 있는가? 윤 대통령이 당과 한 몸임을 강변하는 여당의 당대표 선거는 자중지란 그 자체다. 국정 비전은 아랑곳없이 저급한 편가르기만 한창이다. 이런 형국에선 누가 대표가 되건 대통령의 시간은 고장난 시계처럼 헛돌 뿐이다. 그렇다고 연임이 확실시되는 야당 대표의 ‘사법리스크’가 대통령의 시간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설령 그런 공작이 성공하더라도 상처투성이인 대통령에게 여건 야건 미래권력의 후보자들이 틈새를 내어줄 리 없다. 야당은 채 상병 특검법이 거부된 바로 그날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 청문회 개최를 공식화했다. 더불어서 본인의 의중은 아랑곳없이 벌써부터 포스트 윤석열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가 난무한다. 제2의 6·29선언이나 정치개혁을 전제로 한 대통령 임기단축 개헌론에서부터 불기소특권론까지 상상력이 한껏 동원된 정치술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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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법이 명령하는 노사상생 급기야 ‘산유국의 꿈’이 졸속적인 청와대 이전이나 참담했던 부산엑스포 유치운동, 혹은 근래의 ‘중국산 직구금지’ 파동을 연상시키며 국정브리핑에 등장했다. 산유국 시나리오가 등장한 만큼 채 상병 특검이나 김건희 여사 특검 등 ‘살아 있는 권력’의 실정과 부패에 대한 전 국민적 우려에 가려진 경제정책 기조에 대해서도 비판적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윤석열 정부의 경제정책은 법인세·상속세 완화, 종부세·금투세 폐지, 건전재정에의 집착 등으로 상징되는데 이미 퇴조한 신자유주의에 경도된 것이다. 특히 ‘경제선진화’를 내세우고 노동개혁을 국정과제로 설정하면서 노조를 악마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추진하고 있는데 민주복지국가를 지향하는 우리 헌법의 기본정신에 부합하지 않아 안타깝다. 윤 대통령의 ‘인생책’으로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가 언급된 것처럼 그 특유의 자유시장경제론의 기조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압도적이라 더욱 답답하다. 더구나 대통령의 전시성 행보에 재계의 유력자들이 동행하는 일이 잦은 것으로 미루어 경제계 또한 윤석열 정부와 밀월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비쳐 우려된다. 길어야 3년인 정권과 기업이 공동운명체로 비친다면 기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국민경제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 암담하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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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3년은 너무 짧다 “3년은 너무 길다.” 지난 총선 판도를 바꾼 조국혁신당의 선거구호다. 너무 길어 보이는 3년은 윤석열 대통령의 남은 임기다. 이 구호 덕분에 조국혁신당은 창당 두 달도 못 되어 12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고, 대통령 탄핵과 개헌저지선에 겨우 8석이 모자란 압도적 여소야대 국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대통령 심판 선거로 치러진 탓이다. 이제 국회와의 협치를 전제로 하는 한국형 대통령제의 본질상 ‘분점정부’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주권자 국민의 심판을 받았음이 분명한 윤 대통령은 심판의 내용에 있어 남다른 해석을 내놓은 듯하다. 국정기조는 옳은데 국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므로 무지한 국민을 깨우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단다. 대통령의 참모들을 총선에서 떨어진 심복들로 다시 채운 것도 모자라 민심을 청취하겠다며 민정수석직을 부활해서 검찰의 인사기획통을 모셨다. 이후 전격 단행한 검찰의 인사는 ‘친윤’ 친위대를 전면에 내세우고 수사에도 성역이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묻지마지지’를 보내던 이른바 보수언론마저도 비판하는 안하무인의 불통 기조가 계속되고 있다. 2년이나 걸린 야당대표와의 회담이나 기자회견, 선거개입 논란을 빚다 중단된 민생토론회의 속개도 ‘무늬만 소통’인 ‘마이 웨이’의 복사판이다. 그 결과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도는 비슷한 시기 역대 최저치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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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헌법대로 합시다 총선이 여당의 역대급 참패로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두 번씩이나 당대표 교체를 주도하면서 당정일치를 관철하여왔기에 이번 총선은 집권여당과 정치적 운명공동체인 대통령에 대한 준엄한 심판이기도 하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제왕적 행태로 초래된 민주주의의 퇴행을 정부형태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시대의 유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는 헌법 무시의 관성에 터잡은 것으로 교정되어야 한다. 6월항쟁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현행 헌법은 유신·5공헌법이 채택한 제왕적 대통령제를 버리고 민주공화적 대통령제를 새로이 수립한 것임을 제대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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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칼럼 이제 ‘제 발등 찍기 정치’를 끝내자 다시 선거철이 돌아왔다. 국민의 대표랍시고 지난 4년간 목소리를 높이던 분들이 바로 그 국민들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시간이 돌아온 것이다. 황송하게도 폴더 인사를 받으면서 주권자 대접을 받는 듯 살짝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문득 뒤따르는 의문. 주권자 국민과 봉사자 국민대표가 선거철만 지나고 나면 왜 명령하는 국민대표와 복종하는 국민의 관계로 전도되어 버릴까?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의 대원칙은 일상정치에서 왜 법전 속의 장식으로 전락하고 마는가? 이번 총선부터라도 국민과 국민대표의 주객이 전도되는 반민주적 현실, ‘제 발등 찍기 정치’가 왜 매번 반복되는지 제대로 성찰하는 계기로 만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