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과거로부터 온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노인들이라고 해서 너무 얕보지 말고, 잘못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동냥해서 (주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이 아니지.” 94세인 양금덕 할머니의 담담하지만 단호한 선언이다. 미쓰비시중공업으로 강제동원돼 17개월 동안 일하고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이후에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었느냐는 의혹의 눈길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이의 말이기에 심상하게 들을 수 없다. 정부는 한·일관계의 미래를 위해 제3자 변제를 통해 강제동원 배상 문제를 풀겠다고 했다. 당사자들은 그런 돈이라면 한 푼도 받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분들에게 중요한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인정과 사죄다.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피해자들의 아픔은 세월이 지났다고 수그러들지 않는다. 엄연히 있었던 사건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화시키려는 이들로 인해 그들의 아픔은 더욱 생생해지고 있다.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만 해도 기가 막힌데, 그들 편이 되어주어야 할 정부가 오히려 그들을 역사 발전의 장애물로 여기고 있는 것 같기에 더욱 서럽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부당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 이를 데 없다. 썩은 토대 위에 새로운 집을 지을 수는 없다. 과거는 무질러버린다고 하여 사라지지 않는다. 베트남 전쟁에 동원되었던 어떤 분은 자신을 나름대로 이성적이고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그들을 가리켜 ‘더러운 전쟁’에 동원된 용병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보면 살의가 느껴진다고 고백했다. 자기들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것 같다는 말일 것이다.

성경은 위대한 인물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감추지 않는다. 사람들이 믿음의 본으로 인정하는 이들의 허물과 잘못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음의 조상으로 여기는 아브라함은 어여쁜 아내 때문에 생긴 위험에서 벗어나려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다. 출애굽 사건의 주역 모세는 격분에 못 이겨 애굽 사람을 때려 죽였다. 다윗 임금은 충실한 부하의 아내를 겁탈한 후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 부하를 사지에 몰아넣었다.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세 번씩이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다. 성경은 어떤 인간도 이상화하지 않는다. 자기 속에 있는 한계와 모순을 자각하는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거나 배제할 수 없다.

창녀에게서 태어난 길르앗 사람 입다는 본처의 자식들에게 쫓겨나 세상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쫓겨난다는 것, 그것은 설 땅을 잃었다는 것이고 또한 취약해졌다는 뜻이다. 그의 주변으로 동류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어느 날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자 길르앗 장로들은 입다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들의 지휘관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입다는 울분을 속으로 삼킨 채 그들의 요구에 응해 암몬과의 싸움에 나선다.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신 앞에 서원을 한다. 승리를 거두게 도와주신다면, 자기 집 문에서 맨 먼저 맞으러 나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입다는 그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었고 기쁜 마음으로 귀향했다. 그런데 그를 맞이하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온 이는 외동딸이었다. 가슴이 무너져 망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를 보며 딸은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러곤 아버지에게 두 달만 말미로 달라고 청한다. 처녀로 죽는 몸, 친구들과 함께 산으로 가서 실컷 울고 싶다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 사건의 결말을 생략하는 대신 이스라엘 여인들이 매년 산으로 들어가 희생된 여인을 애도하며 나흘 동안 슬피 우는 관습이 생겼다고 전한다. 이 관습은 억울하게 죽어간 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다시는 그런 폭력적 사태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발터 베냐민은 ‘역사철학테제’에서 승리자의 마음에 빙의된 사람들의 폭력성을 지적한다. 그는 지배자 중심의 사고는 억눌린 자들을 양산하게 마련이라면서, 역사 속에서 ‘비상사태’가 예외적 일이 아니라 상례가 된 까닭은 그 때문이라고 말한다. 억울한 이들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원한을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희망의 뿌리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이 꿈꾸었지만 실현하지 못했던 일들을 이루는 것이야말로 그들을 역사 속에 정초하는 일이다. 청산되어야 할 과거를 묻어버린다고 과거의 악행이 사라지지 않는다. 신원되지 않은 한은 거듭거듭 현재 속에 모습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민담에 자주 등장하는 원혼들의 이야기는 바로 그런 진실을 암시한다. 역사의 봄은 요원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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