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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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연심 페미니스트 시어머니의 번뇌와 해방일지 모든 결혼에는 흰 장갑을 낀 제국주의가 들어있다. 그렇지 않은가? -김승희 시 ‘사랑 5-결혼식의 사랑’ 중 (시집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 2000) 페미니스트 시어머니라고 하면 모던하게 들려서 뭔가 멋있는 것 같고 자유의 향기가 풍겨올 듯해서 신선하다. 기대가 크다. 그런데 선배인 한 여성 교수님의 한탄을 들으니 거기에도 자기갈등이 큰 것 같다. 직장 일로 미국에서 사는 아들이 한 달 동안 휴가를 왔는데 며느리가 시댁에는 잠시 인사차 들를 뿐 주로 친정에서 지낸다는 것이다. 페미니스트 시어머니는 대놓고 말은 못하고 속으로만 앓았다. “자기들끼리 자유롭게 살다가 잠시라도 시댁에 들어와 살려면 아무래도 며느리가 불편하겠지요. 그리고 선배도 혼자 자유롭게 지내는 게 낫지 며느리가 좁은 아파트에 들어와서 눈치보며 지내는 거 불편하잖아요. 가끔 만나 맛있는 거나 많이 해줘요”라고 위로 삼아 말했더니 선배는 서운해했다. “며느리가 친정에 있으니 아들도 처가에 주로 머무는 거야. 나도 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얼굴도 보고 싶은데 아들이 처가에만 있으니 얼굴 보기도 어려워”라고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서 아들에게 “너도 좀 ‘우리 집’에 와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대학 다닐 때 페미니즘을 배워 성평등이나 가부장제의 억압적 요소에 대해 이미 공부한 아들이 “우린 엄마가 페미니스트라 웬만한 것은 다 이해하신다고 생각했는데…”라고 웃으며 말하더라는 것이다. 선배의 말에 우리는 그 아들이 귀엽기도 해서 웃고 말았다. 그 뒤로도 선배는 아이는 언제쯤 가질 건지 궁금하다고 지나가는 말로 살짝 물었는데 아들로부터 같은 지적을 받았다. 이제 선배는 ‘그래, 명색이 페미니스트인 내가 며느리와 아들의 페미니즘을 억압해서야 되겠나’라는 생각에 매사가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각오로 ‘페미니스트 시어머니의 해방일지’를 일상 속에 쓰고 싶다고 했다. 해방은 결국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니까. 톨스토이의 질문처럼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했을 때 사람이 무슨 하나의 ‘이즘’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 젊은 아들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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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연심 가족은 비누 공동체다 비누를 보면 얼굴이 떠올라 그 비누를 사용하던 얼굴 비누 거품을 문지르면서 눈이 쓰라려 웃는 것처럼 찡그리던 얼굴 가족은 비누를 같이 쓰는 비누 공동체 비누칠을 할 때는 처음엔 누구나 얼굴이 웃고 있지 참 오만방자, 건방지게 살기도 했는데 비누 거품은 간지럽다가 눈에 들어가면 쓰라려서 눈을 감게 되지 비누 거품이 눈에 들어가면 거만과 위엄이 다 소용 없어 두 눈을 감고 쓰라리게 아픔과 양심을 생각하게 되지 가족은 비누를 같이 쓰던 비누 공동체 소멸의 비누 어제는 비누방울을 불며 같이 웃고 놀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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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연심 희망은 상처보다 더 크다 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하필이면 왜 그날하필이면 왜 그 배를하필이면 왜 거기에하필이면 왜 당신이하필이면 왜 내가하필이면 왜 그때하필은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른다하필은 이유를 모르고 배후도 동서남북도 모르지만하필은 때로 전능하기도 하다우연의 전능,우연은 급히 우연을 조립한다하필은 불현듯 순간의 어긋남에 불을 비춰주는 말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일이하필은 기필코 하필이란 말을 물어보게 하는 말하필은 참회도 없이 두 손을 붙들고 우는 말하필이 쌓아올린 하필 그런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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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연심 우리는 어떻게 애도의 슬픔을 감당해야 할까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은 세 번에 걸쳐 죽는대요첫 번째는 심장이 멈출 때두 번째는 흙 속에 몸을 매장할 때세 번째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떠날 때 사람은 쉽게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닌가 봐요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 죽기까지는시간이 많이 필요하지요심장도 많이 필요하고요그때까지는 살아있는 거라고요 공갈 젖꼭지 같은 것은 아니고요아무 생각 없을 때도 몸에서 계속 자라나는머리카락이나 손톱 발톱이나 폐처럼그렇게 당신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면면히 자라나는 작은 영생, 잠시의 영원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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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연심 고구마의 약속과 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푸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사랑한다는 것은얼굴이 썩어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절벽까지 왔다절벽에 닿았다절벽인데절벽인데도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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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희의 시심 연심 거리의 피아노를 위하여 모두의 피아노스트리트 피아노손열음이나 조성진이 아니어도쇼팽이나 모차르트 곡이 아니어도아무나 자유롭게 아무거나 칠 수 있는 피아노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에얼굴이 오이장아찌 같은 행인들이잠시 걸음을 멈춘다진주빛 피아노, 남색 피아노모두 바다에서 나온 색인데누구나 칠 수 있고아무나 들을 수 있는 피아노 환자들이 물가에 와서 기다리다가천사들이 가끔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아물결이 동(動)할 때연못 속으로 들어가면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된다는베데스다 연못가찬란한 물결과 빠른 프레스토가 환하게빛을 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