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상처보다 더 크다

김승희 시인
[김승희의 시심연심] 희망은 상처보다 더 크다

하필이란 말이 일생을 만들 때가 있다
하필이면 왜 그날
하필이면 왜 그 배를
하필이면 왜 거기에
하필이면 왜 당신이
하필이면 왜 내가
하필이면 왜 그때
하필은 언제 어디로 갈지 모른다
하필은 이유를 모르고 배후도 동서남북도 모르지만
하필은 때로 전능하기도 하다
우연의 전능,
우연은 급히 우연을 조립한다
하필은 불현듯 순간의 어긋남에 불을 비춰주는 말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 잘못된 일이
하필은 기필코 하필이란 말을 물어보게 하는 말
하필은 참회도 없이 두 손을 붙들고 우는 말
하필이 쌓아올린 하필 그런 삶

- 시 ‘ ‘하필’이란 말’, 시집 <도미는 도마 위에서> 중

김승희 시인

김승희 시인

얼마 전 아주 소중한 책을 우편으로 받았다. 올해가 4·29 LA 폭동이 일어난 지 30주년이 되어 미주 한국문인협회에서 <4·29 LA 폭동 30주년 기념 작품집- 흉터 위에 핀 꽃>을 발간하였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힘든 시절인데도 이렇게 방대하고 의미 깊은 책을 쓰고 제작해서 부쳐준 미주 문인협회의 열정과 정성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당시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두 아이를 키우며 박사 논문을 쓰고 있던 내가 LA 폭동과 무슨 상관이 있었겠는가?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미국 통신회사인 AT&T에서 폭동 이후 한인의 삶에 대해 글을 쓸 한국 문인을 한 명 초청했는데 내가 초빙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미국에 머물며 자료 조사와 현장 답사를 했고 그 몇 년 후 부족하나마 <13월의 이야기>라는 중편소설을 발표했다. 우연으로 시작된 일이었지만 너무 소중한 일이었다. 버클리 대학 일레인 킴 교수의 <한(恨)이 있는 곳에 집이 있다>라는 LA 폭동에 대한 사회학적 저서를 감명 깊게 읽었다.

<흉터 위에 핀 꽃>은 LA 폭동을 이렇게 규정한다. “4·29 LA 폭동은 1991년 3월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 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 체포 과정에서 발생했던 무차별 구타 영상이 뉴스에 방영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92년 4월29일 열린 재판에서 경찰의 무죄 결과 판결과 흑인 인권 침해 등 여타의 이유에 분개한 흑인 사회가 폭발하여 시위와 폭동으로 이어진 유혈사태였다. 이 폭동은 한인 이민자들의 뿌리를 송두리째 뒤흔든 상처이자 새로운 이민자의 시선을 일깨운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미주 문인들의 경험이 들어간 좋은 시와 소설, 에세이와 약탈당하는 현장 사진도 실렸다.

누군가는 왜 하필 그 즈음에 리쿼스토아 주인인 두순자씨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를 절도범으로 오인해 몸싸움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총을 쏘게 되었는가? 라고 묻는다. 왜 하필 그때? 왜 뉴스에서는 두순자씨와 라타샤 할린스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며 계속 방영함으로써 로드니 킹 사건을 두순자씨 사건으로, 흑백 갈등을 한흑 갈등으로 왜곡했는가? 왜 경찰은 약탈당하고 있는 한인타운을 지키러 오지 않고 베벌리힐스 쪽으로 가는 길목만 지키고 있었는가? 라고 묻는다. 왜 하필, 왜 그랬는가? 하필이라는 말에는 운명론적인 느낌이 들어있어서 피해자의 슬픔만을 강조하게 된다.

하필이란 말을 버릴 때 반전이 일어난다. 그 일 이후 한인사회는 새로운 이민자의 시선을 획득하게 되었고 이민 2세대들의 주류사회 진입 등 많은 발전을 했다. 인생을 만드는 것은 필연보다도 우연이 더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어떤 우연은 쓰라린 꽃을 피우는 강인함을 일깨우는 출발점이 된다. <흉터 위에 핀 꽃>이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런 ‘하필’이라는 운명론을 거부하고 스스로 일어난 향기로운 꽃의 강인함이다. 희망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그런 꽃. 고맙게도 어떤 상처는 아름다운 반전을 만들며 희망은 상처보다 더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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