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의 약속과 사랑의 전당

김승희 시인
[김승희의 시심연심] 고구마의 약속과 사랑의 전당

사랑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으리으리한 것이다
회색 소굴 지하 셋방 고구마 푸대 속 그런 데에 살아도
사랑한다는 것은
얼굴이 썩어들어가면서도 보랏빛 꽃과 푸른 덩굴을 피워 올리는
고구마 속처럼 으리으리한 것이다

시퍼런 수박을 막 쪼갰을 때
능소화 빛 색채로 흘러넘치는 여름의 내면,
가슴을 활짝 연 여름 수박에서는
절벽의 환상과 시원한 물 냄새가 퍼지고
하얀 서리의 시린 기운과 붉은 낙원의 색채가 열리는데

분명 저 아래 보이는 것은 절벽이다
절벽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절벽까지 왔다
절벽에 닿았다
절벽인데
절벽인데도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이 있다

절벽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마음
낭떠러지 사랑의 전당
그것은 구도도 아니고 연애도 아니고
사랑은 꼭 그만큼
썩은 고구마, 가슴을 절개한 여름 수박, 그런
으리으리한 사랑의 낭떠러지 전당이면 된다

- 시 ‘사랑의 전당’, 시집 <단무지와 베이컨의 진실한 사람>에서

“고구마만 먹고도 살 수 있다는 친구와 혼인을 약속하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제자로부터 메일을 받고 뛸 듯이 기뻤다. 새해 인사와 함께 이런 좋은 소식을 준 것이다. 하루 종일 뭔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고 마음에 고양(高揚)된 분위기가 가득했다. 아, 그래, 고구마만 먹고도 살 수 있다니. 사랑에는 그런 기개(氣槪)가 있어야지. 으리으리한 기백이 있어야지. 순수하구나. 덩달아 내가 행복해졌다.

김승희 시인

김승희 시인

고구마란 단어가 나오니 몇 년 전에 내가 쓴 시 ‘사랑의 전당’이 떠올랐다. 사랑을 캄캄한 고구마 포대 속에서도 넌출넌출 푸르게 올라온 고구마 잎과 줄기에 비유했던 시였다. 고구마는 힘든 시대에 먹었던 구황 작물이기도 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어 고구마의 건강 효과는 대단히 홍보되고 있다. 항산화 작용에 탁월하고 면역력을 증강시키며 암을 예방한다는 웰빙 식품으로까지 등극했다.

가난한 시인이 있었다. 40년 전의 일이다. 고구마, 감자, 수제비 등속을 많이 먹었다. 어느 날 포대에 그냥 버려둔 고구마에서 작은 싹들이 반짝반짝하고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 얼마 후엔 푸른 줄기와 잎사귀가 넌출넌출 올라오고 있더라는 것이다. 세상에, 흙이 없는데 어떻게 고구마 줄기와 잎이 파도처럼 푸르게 올라올 수 있었을까? 친구는 말했다. “흙이 없으니 자기 살을 파먹고 자랐겠지.” 나는 그 말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은 그런 것이구나. 아닌 게 아니라 고구마는 속이 뭉그러져 있더라고 했다. 다음 해 친구는 길에서 큰 화분을 세 개나 주워왔다. 거기에 장난처럼 싹이 돋은 고구마를 심었다. 푸른 줄기와 잎이 자라났고 엉성한 꽃까지 피었다. 꽃은 나팔꽃이나 메꽃과 비슷하다. 은은한 보랏빛으로 연하고 청순하다. 친구는 말했다. “너, 아니? 고구마꽃의 꽃말이 행운이라는 것을?” 내가 물었다. “뭐? 고구마꽃 꽃말이 행운이라고?” 웃음이 나왔다. “응, 고구마꽃은 너무 귀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 사람이 드물대. 행운이 있어야 볼 수 있대.” 행복에는 순간이라는 휘발성의 말이 붙어있어 슬프지만 행운이란 말은 의젓하다.

어둠 속에서도 작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푸르름만 있으면 소생할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렇게 물질적·정신적 푸르름을 요구한다. 충전기에 휴대폰을 꽂아 놓으면 충전이 저절로 되듯이 행복이 차오르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도 씩씩한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이 필요하다. 이 박사. 잘 살아야 해요. 고구마만 먹지 말고 맛있는 다른 것도 많이 먹고요. 곧 봄이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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