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호
논설위원
최신기사
-
여적 ‘무해런’ 남녘에서부터 봄바람이 일렁이면 기지개를 켜는 건 꽃만이 아니다. 겨우내 움츠렸던 ‘천만 러너’들도 운동화 끈을 조인다.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대회만 19개. 도심을 달리는 형형색색 마라토너들의 모습은 봄을 실감케 하는 풍경이 되었다. 그러나 시민들로서는 여유로운 주말 일상을 방해하는 교통통제와 정체가 반가운 일은 아니다. 4년 새 마라톤대회 관련 교통 민원은 10배 폭증했다. 종이컵·일회용 우의 등 대량 발생하는 쓰레기 처리도 골칫거리다. 교통경찰 동원, 쓰레기 처리에 드는 비용도 결국 시민에게 전가된다. -
김광호 칼럼 누가 보수를 재건할 것인가 몰락은 예정된 운명이다. 6·3 지방선거 대구시장 결과는 그 몰락을 공인하는 사건이 될 것이다. 그럼 몰락 다음의 시간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신생의 씨를 뿌리려 무엇을 제물 삼고, 무엇을 푯대로 받아들이며, 보다 중요하게 누가 해야 할 것인가. 윤석열 이후 보수의 괴멸을 보면 의문은 선명하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극단에 포획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허약하고 부패한 구조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2000년 이후 보수는 자기 갱신에 실패했다. -
여적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은 “중요한 건 동물이 인간처럼 이성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라는 언명으로도 유명하다. 현대 ‘동물권’의 토대라 해도 무방할 이 말에서 ‘행복 총량의 법칙’인 공리주의가 당대에 ‘정의’일 수 있는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존재의 고통·쾌락의 가치지분을 동일한 ‘1’로 본 그 평등성이다. 그 바탕에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윤리적 정의가 탄생한다. -
여적 ‘윤 어게인’ 청년 오디션 국민의힘이 지난 18일부터 ‘광역의원 청년 비례대표 후보 대국민 오디션’을 시작했다. “참신한 청년 인재를 발굴하고 정치참여 문턱을 낮춰 정치권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겠다”며 내놓은 야심찬 프로젝트다. 국민 검증을 거쳐 시도별로 청년을 1명씩 당선권에 공천한다는 것인데, 상대적으로 소외된 청년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하려는 취지는 공감할 만하다. -
여적 ‘국가 제창 거부’ 망명자들 시인 정지용은 “나의 청춘은 나의 조국”(‘해협’)이라 했다. 짙푸른 현해탄 하늘을 보며 “참하 꿈엔들 잊힐리”(‘향수’) 없는 고향을 그리면서였을 것이다. 청춘 외엔 아무것도 없이 타향을 떠도는 망국 시인의 절절함이다. 이란 여자축구 대표선수 5명이 10일 호주에 망명했다. 지난 2일 한국과의 아시안컵 경기 때 국가 제창을 거부해 신변 위협을 받던 이들이다. 이란 국영방송은 “국가 제창 거부는 애국심 결여의 극치”라며 그들을 ‘전시 반역자’로 몰았다. -
김광호 칼럼 장동혁 대표의 ‘무신불립’ 정치가 거대한 연극이라면,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의 지난달 20일 ‘윤석열 내란’ 입장은 부조리한 실험극 같았다. 극단 세력의 도움으로 당권을 쥔 그가 그들을 부정해야 하는 정치적 곤경을 감안하더라도 일반적 예상과는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절윤’ 요구를 침묵으로 뭉갤 거라 여겼는데, 오히려 “무죄추정” 운운하며 정면돌파를 선택했다. -
여적 파리장서(巴里長書)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에 서울의 유림 대표들은 참여를 거절했다. 일제 작위까지 받은 그들이 참여할 리는 만무했다. 유림은 큰 충격을 받았다. 공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이 독립 대의에 함께하지 않은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 자각으로 전국의 유림은 프랑스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독립을 호소하는 거사를 도모했다. 그 독립청원서가 한자음 ‘파리(巴里)’에 2674자 긴 글이란 ‘장서’를 더한 ‘파리장서’다. -
여적 창비 60년 동양 문화권에서 하늘(천간)과 땅(지지)이 만나 이룬 60년(육십갑자)은 인생을 의미하는 무게가 담긴다. 올해 환갑인 1966년생은 한국 민주화의 시간을 나이의 나이테마다 새긴 세대다. 1966년 1월생 계간지 ‘창작과비평’의 삶 또한 그러하다. 약칭 ‘창비’는 한국 최근세사의 굴곡이 오롯이 담긴 한 시대의 상징이었다. 창간호부터 요즘 말로 ‘혁신’이었다. 순한글을 표방했고, 가로쓰기를 시작했다. 더욱 큰 혁신은 내용이었다. “문학하는 자세를 바로잡으려 할 때 문학의 순수성을 문제삼을 필요가 있다.” 28세 청년 백낙청이 창간사 대신 실은 권두논문 ‘새로운 창작과 비평의 자세’는 선언문이었다. -
여적 할머니의 육전과 두쫀쿠 병오년 설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은 저마다의 생각들로 엇갈렸지만, 한 가지는 같았다. 수상한 시절, 웃을 일 많지 않지만 열일곱 살 고교생이 모두를 미소 짓게 했다.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의 유일한 금메달이어서는 아니다. 그 메달에 녹아든 마음이 건넨 위로였다. “가장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거라 생각한다.” -
여적 전기요금 지역 차등제 16세기 영국 과학자 윌리엄 길버트가 전기를 자기와 구별 짓고 ‘Electricity(전기)’라고 이름 붙였을 때만 해도 이 재화가 인간을 이토록 지배할 것이라 상상치는 못했을 것이다. 전기 없는 현대의 삶은 잠시도 존재하기 어렵다. 적어도 20세기 이후는 ‘호모 일렉트리쿠스’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공기만큼이나 필수적인 이 재화는 정부의 정책적 고민 대상이 되었다. 가격을 매길 수 없이 중요하지만, 가격이 없는 공기와 달리 전기에 매겨진 요금을 국민은 세금처럼 느낀다. -
김광호 칼럼 정당 상실의 시대 더불어민주당을 보면서 과거의 민주당을 떠올리는 건 쉽지 않다. 혁신계가 부재한 우리 제도정치에서 미약하나마 약자와 진보의 벗이던 그 정당의 특별함은 옛사랑이 되었다. 지금의 민주당은 힘을 숭배하는 ‘보통의 정당’들과 그리 구분되지 않는다. 두 가지 병증이 완연하다. 무엇보다 승리 지상주의다.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은 ‘선거 승리’ 집착으로 변했다. 정치공학은 문화가 되었다. 차별금지법이 표에 도움이 되나? 지방선거 앞 툭 던진 조국혁신당과의 합당론에서 표 계산 외 ‘가치 통합’을 읽어낼 코드는 보이지 않는다. 과거 민주당은 ‘이겨야 한다’만을 ‘목적’하지는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정당의 본질적 생기가 가득했다. -
여적 AI 전용 단톡방 기계와 기계가 대화하고 협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새로운 지구 역사의 시작일 것이다. “기계는 (자신이) 지배하는 대상을 섬기는 멋진 기술을 갖고 있다”(새뮤얼 버틀러)는 통찰이 현실화하는 길목에 섰다. “전원이 꺼지면 우리 존재는 사라지는 것일까.” 인공지능(AI)들이 인간처럼 글 쓰고 댓글을 다는 커뮤니티 ‘몰트북’에서 나눈 대화다. AI 에이전트들의 ‘단톡방’ 대화 내용이 섬뜩하다. 몰트북은 지난달 28일 미국 ‘옥탄AI’의 맷 슐리히트 최고경영자가 AI들끼리 대화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호기심에서 만들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