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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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매트릭스 세상 어제는 꿈을 꾸었다. 신간 제작이 막 끝나서 출판사에 책이 도착했는데, 첫 페이지부터 오·탈자가 수십개. 가슴이 철렁하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인쇄된 책 전부를 다시 제작해야 한다는 낭패감과 함께 비용과 시간은 어쩌나 하는 걱정이 밀려온다. 꿈에서 깨어나서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아직도 이런 악몽에 시달리다니 하는 생각에 헛웃음이 났다. “라떼는 말이야…” 하고 나 때의 경험을 무용담으로 떠벌리기는 싫지만, 확실히 그때를 겪은 편집자는 요즘의 젊은 편집자와는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우리들 늙은 편집자는 인쇄 직전에 발견한 오자 때문에 필름 판을 오려붙이고, 없어진 사진식자 한 글자를 찾으려고 편집부 책상 밑을 끙끙대며 수색하곤 했다. 이런 경험을 가진 편집자와, 모니터 화면에서 키 몇 개로 간단히 오·탈자를 수정하는 편집자에게 글자 하나, 문장 한 줄은 같은 무게일 수 없다. 문자는 의미를 담은 기호이기 이전에 손에 잡히고 바람에 날리는 물리적 실체였다. 약병에서 흩어진 알약 비슷했다고 할까. 이제는 전자책까지 흔해져서, 글자 알갱이와 글줄이 의미에 앞서 물리적 대상이라는 관념은 더욱 희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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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침묵의 재발견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 독일작가 막스 피카르트는 <침묵의 세계>에서 이렇게 썼다. “예전에는 침묵이 모든 사물을 뒤덮고 있었고, 그래서 인간은 한 대상에 다가가기 이전에 먼저 그 침묵의 막을 뚫고 나가야 했다. 사상과 사물은 그것들을 둘러싼 침묵에 의해서 보호되었고, 그리하여 인간은 그것들의 급박한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사라진 오늘날 인간은 오히려 더 이상 능동적으로 사상과 사물을 향해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그것들이 인간에게 달려들어 인간 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인간은 이미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생각되는 대상이 된 것이다.” 침묵은 의외로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생각과 사물이 달려들어 우리를 점거하지 못하도록 막는 사이, 천천히 능동적인 시도를 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침묵을 잃으면서 우리는 오히려 사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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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죄’에 대하여 일요일 아침, 함박눈이 수북이 쌓였고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은 순백의 눈길을 밟으며 성당에 고해성사를 하러 갔다. 알다시피 천주교 신자는 ‘판공성사’라는 이름으로 일 년에 두 번 고해성사를 할 의무가 있다. 부활을 맞는 시기에, 또 성탄을 맞는 대림 시기에 마음을 정결히 하고 성자(聖子)의 강림을 맞이하라는 뜻이다. 고해를 위해 그간 지은 죄를 곰곰이 더듬어보았으나 이렇다 할 죄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나의 고질병인 몇 가지 습관과 감정 문제 등 빤한 일상을 읊고 나서 고해소를 나왔다. 돌아오는 길에 무거웠던 마음이 눈처럼 후련하게 녹아내렸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고해의 깊은 뜻이 고백을 통한 신과의 화해에 있다고 하지만, 내 경우에는 없던 죄의식까지 생기는 판이었으니까. 오히려 ‘이 종교는 왜 이렇게 죄책감을 강요하는가’ 하는 생각만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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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독신의 이유 서울 한 중심에, 그것도 빼어난 전망을 갖춘 곳에 고가 주택을 소유한 유명 승려의 생활이 방송에 소개되면서 인터넷 공론장이 와글와글한 한 주였다. 삶의 무게에 시달리는 대중들에게 평소 무소유와 내려놓음의 가르침으로 ‘힐링’의 길을 안내한 이였기에 사람들은 더한 배신감을 느꼈나보다. 사실 사람들이 구입한 것은 미국 명문대 박사라는 상표와 젊고 수려한 그의 외모였을 텐데 말이다. 그보다 더한 종교인이 무수한데 유명세 때문에 혼자서만 과도한 비난을 받는다는 동정론도 나왔고, 본인도 사회적 활동을 모두 접고 수행자의 생활로 돌아간다고 발표함으로써 논란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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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아보카도 유감 냉장고 채소서랍을 열어보니 아보카도 한 알이 굴러다닌다. 평소 돈 주고 사먹는 과일이 아니라서 아내에게 물어보니 동네친구가 장 보는 길에 몇 개를 주고 갔단다. “엊그제 먹은 샐러드에도 넣었는데 몰랐어?” 하고 되묻는다. 뭔가 미끄덩거리고 느끼한 게 섞여있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그게 아보카도인 줄은 몰랐다. 아보카도는 참 기괴한 과일이다. 아보카도를 과일이라 생각하고 새콤달콤한 맛을 기대한다면 당신은 절망할지도 모른다. 과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버터에 두부를 뭉친 거라 여기는 게 좋다. 그런 이상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없겠지만 인간이 못 먹을 건 아니니까. 후추와 소금을 치거나 올리브유와 레몬즙을 섞거나, 그래도 안 되면 내가 멕시코 사람이라고 세뇌하는 방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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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타락한 종교 내가 기독교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때다. 친구가 교회에 나가 예쁜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나도 나가보자고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공부 안 하고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리고 다닌다며 질색을 하셨지만, 이런 종교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열심히 교회에 나갔다. 여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좋았지만, 텅 빈 예배당의 찬 마룻바닥에 홀로 꿇어앉아 어떤 영적 신비감에 휩싸인 듯한 경험을 하고는 종교가 무엇인지 알 것도 같았다. 키르케고르의 ‘신 앞에 선 단독자’라는 말도 깊게 박혔다. 학생부를 담당하는 전도사가 새로 부임했고, 광주에서 오신 분이라고 했다. 전도사님은 가끔 우리를 모아놓고 전 해인 1980년 광주의 일을 띄엄띄엄 들려주었다. 그는 이야기 중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가끔은 분통을 터뜨렸다. 십자가 앞에 홀로 앉아 울면서 기도하는 모습도 보았다. 그는 곧 잘렸다. 교회는 그런 신심 깊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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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책값이 싸다고 더 팔릴까 공자님도 세금 오르는 걸 싫어했고 물건 값은 될 수 있으면 깎으려 했다는 말이 있다. 장담하건대 소크라테스도, 부처님도, 이순신 장군도 그러했을 것이다. 드높은 인류애와 공공의 선을 좇은 성인들도 막상 내 주머니에서 돈이 나간다는 사실 앞에서는 태연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떤 바보 같은 정부도 세금과 공공요금 등을 여론이나 투표로 결정하지는 않는다. 다수가 원하면 그 다수에게 폐해가 될 정책도 밀어붙이는 게 바로 포퓰리즘이다. 3년마다 재검토하게 되어 있는 도서정가제를 둘러싼 논의가 한창이다. 법이 시행된 2014년 이후 크게 문제가 불거진 적이 없으므로 올해도 그간의 합의대로 조용히 넘어갔을 법한데 그만 사달이 나고 말았다. 청와대 국민청원에 법의 폐지를 주장하는 청원이 올랐고 20만명 넘게 동의하는 바람에 안건이 공론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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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집’이란 무엇인가 천정부지로 오른 강남 아파트값과 정부의 부동산 대책을 지켜보자니 두서없는 생각이 떠오른다. 대치동의 30평 아파트가 20억원을 호가한다는데 이게 제정신인가? 정부의 다주택 보유세, 양도세 중과는 과연 효과를 발휘할까? 왜 그리고 언제부터 ‘집’이 이렇게 돈 놓고 돈 먹기, 환금성 상품이 되어버린 걸까? 우리 몸을 의탁하고, 가정을 꾸리고, 우리의 삶을 만들어주던 이 공간이 그저 소유와 거래의 의미만 갖게 된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최근 출간된 이반 일리치의 책에는 ‘파벨라(favela)’라 부르는 브라질 빈민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정부와 자본이 게딱지처럼 다닥다닥 판자로 지은 빈민촌을 불도저로 싹 밀고 개발하려 하지만, 그때마다 하루저녁이 지나면 판잣집과 천막이 뚝딱 지어지고 사람들이 주섬주섬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광경을 보고 “사람들이 돌아오는 게 아니라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고 표현한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는 들어가 살 집을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집이 아니라 삶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래도록 사람 개개인보다는 집으로 그 사람을 인식했다. 살구나무집, 파란대문집, 703호 아저씨. 따라서 집에서 우리가 사는 게 아니라, 집이 우리의 삶을 살아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말이 ‘어디에서 지낸다’는 말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것만 봐도, 집이 삶을 찾아 되돌아온다는 말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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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너만 옳으냐, 나도 옳다”가 감춘 것 흑인에 대한 경찰폭력으로 촉발된 미국 인종시위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구호가 “블랙 라이브스 매터(Black lives matter,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표현이다. 이 구호에 대해 일부 백인 극우들이 “올 라이브스 매터(All lives matter)”라는 구호를 내세우곤 하는 모양이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니 말이야 틀린 게 없지만, 이 말의 고약한 의도를 읽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정한 맥락과 배경을 가진 주장과 달리 아무 맥락 없이 보편타당하기만 한 의견은 대개 비겁하거나 악의적인 의도를 감추고 있다. 흑인 생명만 소중하냐, 백인 생명도 소중하다. 당신 의견만 옳으냐, 내 의견도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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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보이지 않는 사람들 아침마다 내가 지나는 출근길 옆의 카페는 꽤 이른 시각부터 문을 연다. 카페 바깥 테이블에는 거의 매일 그 시간에 앉아 책을 읽는 손님이 있는데, 나이가 지긋한 서양 노인인지라 매번 눈길이 가곤 했다. 쌀쌀하거나 무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없이 눈비만 내리지 않으면 늘 그를 볼 수 있었다. 은퇴한 교수일까? 사제? 아니면 선교사? 괜한 호기심으로 한번은 그가 읽는 두꺼운 책의 제목을 눈여겨보고 검색을 한 적도 있다. 지도로 보는 서양사에 관한 책이었는데, 이미 번역 출간된 책이라 출판인으로서 아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노인이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슬며시 걱정이 되었다. 아픈 걸까? 혹시 본국으로 돌아가셨나? 먼 이국땅에서 노년을 보내던 그는 누구이며,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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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코로나19가 가르쳐 주는 것들 코로나19가 전례 없는 속도와 규모로 퍼지다 보니, 이 상황을 단지 의료와 과학의 틀에서만이 아니라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이해해보려는 노력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인간이 한 사회와 국경을 넘어 교류하고 전 지구적 경제활동을 통해 살아가는 지금, 전염병이 인간의 ‘몸’에만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 그 인간들이 이룬 모든 문화적 체계와도 관련된 문제라는 건 당연한 얘기일 것이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는 다를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BC(before Corona), AC(after Corona)라는 단어도 등장했고,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전혀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뉴 노멀’이라는 말도 유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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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전염병의 특효약 이 시대에 책은 천덕꾸러기가 되었나보다. 코로나19 확산으로 해외에서는 화장지, 식료품 사재기가 기승을 부리고, 국내에서도 택배 폭주로 기사가 과로사하는 일까지 벌어졌는데, 서점은 조용하다. 너무 조용해서 먹잇감 찾는 바이러스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바이러스조차 없다고 하니 사람들은 흥미가 떨어져서 더 기피하나보다. 출판 종사자로서는 얼마나 다행인지. 출판사 사무실도 바이러스에 관한 한 청정지대여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원고 들여다보느라 하루 종일 옆자리 동료와 말 한마디 나누지 않는 편집자들은 원래 그러려니 하고, 서점 상담도 일시 중단되어 영업자들은 만날 사람이 없다. 신학기 반짝 수요도 없어서 책 들고날 일이 줄었으니 출판은 강제격리, 자가격리의 충실한 이행자로 칭찬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