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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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바이러스와 정치 잘 억제되던 코로나19가 막 확산세로 돌아선 지난주 두 일간신문에서 읽은 논설위원들의 칼럼은 야비하고 역겨운 내용들이었다. 감염증 확산에 대한 사람들의 공포를 이용해 더욱 공포를 부채질하고,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들까지 욕보이는 칼럼이었다. 역겹지만 제목이나마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라 전체가 세월호다”와 “대구 사람들 참 점잖다”라는 칼럼이다. 이 칼럼들의 논지는 참 비슷하다. 중국인 입국 전면 금지를 주장하는 ‘전문가’나 언론의 말은 듣지 않고 오히려 중국 혐오가 퍼질 것만 우려하며 국민을 방치하는 정부야말로 나라 전체를 세월호로 만들고 있는 정부 아니냐는 것이다. 마스크 수급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대구=신천지=야당의 프레임이나 만들고 있는 정부 앞에서 점잖게 참는 대구 시민들이 감탄스럽다는 것이었다. 과연 혐오와 선동의 부채질은 누가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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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고양이는 진리다 “짐승들의 세계는 침묵과 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때 그들은 대자연과 다시 접촉하면서 자연 속에 푸근히 몸을 맡기는 보상으로 그들을 살찌게 하는 정기를 얻는 것이다. 그들의 휴식은 우리들의 노동만큼이나 골똘한 것이다. 그들의 잠은 우리들의 첫사랑만큼이나 믿음 가득한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 연작에 나오는 ‘고양이 물루’는 고양이에 관한 숱한 묘사 가운데 내가 최고로 꼽는 글이다. 이 글을 보기 전까지 나는 타자의 세계, 짐승의 세계를 이토록 가감 없이 관찰하는 시선을 만난 적이 없다. 고양이는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침묵 속에 잠겨 있으며, 필요한 때가 오면 도약한다. 고양이의 시간은 기다림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인간의 해석이다. 그는 오로지 현재에 머물러 있으며, 지금 막 갱신한 현재에 반응하여 뛰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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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그것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춘수의 시 ‘꽃’은 이제 너무나 유명하여 전 국민이 외우는 시가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를 패러디해서 누군가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는 꽃이 될까봐 이름을 부르지 않겠다고 우스개로 말하기도 한다. 전 대통령의 이름을 ‘503’으로 대신 지칭하는 식으로 말이다. 김춘수의 시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정현종의 시도 생각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이름을 붙인다는 건 어렴풋한 몸짓을 하나의 존재로 확정하는 일이고, 그 존재가 온 우주와 맺고 있는 관계까지 한꺼번에 파악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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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버려진 길 도로는 폐쇄되었다. 수십년간 학생들과 장 보러 가는 마을사람과 봇짐 든 할머니를 실어 나르던 도로는 이제 버려졌다. 도로는 여전히 구불구불 길게 뻗어 있으나 닿을 곳이 없다. 어딘가 빠져나갈 곳을 향해 067 미니 마을버스가 급히 도망친다. 백경수를 떠나 금촌까지 가던 마을버스가 어쩌다 나타난 승객 앞에서 먼지를 피우며 멈춘다. 거울처럼 맑아 ‘백경수’라 불리던 그곳도 이제는 맑지 않다. 공장에서 나온 까무잡잡한 노동자 두엇이 발부리를 툭툭 차며 알 수 없는 말을 나눈다. 고기를 얹어주던 길가의 국숫집은 이제 모닝 차에서 내린 젊은 가족을 환영할 수 없다. 뿌연 유리문 안에서 중늙은이 두엇이 막걸리를 붓는다. 길게 늘어선 손님들 앞에서 사철 김을 피워 올리던 찐빵만두집도 공장 밥집으로 바뀌었다. 유리공장, 가구공장, 뭔가에 들어갈 부품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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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생태에 대한 범죄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자주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지난주에는 교황이 가톨릭 교리에 ‘생태에 대한 죄악’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반쯤 졸던 눈을 번쩍 떴다. 역시 프란치스코 교황이다. 가톨릭에서 ‘죄악’을 재정의한다는 것은 그리 가벼운 일이 아니다. 전 세계 신자들의 행동지침과 교회의 지향점을 새로 제시하는 일이니까. 교황이 예전에 했던 말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신은 용서해도 자연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교황은 대기, 수질 오염과 동식물의 대규모 파괴를 ‘생태학살’이라 부르며 그런 행위를 저지른 기업에 대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했단다. 또 환경파괴 행위를 ‘평화에 반하는 범죄’로 불렀다고도 한다. 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이 언제나 정곡을 찌른다고 생각해왔다. 교황은 가톨릭 전례력에서 연중 마지막 주인 지난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기도 했다. 교황은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단 한 사람이라도 가난한 이를 친구로 두고 있는지 자문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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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맞춤법 놀이 직업이 출판사 대표요, 수십년을 편집 일에 종사하다보니 맞춤법, 외래어 표기, 띄어쓰기에 유독 민감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길거리나 TV에서 맞춤법에 맞지 않은 걸 보는 게 일상이기에 조용히 원고의 틀린 철자는 고칠지언정 남의 맞춤법 오류를 지적하는 일은 거의 없다. 노래방에서 노래는 안 부르고 가사 틀린 것을 고치고 앉아 있다는 편집자들 얘기도 이제는 식상하다. 오히려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의 오류를 지적하려다가도, 모종의 지적 우월의식이나 전문가주의가 내게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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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16세 소녀처럼 지지난주 토요일 나는 대학로 도로 위에 앉아 있었다. 세계 시차 때문에 하루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날 전 세계 수백만명 규모로 열린 ‘기후위기 비상행동’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눴고 주변에는 젊은 외국인 청년들까지 꽤 많이 보여 흐뭇했다. 한편으로는 약간의 실망감도 들었다. 옆에 앉은 지인에게 말했다. “2만~3만명은 모여야 하는 것 아닌가요? 캐나다나 호주에서는 50만명씩 모였다는데 말이죠.” 집회 후 발표된 숫자를 보니 5000명이 모였다고 한다. 우리는 집회 후 대학로에서 종각까지 한 시간여를 행진했고, 종로 아스팔트 한복판에 일제히 드러눕기도 했다. 기후위기로 우리 모두 죽게 될 거라는 의미의 다이-인(die-in) 퍼포먼스였다. 찌푸린 하늘 아래서 아스팔트 위의 매캐한 타이어 냄새를 맡으며 생각했다. 급진적인 생태운동가들은 자기 하나로 인한 생활 오염을 참지 못해 자살까지 감행한다는데, 나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물론 그것이 옳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나는 어디까지 행동할 수 있을지, 누워서 자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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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국공립대 통합’을 청원합니다 뜻있는 시민들께, 언론에, 정부와 청와대에 청원합니다. 무슨 말로 이 청원을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조국 교수가 법무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우리 사회의 공론장은 온통 이 문제를 논하는 말들로 가득한 상황입니다. 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들에 또 하나의 부실한 목소리를 더하는 건 아닌지 우려하면서도, 뜻있는 이들의 공감을 구하고자 이 청원의 글을 씁니다. 조국 후보자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커다란 의문을 일으켰고, 그 의문이 다름 아닌 교육 문제에 집중되어 있음을 우리는 이번에 모두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조국 후보자의 자격 여부를 다시 논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법개혁의 적임자로 평가되는 그의 자격 여부에 앞서 오히려 교육개혁이야말로 그가 뜻하지 않게 우리 모두에게 던진 과제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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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일본처럼 되지 말기 일본을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친구가 있었다. 아직 일본에 가보지 못한 때였기에 친구의 말을 경청했다. 하긴 두어 번 가보았다 한들 얼마만큼 그 나라를 잘 알 수 있었을까. 꽤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렀다 온 친구는 그 나라의 번영과 기술과 그들의 청결과 질서의식에 감동한 듯했다. “솔직히 나라를 보나 국민을 보나 우리가 일본을 따라잡으려면 멀었어.” 갑자기 우리를 비교하는 친구의 입에서는 금방이라도 ‘조센징’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불편해진 내 눈빛을 읽었는지 친구가 덧붙였다. “과거는 과거고… 어느 모로 보나 우리는 일본을 배워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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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이유 진실은 늘 거짓보다 어렵다. 거짓은 머릿속에서 상상하거나 지어내면 그만이지만, 진실은 이런저런 근거와 감춰진 사실의 파악과 심지어 용기까지 필요하니까. 나아가 우리는 뻔히 밝혀진 사실조차 진실과는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잘 안다. 한 편의점주가 아르바이트생을 해고하면서 그간의 임금을 몽땅 동전으로 지급해 큰 공분을 산 적이 있다. 편의점주에 대한 성토가 인터넷에서 들끓었는데 사실은 조금 달랐다. 아르바이트생이 불성실한 근무태도로 무던히도 속을 썩였고 해고과정에서도 상식 이하의 행태를 보여준 모양이다. 점주는 후에 자신이 한 일이 잘못은 잘못이라며 사과했지만,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지 공감이 가기는 했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소란도 그러하다. 가장 직접적인 부담을 안게 된 자영업자의 불만이야 이해하지만, 최저임금과 무관한 가족 또는 나홀로 점포가 70%이고 자영업자들이 꼽은 어려움의 이유 중 인건비는 22%로 가장 후순위(7월4일자 ‘경향의 눈’ 인용)라는 사실 같은 건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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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도서관의 추억 마르크스가 <자본>을 집필한 곳은 대영박물관도서관이다. 거듭된 추방으로 유럽 각지에 쫓겨 다니며 살던 그는 30대 초에 영국을 마지막 망명지로 선택했는데, 죽기 전까지 30년이 넘도록 거의 매일 대영도서관을 다니며 이 문제작을 썼다. 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첫 번째로 입장해서는 문 닫을 때까지 남아있던 그를 직원들이 종종 쫓아내야 했단다. 얼마나 독서와 집필에 몰두했는지 도서관에서 가끔 실신까지 했다니 그 몰입의 강도가 놀랍다. 마르크스만이 아니었다. 대영도서관은 찰스 디킨스, 버지니아 울프, 코넌 도일, 버나드 쇼의 서재이기도 했다. 이들의 빛나는 작품들이 거기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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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공짜 점심은 많다 아침에 읽은 짧은 기사나 칼럼, 책 한 쪽의 구절 때문에 꽤 긴 시간 상념이 이어질 때가 있다. 이번에는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칼 포퍼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 정치의 탄생 과정을 다루었다는 신간 소개가 생각을 불렀다. 다니엘 스테드먼 존스의 <우주의 거장들>이라는 책이다. 안 읽은 책을 가지고도 30분씩 떠들곤 하는 이 업계의 버릇대로 예전 기억들을 줄줄이 소환했다. 지나가는 버스 뒤꽁무니에서 ‘세상에 공짜점심은 없다’라는 커다란 광고 글귀를 본 기억부터 떠올랐다. 한 경제신문의 광고인데, 그들이 신봉하는 밀턴 프리드먼의 말인 것까지는 이해한다 해도, 공짜점심은 없다는 저 도저한 이데올로기적 믿음이 역겨워 속이 울렁거렸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