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곤
사월의 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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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포도주를 위한 변명 프랑스에서 오래 공부하고 돌아온 친구는 와인을 늘 ‘포도주’라고 불렀다. 그 말이 우스워 들을 때마다 타박을 했지만, 친구는 프랑스에서 부르던 대로 ‘뱅’이라 말하기도 그렇고 영어 이름을 쓰기도 싫었을 테니 ‘포도주’를 택했을 것이다. 하긴 포도로 만든 술을 포도주라고 하는 게 무슨 문제인가. 그러나 친구가 “한국 돌아와서 사람들이 너무 비싼 포도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시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말한 것을 봐서는 뭔가 반감이 들었던 게 틀림없다. 좋은 레스토랑에 선남선녀들이 둘러앉아 저마다 와인 잔의 다리를 잡고 휘휘 돌리며 감탄사를 주고받는 그런 괴상한 풍경을 몇 번은 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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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알고 싶지 않다 예전 칼럼에서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는 말에 대해 잠깐 쓴 적이 있다.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구호에 맞선 백인들의 주장인데, 맥락을 모르면 보편타당함을 위장한 이런 말에 걸려들기 십상이다. 비슷한 예로 이퀄리즘(equalism)이 있다. 성 평등을 뜻하는 이 말이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로 나왔다는 것을 모르면 오독하기 쉽다. 여성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거기에 대고 이퀄리즘이라니, 단 두 개뿐인 성에서 결국 누구의 권리를 얘기하겠다는 건가? 평등을 가장한 이런 주장들은 마치 우월적 지위의 대형마트가 동네슈퍼에 대해 ‘시장에서의 공정 경쟁’을 보장하라고 외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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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은폐로 이루어진 삶 이반 일리치는 이런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질료 또는 물질적 대상에는 역사성이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태초부터 물질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해왔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질에도 역사가 있고 우리 인식에 따라 변화해왔다고 믿는다. 과거의 물과 오늘날의 H2O는 다른 것이다.” 이런 말을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인간을 둘러싼 환경과 물질은 우리의 인식 여하에 따라 존재가 결정된다는 관념론적 주장이 아니다. 어차피 인간과 관련된 의미의 포획망 안에 걸려들지 않는 사물이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의미도 없다. 우리가 아는 물질과 대상은 인간과 더불어 존재했고, 사회적으로 함께 변화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일리치는 사물 자체보다는 그것이 현재의 사물이 되게끔 한 역사와 이유가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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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정치가 사라진 사회 얼마 전 과도한 노동강도를 호소하며 트럭 시위에 나선 스타벅스 직원들의 소식을 접하고는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노조 설립을 권하는 민주노총에 대해 이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었다. “우리 스타벅스는 노조 없이도 22년간 식음료 업계를 이끌며 직원에게 애사심과 자긍심을 심어준 기업이다.” “트럭 시위를 당신들의 이익 추구를 위해 이용하거나 변질시키지 말라.” 이 소식을 전하는 뉴스에는 아니나 다를까 ‘밥숟가락 얹으려다 망신당한 민노총’ 같은 비아냥 댓글이 여럿 달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스타벅스코리아가 1600명을 신규 채용하겠다고 하니, 직원들은 시위의 효능감을 충분히 맛보았을 것이고, 우리는 역시 다르다는 자부심도 더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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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추석 상차림이 감춘 것들 추석 상에 빼곡히 올라온 고기며 전이며 생선을 보면서 씁쓸한 기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몇 년간 채식을 지향하다 포기한 후로 여전히 고기를 꺼리는 마음이 남아 있어서일까? 지키지도 못하는 나의 도덕을 남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유별나게 고기를 탐하는 젊은 조카들이 보기 싫은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우리 세대와 달리 고기를 맘껏 먹고 자란 젊은 세대는 채소와 나물에는 젓가락도 대지 않고 그저 고기를 찾는다. 사실 고기가 더 맛있지 않나? 하지만 나는 ‘입맛’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고약한 북유럽의 청어절임, 전라도 홍어도 몇 번 먹다보면 그 맛을 알게 되며, 채식을 하던 즈음 고기 굽는 냄새가 역겨웠던 적도 여러 번이기 때문이다. 입맛도 관념도 사실은 모두 만들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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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인터넷 혹은 ‘리바이어던’ 도구와 인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자 하이데거의 통찰은 탁월하다. 일단 그는 인간과 외부세계의 관계를 서로 분리돼 있거나 고립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그를 둘러싼 환경과 만나는 순간, 그 환경은 객관적 사물의 세계에서 인간의 환경으로 바뀌고 인간 역시 그것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세상을 ‘생활세계’라 부르는데, 인간에게 있어 객관적 외부세계는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만큼 죽은 사물의 세계에 불과하다. 이런 생활세계를 구성하고 또 그것에 의해 구성되는 인간에게 도구는 중요한 매개자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구를 통해 저 죽은 객관의 세계를 생활세계로 탈바꿈시키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도구를 ‘손 안에 있는 것’(Zuhandens)으로 정의함으로써 ‘눈앞에 있는 것’(Vorhandens)으로서의 사물과 구별한다. 키보드를 치는 동안 우리는 화면에 뜨는 글만 주목할 뿐 키보드의 존재는 잊어버린다. 키보드를 의식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도구이기를 멈추고 내게서 떨어진 하나의 사물이 된다. 인간이란 곧 그의 도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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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치킨을 뜯으며 “1만년 후에 혹시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이 시대를 뭐라고 할까?” 잘 튀겨진 치킨 한 조각에 시원한 맥주를 들이켰는데 친구가 불쑥 질문을 던진다. “인류세 아닌가?” 자신 없는 내 대답에 “인류세는 개뿔, 치킨세지!” 하는 친구의 답을 듣고는 푸확, 입안의 파편이 튈 뻔했다. 정말 그렇겠다. 땅을 파면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닭뼈 화석을 보고 지구를 닭의 행성으로 착각할지도. 전 세계 인구가 78억인데 사육되는 닭의 마릿수가 230억마리인 것만 봐도 그렇다. 종교적 금기도 없는 데다 사육이 쉽고 생장도 빨라서 닭은 오랫동안 육류 생산과 소비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만 해도 해마다 6억마리를 먹는다니 5천만 인구가 매달 한 마리는 꼬박 먹고, 연령별 편차를 고려하면 청·장년층은 매주 한 마리를 먹는다고 보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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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이대남’을 위하여 ‘이대남’이 문제라고들 한다. 단순한 연령대에 불과할 수도 있는 20대 남자들을 ‘이대남’이라고 호명할 때는 그만큼 뚜렷한 세대적·젠더적 특징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게는 ‘이대남’이라면 우선 안티페미니즘, 공정, 능력주의, 한탕주의 등 온통 부정적인 어휘와 결부되어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보궐선거 결과와 이준석 대표 당선으로 드러난 최근의 현상도 진보연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이런 인상을 사실로 만든 계기였다. 그러나 이념적 가치 기준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것 자체가 사실은 ‘이대남’ 현상에 맞지 않는 시도일지 모른다. 도대체 이들은 좌우나 보수·진보 같은 가치 지향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대남 자신들도 마찬가지이다. 선거와 매체 반응을 통해서 ‘말을 했더니 들어주더라’ 같은 효능감을 경험하면서, 세대 스스로 과대 대표된 집단 정체성을 가지게 된 건 아닌지 의심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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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두 가지 집단면역 코로나19 감염 추세가 좀처럼 줄지 않는 가운데 ‘잔여백신 예약제’는 확실히 ‘신의 한 수’인 듯하다. 부작용을 겁내는 이들에게 무리한 강요 없이 접종률을 끌어올리고 있으니, 너지 전략의 훌륭한 사례라는 평도 나온다. 글쎄 방역당국이야 아까운 백신을 한 명이라도 더 맞히기 위해 고안한 대책일 뿐, 설마 사람들의 경쟁심을 자극해보자는 계산을 처음부터 했을까. 다만 건강을 향한 경쟁적 욕망과 집단면역 달성에 동참하려는 선한 의지가 결과적으로 백신 접종에서 훌륭한 접점을 찾았다는 게 즐겁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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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소비자주의 대 생태주의 코로나19와 함께 어쩌면 세상은 변곡점을 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경제의 변곡점, 소비의 변곡점, 자본주의의 변곡점, 그리고 생태의 변곡점. 지인과 함께 길을 걷는데 상가의 점포들이 한 집 걸러 하나씩 문 닫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숨 섞인 소리로 지인이 말했다. “채소와 생선가게 같은 집 빼고 이제 공산품 파는 곳은 죄 망해가네요. 도대체 누가 인터넷을 만들었대요? 거기다가 코로나까지 한 방을 날렸으니….” 아침에 ‘알리익스프레스’라는 앱을 스마트폰에 깔고 거기 빠져서 한참 시간을 죽인 나로서는 가슴이 뜨끔했다. 중국의 거대 전자상거래기업 알리바바가 만든 이 플랫폼에는 세상의 거의 모든 물건이 엄청나게 싼 가격으로 올라와 있으니, 누군가의 말마따나 소비자의 ‘개미지옥’이요, ‘악마의 앱’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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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서점에 중·고등학생들이라니! 중학생이 되던 첫날, 입학식을 마친 후 어머니가 내 손을 끌고 간 곳은 서점이었다. 어머니가 데리고 간 종로2가의 종로서적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까까머리 풍덩한 깜장 교복을 입고 서점 앞에 얼이 빠져 서있는 1학년 중학생이라니. 책으로 가득한 6층 큰 건물에서 그날 어머니는 국어와 영어 사전 하나씩을 사주고, 한 권은 마음대로 고르라 하셨다. 책보다는 짜장면이 더 좋은 나이였지만, 아마 <꽃들에게 희망을> 같은 당시 베스트셀러를 골랐던 듯하다. 그 후 중고생 시절을 보내며 종로서적을 제법 드나들었다. 그때 산 주부생활판 <코스모스>, 미하엘 엔데의 <모모>,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 같은 책들은 아직도 서가 어딘가에 꽂혀있다. 초등학교만 마치고 그만 전쟁이 터져 중학교 구경밖에 못한 어머니가 내게 남겨준 소중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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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내 안에 파시스트 있다 최근에 재미있는 해외도서를 발견하고는 무릎을 쳤다. 이탈리아의 유명작가이자 방송인인 미켈라 무르자가 쓴 <파시스트 되는 법>(원제 How to be a Fascist)이다. ‘실용매뉴얼’이라는 부제까지 붙어있으니 짐작하듯이 미러링 곧 반어적 풍자의 의도로 쓴 책이다. 이대로만 하면 당신도 훌륭한 파시스트가 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파시스트가 아닌지 의심하게 하는 대목이 여럿이다. ‘파시즘’은 흔히 언급되는 단어이기는 하나, 왠지 좌파 지식인들이 우리 실정에는 어울리지도 않은 외국산 이념을 수입해서 폼 잡을 때 쓰는 말 같다. ‘독재’나 ‘유신’이나 잘해야 ‘전체주의’ 같은 말이 낫지 않을까. 하지만 오늘의 파시즘은 무슨 히틀러, 무솔리니, 국민전선처럼 그렇게 뻔뻔하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파시즘은 ‘연성’ 파시즘이라고도 하며,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민주주의자들 틈에 조용히 끼어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파시즘의 징후, 토양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