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최신기사
-
시선 눈이 오면 경식이가 생각난다 눈이 많이 왔다. 엉금엉금 발을 내디뎠다. 아내는 눈길에 걷는 나를 보면 항상 웃는다. 미끄러질까 봐 무릎을 잔뜩 구부리고 보폭을 신발 사이즈의 절반 정도로만 유지하면서 발에 힘을 엄청 주고 걷는 모습이 어색해서다. 신문배달을 할 때의 버릇이 참으로 오래간다. 폭설이 내린 빙판길에서 오토바이를 타면 두 발이 보조 타이어나 마찬가지고 내리막길을 걸을 땐 발바닥에 꾹꾹 힘을 줘야 하는데, 그만둔 지 십수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몸이 기억한다. 눈만 오면 그 시절이 생각난다. 배달시간이 날씨 때문에 곱절로 늘어나 기진맥진할 수밖에 없었던 배달원들은 함께 라면을 끓여먹으며 하얗게 변한 세상을 원망했다. 모두가 고시원에 살 정도로 비슷한 계층이니 신세한탄도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더 안쓰러웠던 동료가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상경한 경식이란 이름의 친구였다. 신문배달의 강도도 만만치 않은데 주말에는 중식당에서 배달까지 한다니 스무 살 청년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치곤 참으로 무거워 보였다.
-
시선 코로나 시대의 ‘노인 소외’ 원인이 분명한 바이러스로 전 세계 160만명이 단 1년 만에 사망했다. 10년간 16만명이 죽어도, 명확한 이유를 알고도 모른 체하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좀처럼 터널의 끝이 안 보이는 이유는, 그러니까 방역의 효과가 미미한 건 160만명의 죽음보다 확진자의 98%는 죽지 않는다는 통계에 더 의지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일 거다(치사율: 영국 3.5%, 미국 1.9%, 한국 1.4%). 그리고 이들은 2%의 위험성을 다음 정보와 결합시켜 0.2% 수준보다 더 낮은 수치로 받아들인다. 주로 ‘노인이’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기저질환이 있는 60대 이상들에게 상당히 위험하다”는 분명하고도 끔찍한 사실이 건강한 개인들 일부(라고 믿고 싶다)에겐 별 무게감이 없다. 그러니 내가 조심하지 않으면 어떤 노인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지 않고 ‘건강한 사람들끼리는 괜찮아’라면서 타인과의 접촉을 전문가들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줄이지 않는다.
-
시선 기본값을 수정하라 기업에 성평등 강연을 가면 성차별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 높은 분들을 만난다. 요즘 남성들이 얼마나 고단한지 설명하겠다는 분들의 주장은 이렇다. 예전처럼 여성들에게 농담도 함부로 못한다. 신체접촉은 상상불가, 회식 때 술 한 잔 받는 것도 노심초사란다. 세상이 달라져서 남자들이 신경 쓸 게 많아졌고 그래서 더 힘들다면서 흥분한다. 원래 그러면 안 되는 것인데, ‘그래도 괜찮은 세상’에 길들여지면 기존과 달라지는 상황들이 어색하고 불편하다. 오랫동안 기업문화는 음담패설도 허용되었고 신체접촉을 친밀감의 표시로 (당하는 쪽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노래방에서 상사와 블루스를 추고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여성들에게만 사회생활 잘한다는 수식어를 붙였고 반대의 경우는 뒤끝 있는, 그래서 믿고 일을 맡겨서는 안 될 인간으로 취급했다. 남성과 여성이 부여받는 역할도 성별 고정관념에 따라 철저히 달랐다. 남성을 야수처럼 부리면 카리스마 있는 리더십이었고 여성을 직장의 꽃, 딱 여기까지만 인정하고 조직을 관리하면 효율성이 좋은 사례로 인정받았다. 야수가 꽃 따위를 신경 쓰겠는가. 조직의 기본값에 여성은 없었다.
-
시선 평등한 피임의 출발 대한민국은 낙태를 주제로 제대로 된 토론을 한 적이 없다. 어감부터 둔탁한 ‘낙태’라는 단어에 대해, 사람들은 종교단체의 일방적 해석을 최초 정보로 접한다. 그러니 논쟁한들 방향이 정해진 경우가 많았다. 반대하는 이의 결의는 단호했고 찬성 쪽은 늘 조심스럽게 하고자 하는 말을 우회했다. “부득이한 임신을 한 경우에라도”라는 읍소는 “낙태는 살인이다!”라는 신념보다 무게감이 약했다. 자기운명결정권? 오랫동안 언급되지도 않았다. 낙태와 낙태죄는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낙태에 반대해’라는 개인의 의견 개진을 넘어 ‘낙태하는 자는 살인자다’라며 타인을 비정상으로 간주하는 공격이 허용되었다. 윤리라는 이름의 포장지로 사람을 낙인하는 걸 서슴지 않으니, ‘낙태죄가 폐지되면 생명경시 풍토가 생긴다’는 일관된 착각이 정설처럼 등장한다. 낙태죄가 폐지되면 여성들이 죄의식 없이 밥 먹듯 아이를 지울 거라는 우려, 나는 이런 흐름으로 이어지지 않은 토론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낙태하면 그만이라면서 폭력적인 성관계를 요구하는 남자들이 늘어난다면 따져볼 지점이라도 있는데, 이 사회는 언제나 여자만을 걸고넘어지는 데 익숙하다.
-
시선 ‘상황이 안 좋으니’의 폭력 집을 나와 버스로 제주공항으로 이동해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에 내려, 다시 대중교통으로 방송국에 도착할 때까지 마스크를 벗지 않는다. 발열 체크만 세 번을 거친다. 손에 알코올을 문지른 횟수가 오전에만 네다섯 번이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여러 관문을 통과한 패널들과는, 비말이 오가는 토크를 어쩔 수 없이 진행한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평소보다 더 통제하고 더 생략하고 있지만, 최종 단계에서 ‘2m 거리 두기’가 불가능한 업무가 있다. 그러니 코로나에 걸린다면 억울하다. 내 사례가 전문가들에게 ‘느슨해졌다’고 해석되어 주변에서 ‘제주에서 비행기까지 타고 가서 할 일이야?’라면서 빈정거린다면 속상할 듯하다. 전문가들이 기존의 틀을 바꾸라고 해서 엄청나게 협조했는데, ‘다 바꾼 건 아니니’ 나는 욕먹어야 할까? 글 쓰는 게 본업인 사람도 이 정도인데 사람을 만나야만 경제활동이 가능한 이들의 불안은 가늠조차 안 된다. 더 이상 쪼이는 게 불가능한 상황은 과연 느슨해진 것일까? 노골적으로 말해, 비대면 경제활동이 가능한 이들이 더 도덕적인 평가를 받을 확률도 높은 게 작금의 상황이지 않은가.
-
시선 책값이 비싸다고 여기는 이유 도서정가제로 시끄럽다. “지식 전달의 매체로서 책은 언제나 구할 수 있는 곳에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20만명 이상 동의를 했다니, 정가보다 할인받아 상품을 구매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이 된 것 같다. 지식은 무슨 돈으로 만들어졌는지를 물을 틈은 없다. 소원대로 저렴해지면, 그 책을 동네서점에서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지를 따질 새도 없다. 하긴 소셜커머스 유통업체의 주문화면을 보면 제값 다 주는 건 손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책은 쿠팡이나 알라딘 인터넷서점이나 가격이 동일하니 화도 날 만하겠다.
-
시선 ‘집이 없어’ 더 행복한 사회 10년 전, 나는 20년간 거주할 수 있는 서울시 장기전세주택에 1억원 초반대의 보증금으로 입주했다. 당시 친구는 같은 단지 같은 면적(전용 59㎡)의 아파트를 2억3000만원에 분양받았다. 20년간 대출금을 갚을 현실이 캄캄하다고 했지만 낙담은 잠시였다. 이후 집값은 2013년에 4억원, 2017년에 5억원을 넘겼고 2020년 6월에는 8억원이 되었다. 같은 단지의 84㎡ 아파트를 3억8000만원에 매입한 지인은 생활비도 쪼들려 저축을 못했다지만 최근 10억5000만원에 집을 팔았다. 처음에는 여길 꼭 사야 하냐면서 가족끼리 갈등이 있었다는데, 이내 늘 웃음꽃이었다.
-
시선 반칙은 누가 하고 있는가 당신이 공항의 보안검색요원이라면, 난도질된 몸으로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보려고 이토록 저열한 언어들을 뱉는가. ‘아르바이트 하다가 로또 취업한 인간들’의 말을 누가 고분고분 듣는다는 말인가? “공항 검색대에서 일해요”라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진 세상이 무탈할 거라고 믿는다면 착각이다. 협의가 부족했다지만 수천 시간 논의를 한들, ‘비정규직 주제에 선을 넘지 말라’는 전제는 요지부동이다. 내가 KTX 비정규직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을 다룬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사례를 수집하던 2008년도에도, 학력차별을 벽돌 삼아 지어진 성은 난공불락이었다. 생산적인 논쟁의 장을 유도해도 결론은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는 도둑놈 심보”였다.
-
시선 무례한 9월 신학기제 논의 코로나19 사태로 개학과 등교가 우여곡절을 겪고 있다. 우려 속에 강행하는 이유가 ‘입시’ 때문이라는 게 참으로 씁쓸하지만 교육부의 입장도 이해된다. 밑도 끝도 없이 ‘교육이 썩었다’는 말만 하는 사람들은 마치 지금이 기회인 것처럼 입시가 좀 어그러지면 무슨 대수냐면서 싹 다 바꾸자고 하지만, 우리는 그게 어그러지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되도록 세팅된 안타까운 사회에서 살고 있다. 시험 점수에 목숨 건 만큼 진학의 가치가 달라지고 이 결과가 인간의 생애 전체를 관통한다는 건 괴기스러운 현실이지만, 소소한 개인들은 일방적인 룰로 가득한 공간에서 단지 버티면서 오늘을 살며 내일을 기대할 뿐이다. 이들이 ‘기존의 그릇된 현실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희생양이 되어선 안 된다. 사회를 바꾸는 건 장기호흡이다. 개혁의 이유가 납득돼야 하고 변화의 강도와 속도가 합의돼야 한다. 그렇지 않은 설레발은 높은 분들에겐 과감한 실험이자 행정력을 키울 경험이고 한편으론 주목받기 위한 정치적 행보이겠으나, 실험실의 쥐가 된 사람들에겐 삶이 뒤틀리는 악몽에 불과하다.
-
시선 뉴스 상단에 ‘오늘의 산재’를 대학의 청소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경우를 종종 봤다. 곳곳이 쓰레기로 넘쳐나는 상황을 학생들이 불편함만으로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고 가볍게 강의시간에 다룬 바 있다. 그때 누군가의 당당한 말이 10년이 지나서도 기억난다. “수요와 공급이잖아요. 현재 급여로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저 사람들 말을 학교가 들어줄 필요가 없죠.” 대학의 분위기는 오래전부터 이랬다. 돈이 안된다는 학문은 무시당했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학과만 몸집이 커졌다. 구성원의 성분이 편향적이니, 여기서는 의견을 모은 들 비용절감, 이윤증가의 법칙만이 부유한다. 시장경제를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교수들이 많은 곳에서 학생들은 공부를 열심히 할수록 노동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말장난 안에서만 이해한다. 왜 양질의 일자리가 줄었는지, 왜 양질이 아닌 일자리에도 사람이 몰리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
시선 ‘묻따말’ 돈 좀 주면? 올 초 제주도로 이사를 왔다. 글 쓰는 게 직업인지라 가능했지만, 강연 수입이 없으면 굶어 죽으니 육지로 자주 올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한 달에 최소 세 번은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면서 적응할 필요도 없이 원래 섬에 살던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누구는 코로나19 덕분에 집필에 집중한다지만 배부른 소리다. 당장의 생활비가 없으면 원래의 궤도는 뒤틀린다. 아이들마저 장기 칩거 중이니 현금은 더 필요하다. 원고 청탁을 거절할 수가 없다. 두 달 사이 다섯 권의 추천사를 작성했고 이런저런 잡지에도 기고했다. 책도 몇 권 계약했다. 100만~200만원의 선금이 꽤나 무게감이 있는 시기라 별수 없다. 원래 써야 할 글에다가 추가된 작업까지 있으니 하루에 15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서 생활한다. 무릎 질환이 더 악화되는 과로 덕택에 두 달은 어떻게든 버텼다.
-
시선 우리는 더 위태로워질 것이다 이 사태가 끝나면 간격은 더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보았다. 누구는 재택근무를 하지만 누구는 마스크 하나에 의지한 채 계속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격리되어 자신의 휴가를 사용하는 이도 억울하겠지만 해고 통보를 받는 사람만큼은 아닐 거다. 같은 난리통이지만 다르게 허우적거리는 차이는 노동의 형태와 무관하지 않다. 세상이 멈추니 삶도 멈춰지는 사람들은 언제나 성실한들, 평소에 절약한들 추락을 막을 수가 없다. 약자라서 더 위험해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안정적인 일자리에 집착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대학 이름에 대한 강박은 증가할 것이다. 좁은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쟁하게 되면 금수저의 위력이 커지니 반대편의 수저들은 별다른 꿈도 꾸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서 힘들어한다. 방황하는 청년들이 이상한 공동체에 집착하는 건 당연하다. 지금처럼, 앞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