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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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새해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새해에는, 자유의 가치가 퍼졌으면 좋겠다. 자유라는 말 옆에 ‘보편적 가치’라는 수식이 어색하지 않게 붙는 건, 누가 그 보편에서 배제되었는지를 집요하게 살펴보라는 뜻일 거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평범해서 의식조차 되지 않는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한 희망사항이다. 이들의 부족한 자유를 채우는 게 사회의 역할이다. 그러니까, 자유라는 말이 많아질수록 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어디든지 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자유는, 언제든지 이동했던 누군가의 자유를 침해했다면서 저울에 올라가 몇 명 때문에 수천명의 출근시간이 방해받았다는 기계적 평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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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도어스테핑 특징은 도어스테핑 동기부여 강사는 자신이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임을 부단히 강조하더니 급기야 일찍 일어나는 사람 중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황당한 주장을 당당히 펼친다. 피식 웃음이 났다. 20년 넘게 새벽 3~4시에 기상 중인 내 경험에 비추어볼 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일찍 일어난다는 거 하나다. 무엇을 실천했다면, 그건 늦잠을 잔들 낮잠을 잔들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할 수 있는 거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하기에 급급해지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선택 자체를 무작정 ‘좋고, 대단하고, 바람직한’ 사람들의 특징과 연결한 후 반대편을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논리를 이어간다. 자동차를 끔찍하게 아끼는 사람의 특징은, 자동차를 아끼는 거다. 세차를 자주 하는 사람의 특징은, 세차를 자주 하는 거다. 이 행위에 전통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받는 ‘부지런함’이라는 해석을 과하게 입히고 ‘꼼꼼함’, ‘청결함’이라는 매력적인 양념을 치다 보면 이를 기준으로 타인과 자신을 구분하려는 유혹도 덩달아 커져버린다. 차 깨끗하게 관리하는 사람치고 게으른 사람 없다는 착각, 차를 보면 사람을 안다는 무례함 그리고 차 더러운 사람들은 일상생활도 엉망이라는 식의 망상이 등장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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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안전사고에 취약한 사회 나쁜 문화는 ‘나쁜 걸’ 장려한 결과가 아니다. “여자들은 문제가 많아”라는 성차별적 인식은 기질적으로 여성이 싫은 사람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남성성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파생된 편견이다. 남자는 이렇게 해야지 멋있다는 식의 주문이 많으면 “남자가 그것도 못해?”라는 핀잔에 이어 “너 여자야? 그런 것도 못하게”라는 빈정거림이 자연스레 등장한다. ‘천생 여자’라는 감탄사를 제어하지 않고 성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건 소용이 없다. 사회적 문제에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반대의 힘이 존재한다. 그걸 찾지 않는 해법은 소 잃고도 외양간조차 고치지 않는 격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사라지길 원한다면 사람의 얼굴, 몸, 옷차림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부터 짚어야 한다. 잘생긴 사람에게 환호하고 몸매 좋은 사람 찬양하고 옷 잘 입는 거 센스 좋다고 칭찬하는 게 왜 문제냐면서 의아해하겠지만, ‘그러면서’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시야가 형성될 수 없다. 1등은 성실함의 증표이니 모두가 박수 치는 게 마땅하다고 사회적으로 공인된 곳에서 학력차별 없는 세상을 기대하는 건 어렵다. 불가능하니, 선행요인을 광범위하게 비판해야 한다. 훈훈한 광경도, 상식적으로 느껴지는 순간도 ‘혹시나’ 이게 다른 나쁜 분위기로 이어지지는 않는지 물어야만 좋은 사회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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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대통령의 기분이 태도가 될 때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행동과 표정에 자신의 짜증을 기어코 투사하여 상대를 불편하게 하는 인간을 마주했을 때의 황당함이 있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자신은 실수하지 않으려는 것이고, 그 방법을 찾는다. 화가 나면 화가 사라질 때까지 무작정 걷는다는 이노이트족의 분노 해소법이 공유되는 것도, 기분 나쁜 상태로는 좋은 인간관계가 불가능해서다. 산책이나 명상이 현대인에게 치유의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그래서인지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자는 게 인간이라면 지녀야 할 보편적 덕목처럼 다루어지기도 하는데, 사람의 관계를 결정하는 사회적 위치가 지나치게 간과된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든다. ‘누가’ 그게 더 가능한지를 따져 묻고, ‘누구냐에 따라’ 어떤 여파가 형성되는지를 묻는다면 특정한 위치의 사람이 자기 기분을 더 신경 써야 함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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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런 말 듣고자 한 말이 아니다 집 앞에 새끼 고양이가 왔다. 평생 고양이를 만져본 적도 없지만, 모른 척하기엔 미안해서 급하게 물과 음식을 주니 잘 먹는다. 그 모습만으로도 울적한 기분이 잠시나마 사라졌다. 사진을 몇 장 찍어, 지친 일상에 고양이가 웃음을 준다는 글과 함께 공유했다. 그러자 밥그릇이 지저분하다, 오래된 물 같다는 등의 차가운 반응이 이어진다. 고양이를 있는 그대로 대해야지, 위로받기 위한 도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훈계도 등장한다. 그런 말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는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강아지와 산책을 하다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개와 동네를 돌아다니는 이웃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요즈음 왜 보이지 않았냐고 물어서 며칠간 아이가 아팠고, 그러다 보니 업무가 밀려서 정신이 없었다며 근황을 전했다. 어떤 답이 돌아왔을까? 나는 ‘강아지 산책의 중요성’에 대한 일장 연설을 들으며 좋은 견주가 되는 교육을 일방적으로 받아야만 했다. 다 맞는 말이었지만, 그 상황에 맞는 말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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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그 장애인은 왜 그리 친절했나 2016년 출간한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의 입을 통해 한국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한지 드러낸 책이다. 노량진에서 수십 명과 인터뷰를 했는데, ‘공직에 대한 열의’가 어릴 때부터 있었다는 식의 말은 당연히 등장하지 않았다. 저마다 이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은 참으로 안쓰러웠다. 대기업을 퇴사하고 다른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도 많았다. 기업이 노동자를 어떤 식으로 대하는지, 그들은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 과정에서 장애인 홍길동씨를 소개받았는데, 나는 기업의 갑질과 장애인 차별을 생생하게 증언해줄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이전 회사생활은 별문제가 없었다. 홍길동씨는 회사와 동료로부터 인기가 만점이었는데, 가장 일하고 싶은 동료로 뽑혔다는 감사패가 집에 수두룩했다. 이 정도로 좋은 인간관계인데 왜 퇴사를 했냐고 물으니 피식 웃으며 홍길동씨가 말한다. “인간관계를 좋게 맺지 않으면요? 저는 항상 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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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수포자를 무시하지 마라 수학을 잘하는 이들을 존경한다. 허준이 교수가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인류가 명왕성에 착륙하는 느낌이다. 판타지 같다는 말인데, 추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수학을 모르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의미를 알 턱이 없다. 그래서 짜증도 나고, 나보단 수백 배 정교하게 수학의 효능을 이해하는 이들이 부럽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2학년 사이에 수학을 포기한 것 같다. 여기서 포기란, 성적이 좋지 않다 수준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말하든 수학이라면 귀를 닫아버리는 완전한 무지의 상태를 뜻한다. 반복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수학적 사고를 중단하니, 그전에 배웠던 것도 휘발된다. 중학교 때까지는 수학이 어렵지 않았던 내게, 중학생인 아이가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는 모습이 나사 직원들처럼 보이는 이유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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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납작한 논쟁의 나라 최근 <민낯들>을 출간하고 독자의 항의 메일을 받았다. 사회의 이슈들을 짚어보는 글쓰기가 업인지라 종종 욕설로 도배된 불만을 접하는 게 익숙한 편이지만 너무 구체적이라 놀랐다. 책의 첫 장인 ‘고 변희수 하사’ 사례를 언급하며 왜 트랜스젠더를 옹호하냐, 성소수자 입장만 대변하는 이유가 뭐냐, 학생들이 읽고 동성애자 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 등의 내용이었다. 누가 읽을까 봐 중고책으로도 안 팔 거다 등의 악담도 덧붙였다. 그래도 나는 친절히 장문의 반론을 보냈다. 하지만 간단한 답이 돌아왔다. “역시 자기만 옳은 줄 아네요.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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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자유는 ‘없는 자’만이 느낀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일정한 경제적·교육적·문화적 수준이 없이는 자유가 불가능하니, 자유가 유린된 이들을 돕기 위해 연대해야 함을 강조했다. 선거운동 당시 주 120시간 노동이라는 초현실적인 말을 뱉은 거에 비하면 약간은 균형을 잡으려고 한 것 같다. 다른 논란이었던 최저임금보다 더 최저로 임금을 받고도 일할 자유도, 취임사대로라면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성찰의 결과물이라기보단, 중학생들이 ‘자유’라는 주제로 작문을 할 때 툭툭 던지는 추임새 수준이었다. 개인의 자유가 제일 중요하다, 그리고 자유가 없는 이들을 도와주자는 얼핏 아름다워 보이는 말은 그게 좋은 사회 아니냐는 의식구조로 이어지지만 ‘연대’를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약자를 향한 시혜적 시선 안에서 해석하게끔 하는 큰 문제를 지닌다. 그래서 ‘너희들이 누리는 자유를 내게도 달라’는 장애인의 지하철 시위는 쉽사리 ‘내 자유를 침해하고 있는’ 비문명적 시위로 포장된다. 그 자유, 그러니까 지하철을 이용하여 제때 이동하는 일상이 출근시간에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어마어마한 불평등을 전제로 만들어졌음은 한순간에 휘발된다. 보편적 자유를 위해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한 괴상한 사회는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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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우물이 깊어질수록 대학 강의를 할 때,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것들’이란 주제로 에세이 과제를 내곤 했다. ‘사회화’를 입체적으로 느껴보자는 의도였지만, 자기소개서에 익숙한 학생들은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스스로를 포장하는 버릇을 감추지 못했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지내서” “1년 넘게 어학연수를 하면서” “몇 개월간 유럽 배낭여행을 해보았기에” 등을 언급한 후 밑도 끝도 없이 ‘그래서’ 세상 보는 눈이 넓어졌다,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났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증거는 한 줄도 없었다. 나는 이들과 학기마다 불평등에 대해서 토론했고 이를 응축한 것이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이다. 제목처럼, 노력이 부족한 결과를 차별하는 건 당연하다는 사람들이 많아진 시대를 짚었다. 견문이 넓어졌다는 아무개가 “비정규직 노동자가 날로 정규직 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고 말하고,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산다는 걸 느꼈다는 이가 “경쟁력 없는 자는 도태되어도 마땅하지!”라고 목소리를 높이면 매우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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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혼밥은 죄가 없다 군대 훈련소 시절, 정치인 아무개가 부대 방문을 해서 훈련병과 식사하고 기자들이 사진 찍는 시간이 있었다. 재수 없게도 내가 높으신 분들 앞에 앉게 되었다. 모자에 별이 달린 장군은 격의 없는 소통의 자리이니 편하게 말을 하라고 했지만, 나는 전날부터 외우고 연습했던 대로 “괜찮습니다!”, “맛있습니다!”만 외쳤다. 먹지 못하는 오징어가 반찬으로 나왔지만 씩씩하게 먹었다. 24년 전의 일이지만, 아직까지도 내 인생 가장 불편했던 식사로 기억되어 있다. 대학원 건물에는 교수 전용 화장실이 있었다. 이를 특권이니 그러면서 문제 삼은 학생은 없었다. 오히려 화장실에서만큼은 교수와 마주칠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권위적인 게 싫다는 어떤 교수는 전용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학생과의 소통을 위해 술자리를 즐겼던 교수는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타는 게 효율적이지”라는 말을 조언이랍시고 했다. 학생들 누구도 대꾸를 못했다. 그에게 격의 없는 자리란, 자기 생각을 일방적으로 말하는 혼자만의 자유로움에 불과했다. 밥을 함께 먹든, 술을 함께 마시든 그건 소통과 무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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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갈라치기는 누가 하고 있는가 대학에서 여성학을 강의했던 2008년의 일이다. 페미니즘에 관심 없다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새내기들은 ‘잘 몰라요’ 정도로 입장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싫어도, 최소한 대학 강의실에서 그렇게 말하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여겼다. 지금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기초적인 예의가 존재했던 시절이랄까. 그래서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는 식의 접근도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가며 말을 할 수 있었다. 편견을 앞세워 으르렁거리지 말고, 몇 단계만 순리대로 사고를 넓히면 이 표현이 ‘남자인’ 나, 너, 우리라는 개별적 존재를 범죄자 취급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수가 이해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