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찬호
<민낯들: 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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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여자도 군대 갔다면, 달라졌을까 76세이신 어머니는 명절을 제외하고도 1년에 여섯 번의 기제사를 준비하신다. 50년째다. 이제는 친척들도 돌아가셨거나 고령이시기에 찾아오시는 분도 거의 없다. 심지어 82세 아버지와 단둘이서 기제사를 지내시는 경우도 흔하다. 그래도 등장음식 만큼은 변함이 없다. 절하고 일어나는 것도 벅차하시지만, 새해 달력에는 언제나 제사일부터 적으신다. 할 만큼 했으니 이제 그만하자, 해야 된다면 파격적으로 횟수를 줄이자, 하더라도 음식을 간소하게 하자 등등의 논쟁이 간헐적으로 있었지만 아버지 평생의 가치관이 수정되진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고생하시니 생각을 달리할 때가 되었음을 본인도 아시지만 엄숙하게 여겼던 평생의 기준을 끊어버리는 게 쉽지 않으신 듯하다. 그렇게 ‘성차별’은 일상이 되었다. 할머니 제사에서도 할아버지 술잔부터 따르는 게 원칙인 남존여비 유교행사가 어찌 성별 평등하게 준비되겠는가. 하지만 아버지 입에서 “여자는 군대를 안 가니까, 당연히 해야지”라는 말이 나온 적은 없다. 어머니의 체념 안에 “여자도 군대를 갔으면, 달랐겠지”라는 추론이 비친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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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들뜨면, 실수한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 나간 적이 있었다. 대기실에서 PD는 내가 쓴 책이 오늘 주제와 일치해서 모셨다는 식으로 나를 진행자에게 통상적으로 소개했다. 보통은, 나는 부끄러워하고 진행자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라는 거짓말을 하며 인사를 주고받는데 그는 “나는 모르는 책”이라면서 얼마나 팔렸는지를 노골적으로 묻는다. 별로 안 팔렸다고 하자 웃으면서 이런다. “내 책은 ○○만부 팔렸는데.” 들뜨면, 실수한다. 성과가 눈에 보이면 들뜬다. 성취가 이어지면 흥분한다. 여기에 ‘남보다’라는 변수가 개입해 사람과 사람이 위아래로 분류되면 실수한다. 오만과 거만을 ‘멋’인 줄 안다. 건방과 교만을 ‘재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모든 것을 수직화하는 능력주의 정신이 일상을 지배하는 한국 사회 어디서든 등장한다. 능력주의가 문제인 건, 사람 따라 차이를 둬서가 아니라 그 차이가 사람을 들뜨게 해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실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서열은 ‘공부의 결과일 뿐’이라는 납작한 해석에 갇히고 소득격차는 ‘어쩌라고’라는 한 단어로 반박된다. 이 논리, 여기저기에 흔하다. 집값이 오르면 들뜬다. ‘운’이라고 하면 될 걸 꼭 ‘열심히 살아서 보상받았다’고 말하고야 마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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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의사들은 무엇을 감추는가 지역신문에 기고된 의사들의 칼럼에서는 종종 유사한 한탄이 등장한다. 진단을 ‘못 믿겠다며’ 서울의 대형병원 투어를 하느라 치료 시기를 놓쳐 더 큰 고통을 감수하는 환자들의 안타까운 사례 말이다. 유별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지방에서는, 다쳐서 지방에서 치료받으면서도 ‘왜 서울로 안 갔는지를’ 주변에 자꾸만 해명해야 하는 우주의 기운이 실제로 존재한다. 이런 분위기를 탓하면, 자신은 병원 갈 때 의사가 어느 대학 나왔는지도 꼼꼼하게 확인한다는 말이 돌아오는 세상이다. EBS 프로그램 <명의>는 좋은 취지였겠지만, 명의에 출연한 의사 명단이 ‘오늘 생생정보통에 소개된 맛집’처럼 떠도는 시대의 단면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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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비행기에서 삶을 묻다 제주에 살면서 비행기를 자주 이용했다. 할 줄 아는 게 기록이라, 몇년간 차곡차곡 쓸데없는 것들을 모았다. 출발·도착 예정시간과 실제시간, 지연 횟수와 이유, 비행기 내부에서 본 것들 등등. 국내선에 국한된 개인 경험이지만 데이터를 누적하니,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삶의 태도가 왜 중요한지도 느껴지고, 아기자기한 세상 이치도 어렴풋이 보인다. 놀라지 마시라. 비행기가 탑승권에 적혀 있는 시간에 이륙할 확률은 1% 미만이다. 제때 입장이 시작되어도, 이런저런 짐을 든 150~180여명을 20분 만에 태우는 건 어렵다. 일부러 가장 먼저 탑승해 기록을 해보니 출입문 닫힐 때까지가 평균 24분, 이륙까지는 35분이 걸렸다. 모든 게 순조로워도 2분에 한 대가 뜨고 내리는 김포나 제주공항에서 활주로 대기는 일상이다. 그러니, 10시 출발 비행기가 9시59분에 이륙한다면 그날이 행운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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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전체주의 싫어하는 대통령님께 존경하는 대통령님. 지금, 자유전체주의를 맹종하며 공동체를 교란하는 반인권세력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차별할 자유도 있다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한국 사회의 혐오 문제를 한 아파트에서 임대아파트와 같은 학군 배정을 반대하는 게시물을 올린 사례로 언급한 후 어떤 항의를 받았을까요? “내 아이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게 왜 차별이냐! 내 자유지.” 존경하는 대통령님. 지금, 자유전체주의를 추종하며 역사를 왜곡하는 반민주주의 담론이 곳곳에서 튀어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민주주의가 보편적 인권을 누리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군부독재 시절 빈번했던 인권유린의 실상을 짚을 수밖에 없죠. 어떤 e메일을 받았을까요? “왜 전직 대통령을 나쁘게 묘사하냐! 빨갱이 잡은 게 인권탄압이냐! 당신의 사상이 수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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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학생인권조례가 용의자? 많은 교사들이 ‘내가 경험한 최악의 학부모’를 말하고 있다. 일부 보호자들의 행패가 일상 전체를 지배하기에 교사라는 사람의 권리(right)를 보장해 달라는, 그걸 침해하는 것으로부터 지켜 달라는 얘기일 거다.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하청업체 직원들이 당하는 갑질과 유사하다. 모든 비위를 맞춰야 한다. 서비스업 종사자들의 고충도 겹쳐진다. 고객불만이 접수되면 이유불문 끝장나는 것처럼, 민원이라는 창구가 목소리 큰 사람에게 오히려 과잉 대표성을 부여하는 현실에 동네북 교사들은 매일 조마조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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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나는 너보다 더 힘들어야 한다 내가 결혼하기 전, 그는 결혼해 봐야 진짜 힘든 삶이 시작된다고 했다. 내가 결혼을 하자, 그는 애가 있어야지 진정한 고생이라고 했다. 내게 아이가 생기자, 그는 하나일 땐 어떻게든 살겠는데 둘이니 장난 아니라면서 하나면 행복한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게 또 아이가 생기자, 그는 딸은 생각보다 손이 안 간다면서 연년생 아들 둘 키우니 죽겠다고 했다. 내가 월세 살 때, 그는 2년마다 전세금 오르는 거에 비하면 월세는 큰 부담 아니라고 했다. 내가 전세 살 때는, 전세는 자기 돈 돌려받기라도 하지 은행 대출 잔뜩 받아 이자는 꼬박꼬박 내는데 집값이 오르지 않으면 얼마나 초초한지 아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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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독서의 효과는, 독서입니다 조심스레 독서토론 학원을 준비 중이다. 책을 자주 접하는 내 직업을 활용해야만 먹고살 수 있다는 우주의 기운을 느껴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능 여부를 타진했다. 연령을 달리하고 규모를 조정하면서 모의실험 중이다. 유의미한 수익으로 이어질지 의문이라 글쓰기를 병행할지, 커피도 팔아야 할지 구체적인 건 아직 없지만, 한쪽 벽면을 어찌할지는 진작 정했다. 거기엔 큼직한 글씨로 학원의 철학이 이렇게 적혀 있을 거다. “독서의 효과는, 독서입니다.” 흐름을 거스르겠다는 당찬 혹은 무모한 포부이기도 하다. 나는 여러 글에서 독서‘법’이란 말이 지나치게 등장하는 시대를 비판했다. 책이 우등생이나 명문대 등의 단어와 결합돼 입시전략 안에서 사용되니 ‘기적의 독서’라는 말이 흔해졌다. 지름길을 알려주겠다는 이들은 작가에 대한 관심을 넓히고 토론의 확장을 유도하는 수준이 아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하지 마라 등 야전교범 수준의 직설적 지시를 내린다. 그래야지만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인재가 된다는데 그럴 자신, 내겐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확신, 느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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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서울대학교 강의 인사말 안녕하세요. ‘대학의 위기’를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된 오찬호 작가입니다. 1~2년에 한 번씩은 서울대에 오는데, 매번 ‘서울대입구역’에서 학교가 엄청 멀다는 걸 잊어서 몹시 허둥거리네요. 버스 타는 줄도 항상 헷갈려요. 게다가 또 잘못 내려, 미로공원 같은 캠퍼스를 헤매면서 강연장소를 찾죠. 서울대가 불편한 건 이것만이 아닙니다. 비슷한 주제로 여러 번 강의를 했더라도, 여기에서라면 준비를 더 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죠. 좋은 태도겠지만, 충분히 했는데도 또 합니다. 시급이 낮아지는 비효율적인 상황인 거죠. 저는 <진격의 대학교: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대학의 자화상>을 출간하며 지겹도록 대학의 위기를 다뤘지만, 또 자료를 검토하고 왔어요. 다른 강연보다 확실히 ‘좀 더’요. 여기서부터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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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이상한 저출생 대책 회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랬을 거다. 국민의힘 정책위원회가 저출생 대책이랍시고 검토했다는 ‘자녀 3명인 20대 남성의 병역 면제’ 안건은 단순한 의견을 넘어 초벌구이는 되었기에 외부에 알려졌을 거다. 상식적이라면 비슷한 소리가 등장하자마자 “뭐? 누가 알까 봐 부끄럽다!”라는 한탄과 함께 버려졌어야 하지만 아니었을 거다. ‘올해의 가장 수준 낮은 아이디어’가 오갔을 회의실을 상상해 본다. 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꾸려진 위원회에서는 저출생을 논하면서도 투박한 공정론을 전면에 내세웠을 거다. 그것에 심취했던 누군가가 툭 내뱉었겠지. “기존의 저출생 정책은 여성만 특혜를 얻는 식이었어!” 여자는 권리만 말하고 의무는 모른다는 말에 익숙했던 옆사람이 맞장구를 쳤겠지. “맞아. 회사에는 출산을 벼슬처럼 여기는 여자들이 많아. 뼈 빠지게 돈 버는 건 남편들인데 말이야.” 이를 논리적이라고 여겼던 건너편 아무개가 추임새를 넣겠지. “남성들이 역차별받는 정책 말고, 남자에게도 혜택을 주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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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사교육의 신께서 말씀하시니 유명 학원강사의 인생조언을 의지와 무관하게 들을 때가 있다. 스타강사의 팩트폭격 따위로 이름 붙은 짧은 동영상이다. 동기부여, 자기계발 등의 키워드를 검색한 적이 없어도 어떻게든 만난다. 누구에게나 유용하다고 여기는 보편적 알고리즘인지, 비판받을 지점이 없다고 인공지능이 인식해서인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연설은 시시때때로 다가온다. 구성은 동일하다. 마이크를 든 깔끔한 옷차림의 사람이 칠판 앞에 등장한다. 메시지는 흡사하다. 사례는 달라도, 한 번 사는 인생 모든 걸 걸어보라는 결론이다. 동반되는 에너지도 다르지 않다.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다그친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혼낸다. 훈계의 근거는 “자신이 살아보니 알겠더라”는 진부한 추임새로 설명되지만, 부자인 그들을 꼰대라 하는 사람은 없다. 신(神)이 된 이들의 입에선 빈약한 강론이 흐른다. 국어, 영어, 수학 문제집 어디에도 사회의 불평등을 이해할 수 있는 문법이나 공식 하나 없지만 강사들은 ‘노력하면 다 된다’면서 으르렁거린다. 심지어 사회 강사가 사회 탓하지 말라는데, 게다가 당당하다. 사교육의 신들이 일치단결하니 ‘모든 이들의 조건은 같다’는 이상한 평등론이 확장되고, 그 크기만큼 세상의 불평등은 개인의 몫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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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다정함의 민낯 그 작가는 평화의 섬 제주가 좋아서 이주했다는 말을 강연 중에 100여번은 뱉었다.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는 좋은 사람들과 다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단히 강조했다. 알고보니 같은 동네 주민이었고 인연이 되어 잡담할 기회가 생겼다. 4·3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토벌대가 서너 살 아이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게 했다’는 생존자의 증언이 있는 빌레못동굴이 근처에 있다, 뭐 그런. 하지만 평화의 섬 제주를 사랑한다는 다정한 이의 대답은 날카로웠다. “왜 어두운 이야기만 해요?” 종종 마주하는 풍경이다. 부모가 돌아가며 그림과 악기를 가르치는 그룹에서, 나는 독서토론을 하곤 했다. 제주에 살지만 제주의 역사를 잘 모르는 육지 사람들, 게다가 아이들에게 4·3은 매우 바람직한 소재였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자세로 공부하며 다정하게 사람을 대한다는 보호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왜 부정적인 이야기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