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최신기사
-
송두율 칼럼 코로나 지옥문 앞에서 지난 4월21일 1차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일원화된 유럽연합의 코로나 백신 공급체계라지만 인구 1000만의 작은 나라 포르투갈까지 백신 공급이 제대로 될지 우려했다. 그러나 백신 접종의 속도는 지금 독일이나 프랑스와 비슷하다. 올해 초 포르투갈은 유럽에서 코로나 위기가 가장 심한 나라 중 하나였으나 얼마 전부터 가장 낮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해외여행은 여전히 통제가 심하지만 일상생활은 거의 정상화되었다. 반년 가까운 국가비상사태에 따른 엄격한 통제 덕분이다. 백신을 맞기 전날 옥스퍼드대학 백신그룹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아스트라제네카’를 개발한 둘째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무더웠던 작년 여름, 하루도 쉬지 못하면서 내놓은 결과를 부모가 공유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유감스럽게도 아스트라제네카는 아니었다. 백신 접종은 의무도 아니고 선택권도 없다.
-
송두율 칼럼 4월에 떠올리는 상념 코로나19 사태가 급속하게 악화된 2020년 말 포르투갈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단어가 무엇인지를 두고 설문조사가 있었다. ‘코비드19’나 ‘팬데믹’이 아니라 ‘사우다지(Saudade)’였다. 전문적인 번역가도 다른 외국어로 옮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우다지 - 포르투갈 사람만이 이 감정을 알 수 있다. 오로지 그들만이 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단어를 지녔기 때문이다”라고 포르투갈의 민족시인 페르난두 피수아(Fernando Pessoa, 1888~1935)도 이를 강조했다. 사우다지의 정확한 어원은 여전히 분명치 않다. ‘외로움’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또는 ‘우울’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널리 이용되는 <후아이스(Houaiss) 포르투갈어 사전>은 이 단어의 복합적인 의미를 “불완전함에 대한 어떤 우울한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부재로 인해서 또는 과거에 특별하게 원했던 체험이나 즐거움이 사라진 상황을 뒤돌아보는 생각과 연관되어 있다”고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
송두율 칼럼 자유주의의 위기 지난 일요일에 있었던 독일 남서부에 있는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회의 선거 결과가 발표되었다. 녹색당 32.6%, 기민당 24.1%, 사민당 11.0%, 자유민주당 10.5%, 그리고 극우 정당인 대안당 9.7%였다. 독일 자유주의의 종가(宗家)답게 이 지역에서 자유민주당은 선전했다. 그 밖의 지역에서는 의회 진출의 하한선인 5%를 겨우 턱걸이하는 상황이다. 한때는 사민당이나 기민당과 함께 중앙정부를 구성했던 당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직전에 발표된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전 세계적인 범위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완전 승리를 선언했다. 그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요즘, 특히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자유민주주의 또는 자유주의의 위기에 관한 저술이 눈에 띄게 많다. 저자의 성향도 자유주의로부터 보수주의에 이르기까지 꽤 다양하다.
-
송두율 칼럼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30여년 전의 일이다. 1988년 12월, ‘내재적’ 북한연구 방법을 제기한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나의 짧은 글은 많은 논쟁을 낳았다. 이를 계기로 해서 북한연구에 활력도 생겼지만 일부에서는 단순히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나서 소련이 해체되었고 중국에서도 톈안먼 사태가 발생, 지구적 범위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완전 승리를 구가하는 ‘역사의 종언’이라는 담론이 풍미하는 분위기 속에서 내재적 연구 방법은 대상이 바로 북한이었기에 예외적인 주장이라고 볼 수 있었다. 사회주의 대국이 해체되거나, 아니면 극심한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작고 낙후한 북한이 결코 더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 상식처럼 되었다. 단지 그 시기가 언제 올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
송두율 칼럼 트럼프의 유산 지난 1월6일 워싱턴의 국회의사당 건물 안팎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태를 두고 거의 매일 엄청난 양의 논평이 쏟아지고 있다. 이의 대부분은 사태의 발단은 대선에서 패배한 트럼프가 이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그의 지지자를 선동한 데 있다고 본다. 13일 하원에서 통과된 그의 탄핵 사유도 내란 선동이었다. 이번 사태를 전하는 사진들을 보면서 나는 두 장면을 동시에 떠올렸다. 하나는 1981년 2월23일 새 총리를 선출하는 스페인의 국회의사당에 일단의 무장 경찰이 난입했던 장면이다. 1976년에 사망한 독재자 프랑코의 추종세력인 이들에 대한 군 통수권자인 후안 칼로스 1세의 단호한 거부로 사태는 수습되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장경찰이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자리에 앉아 여유 있게 담배를 피우고 있는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릴리오의 모습이었다. 일생을 파시스트와 싸웠던 그이기에 그들의 위협 앞에서도 담담했다.
-
송두율 칼럼 코로나 거울 ‘잃어버린 1년’이라는 말이 나도는 이 한 해의 끝자락에 우리는 와 있다. 코로나19의 대유행으로 올해 봄에 있었던 1차 록다운에 이어 성탄절과 연말을 코앞에 두고 유럽 곳곳에서 2차 록다운이 시작되고 있다. 내가 반세기 넘게 살았던 독일은 물론, 1년 전에 이주해서 사는 포르투갈도 그렇다. 한국의 사정은 이보다 낫다고 하지만 낙관만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다. 오랫동안 과도한 소비문화와 결합한 축제지만 기독교 문화권에서 성탄절이 지니는 특수한 의미를 생각할 때 록다운의 충격은 역시 작지 않다. 가톨릭의 전통이 강한 포르투갈에서 성탄절은 가족과 친지가 만나는 일 년 중 가장 귀하게 여기는 축제의 시간이다. 이 시간을 놓칠세라 노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코로나 무료검진을 받기 위해서 보건소 앞에 줄을 선다.
-
송두율 칼럼 11월 단상 11월의 설악산 단풍을 담은 사진을 받아보았다. 독일에선 볼 수 없는 자연이 빚어낸 화려한 색조다. 독일의 11월은 비, 바람 그리고 어두움이 가득 찬 시간의 시작이다. 뛰어난 토목기사이자 시인인 하인리히 자이델은 시 ‘11월’에서 “이런 달을 정말 칭찬해야 한다/ 아무도 이처럼 날뛰지 않는다/ 아무도 이처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다/ 게다가 햇살도 없이/ 아무도 이처럼 구름 속에서 시끄럽게 굴지 않는다/ 아무도 이처럼 폭풍으로 으스스하게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얼마나 축축하게 만드는지/ 그렇다, 정말 굉장하다”라고 독일의 11월 날씨를 저주했다. 작년 여름 포르투갈의 따뜻한 해변마을로 이주하기 전까지 아침 운동 때 나는 거의 매일 이 시인이 누워있는 공동묘지 옆을 지났다.
-
송두율 칼럼 ‘좋은 사람’은 어디에 많은 전문가가 이미 예견했던 것처럼 유럽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다시 코로나19 위기로 치닫고 있다. 백신이나 확실한 치료 방법이 없는 상황은 올해 봄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동안 방역수칙의 준수나 방역행정의 개선 등으로 위기에 대처한 경험은 있으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위기의 장기화에 따른 누적된 피로감은 종종 사회적 불만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코로나 위기 관리는 흡사 정치의 모든 것처럼 되었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는 모습도 곳곳에서 보인다. 이와 더불어 코로나가 창궐하는 지역이나 국가에서 오는 여행객의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는 유럽 통합이라는 오래된 희망마저 어둡게 만든다. 유럽이 냉전기를 포함한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이렇게 이동과 이주의 자유가 심하게 제한당한 적이 없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가 상황을 일변시켰다.
-
송두율 칼럼 음모론의 시대 지금 유럽은 코로나19와의 힘겨운 전쟁 중에 이에 못지않은, 또 다른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 바로 음모론과의 싸움이다. 유럽연합은 웹사이트에 코로나 바이러스에 관한 가짜 정보와의 싸움이라는 페이지를 설정했다.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을 어떻게 구별하며 온라인 매체에 떠다니는 각종 음모설에 대처하는 방법에 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건이나 상황은 반드시 그 배후의 비밀스러운 힘으로 조직된다고 믿는 음모론은 우선 세계를 선과 악의 세계로 가려서 본다. 이어서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을 악의 화신으로 지목하고 이를 집중 공격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세계 지배를 꿈꾸는 중국이 우한에 있는 한 실험실에서 의도적으로 배양해 세계에 퍼뜨렸다거나 빌 게이츠가 자신이 개발한 코로나 백신을 통해 전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게 지금 나도는 대표적 음모설이다.
-
송두율 칼럼 믿음과 앎 유럽에서는 지금 코로나19 확산 경고등이 다시 켜졌다. 나름대로 위기관리를 잘해왔던 독일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도 여름 휴가철을 보내면서 많은 사람이 긴장을 풀고 방역수칙을 잘 지키지 않는 데 원인이 있다. 코로나19 사태 대응에서 지금까지 모범적인 나라 중 하나로 평가받았던 한국의 최근 상황에 관한 보도나 논평도 눈에 띈다. 특히 ‘신천지교회’나 ‘사랑제일교회’와 같은 일부 개신교가 원인이 된 코로나19 확산에 관심을 보인다. 집단감염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주일 대면예배를 꼭 보아야 한다는 한국교회 안팎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진단하고 있다.
-
송두율 칼럼 수치심의 역설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구나 다 크고 작은 수치심을 경험한다. 자신 또는 자신이 속하는 집단의 잘못 때문에 발생하는 불행한 정서다. 이는 그러나 죄책감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행위자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밖으로 나오기 힘든 데 반하여 죄책감은 용서를 비는 것처럼 행위자의 밖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다. 그래서 심리상담에서는 수치심이 있는 곳에 죄책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행위자가 적극적으로 자기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한다. 너새니얼 호손의 잘 알려진 소설 <주홍글씨>가 있다. 여주인공 프린은 간통죄로 인해 가슴에 주홍글씨 A를 항상 달고 살아야만 했지만 이를 감수하고 강인한 여성으로 거듭난다. 청교도 목사 딤스데일은 그가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지녔던 주홍글씨 A를 공개하면서 자신이 바로 간통의 장본인임을 고백하고 죽는다. 프린과 딤스데일의 주홍글씨는 같지만 프린의 것은 죄책감, 딤스데일의 그것은 수치심의 상징이다. 이처럼 죄책감은 긍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만 수치심은 자기 존재의 파멸로 이끌 수 있다.
-
송두율 칼럼 정치와 언어 ‘막말 정치인’을 다음 국회에서는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선거는 이미 끝났지만 국회는 아직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거대여당을 만들어준 ‘민의’를 내세우며, 야당은 ‘의회독재’라는 논거로 대치상황을 각각 정당화한다. 남북 간에도 그 어느 때보다 비난과 증오를 담은 거친 언어가 오갔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6·15’ 20주년을 맞아 내보낸 담화문을 “본말은 간데없고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과 오그랑수(속임수)를 범벅해놓은 화려한 미사여구”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 북의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문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