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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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비관과 낙관 사이에서 코로나19 사태로 불안한 나날이 지속되는 가운데 미국 미니애폴리스에서 발생한 백인 경찰관들에 의한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은 미국 전역의 격렬한 시위로 이어졌다. 열악한 생활조건 때문에 코로나19로 인한 희생자 비율이 백인의 그것보다 월등히 높은 흑인들의 불만은 1968년 4월 인권운동지도자 마틴 루서 킹 목사의 암살로 인해 폭발했던 인종분규 이래 가장 큰 분출구를 찾았다. 이처럼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얼마 전 베를린 지하철에서 한국 유학생 부부가 당한 사례처럼 코로나19 위기와 인종주의가 섞여 내는 파열음은 이제 유럽 여러 곳에서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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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닫힌 공간, 열린 공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와 더불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동안 자리 잡은 ‘거리 두기’ ‘록다운’ ‘셧다운’과 같은 단어를 들을 때면 나는 가끔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어릴 적에 들었던 나병 환자를 수용했던 소록도를 둘러싼 괴기한 이야기나 대학 시절 친구들과 시간 가는지 모르고 어울리다가 야간통금에 발이 묶인 경험도 떠올리게 된다. 작년에 이주해서 사는 이곳 알가르브에서 마주치는 상대방이 혹시 코로나19에 감염되었는지 몰라 잠시 불안하게 되고 매일 아침 산책하는 해변도 통금에 걸렸기 때문에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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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시스템 리셋 코로나19 사태가 지구촌의 구석구석에서 맹위를 떨친 지도 100일이 지났건만 이 재앙이 앞으로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직도 어떤 방역체제가 과연 옳은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이 없다. 낙관과 희망에 기대어 비정상적인 일상생활을 꾸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에서도 한국의 방역체계에 대해 외국의 평가가 아주 좋다는 기쁜 소식이 들린다. 설사 백신과 치료체계의 개발로 코로나19가 몰고 오는 재앙을 머지않아 막을 수 있다 치더라도 앞으로 지구촌의 우리 삶이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에 대한 물음이 뒤따른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한다는 미국과 유럽국가들이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이 매우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마스크 대란은 물론 위독한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집중치료장비마저 부족해서 환자의 생사여탈에 관한 결정을 의사 스스로가 내려야만 하는 기막힌 상황까지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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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코로나19 시대의 삶 지금까지 코로나19 사태로부터 비교적 안전했던 이곳 포르투갈의 알가르브 지방에 며칠 전 첫 확진자가 발생, 수도 리스본으로 이송되어 격리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거의 휴양산업에 의존하는 이 지역의 경제가 심히 어려워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추세니 어찌할 수 없고 그래도 이탈리아보다는 상황이 아직 양호하다는 안도감 속에서 이곳 주민들은 스스로를 위로한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같이 인간이 자초한 재앙도 잦지만 자연의 한 부분인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이 맞닥뜨리는 재해도 많다. 32만명의 사망자를 낸 아이티의 대지진(2010)이나 인도양 전역을 강타해서 23만명의 사망자를 낸 쓰나미(2004)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다. 물론 순전히 자연재해라고만 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 스스로가 여러 가지로 재난을 더 키웠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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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포퓰리즘 파노라마 최근 한 주 정부의 구성을 둘러싼, 예상치 못한 투표결과로 독일이 시끄럽다. 옛 동독지역에 속한 튀링겐주의 주지사를 선출하는 투표에서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과 보수당인 ‘기민당’의 지원으로 소수당인 ‘자민당’ 후보가 제1당인 ‘좌익당’의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극우정당이 이제 정치의 결정권을 쥘 수 있게 되었다는 충격은 1932년 선거에서 나치가 정권을 합법적으로 장악했던 악몽까지 떠올리게 하였다. 안팎의 강한 압력으로 당선자는 결국 자진해서 사퇴했고, 메르켈 총리의 후임자로서 차기 수상후보로 지목된 크람프카렌바워도 기민당의 당대표 직을 사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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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가짜뉴스의 시대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 “말이 말을 낳는다”는 속담이 있다. 교통수단과 정보매체가 제한되었던 때에도 어떤 특정한 정보나 뉴스가 빨리 전달되고 확산하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특히 격변과 혼란의 시기에 백성들은 자신들의 꿈과 희망을 담은 메시지를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집권자들은 이를 유언비어(流言蜚語)를 퍼트리는 행위라며 추적하고 탄압했지만 정상적인 언로(言路)가 막힌 상황에서 정보나 소문은 빠르게 여러 샛길을 만들며 제 갈 길을 찾기 마련이었다. 다양한 정보매체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오늘날에도 이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과거처럼 언로가 막혀서 생긴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많은 언로로 인한 혼란이 문제다.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누구나 자신의 정보나 의견을 전달할 수 있지만 집단이 만들어 내는 정보에 개인이 쉽게 휩쓸리는 위험도 그에 따라 커졌다. 디지털 문명의 비판자인 제란 러니어는 이런 현상을 중국 문화혁명기의 ‘홍위병’에 빗대 ‘디지털 모택동주의’라고 불렀다. ‘조국사태’를 둘러싼 소셜미디어 내 갑론을박의 모습도 이에 거의 가까운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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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시간에 대한 단상 한 해를 또 어김없이 보내게 된다. 지중해변은 춥지 않아 연말이라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는다.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포르투갈의 세밑 분위기는 그러나 이런 날씨와는 별 상관이 없다. 미국에서 비롯된 추수감사절의 다음날, 이른바 ‘검은 금요일’부터 시작되는 대대적인 할인상품의 공세로 많은 고객이 붐비는 상가의 모습은 독일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때가 되면 모두 알게 모르게 시간이라는 괴물에 쫓기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시간은 그 자체의 힘으로 스스로를 보여줄 수 없고 단지 공간과 시간 속에 함께 움직이는 어떤 다른 것에 의거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오랫동안 종교적 의식이나 관행을 따라 울렸던 교회의 종소리는 신의 섭리를 담고 있는 영원한 시간을 상기시켰다. 시간을 정확히 계산하고 이에 따라 우리 삶을 합리적으로 꾸릴 수 있다는 믿음은 르네상스 시기에 북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시계와 함께 뿌리를 내렸다. 장소나 날씨에 제약받지 않는 시계는 인간 스스로가 펼치는 복잡한 속세의 항시적인 동반자가 되었으며 일상생활의 총체적인 관리자의 역할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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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비난만으로 끝날 일인가 3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 발표된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이라는 짧은 글은 이 역사적 사건을 마치 예견한 것처럼 보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서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역사는 드디어 그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에 대한 나의 비판은 이미 있었지만 지금 세계는 냉전시기보다 더 복잡해졌고 그 해법도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던 그마저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고 현재 너무나 다양하게 혼재하는 ‘정체성’과 이의 인정을 둘러싼 갈등을 그 요인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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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자연미를 넘어서 포르투갈의 지중해 바닷가로 이주한 지도 어언 두 달이 된다. 매일 아침 바닷가의 모래밭을 걷는 것으로 나의 하루 일과는 시작된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매일 마주치던 청년이 보이지 않는다. 요가 수행자의 차림을 한 그는 아침 바닷물이 빠져 나가는 썰물 때 반려견을 데리고 나타난다. 그는 바닷가의 모래밭에 많은 연꽃잎이 연결된 원형의 큰 만다라를 그리고 그 중앙에 돌탑을 세우고 어느새 사라진다. 아침에 공들여 만든 모든 것이 저녁때는 밀물에 휩쓸려 사라지지만 그다음 날 아침에도 역시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모래밭은 하루에도 무수히 변화하는 화폭인데도 그 위에 불가의 상징인 만다라를 남기는 작업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자연과 예술, 그리고 오늘날 첨예하게 제기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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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법, 정치 그리고 도덕 요즘 검찰개혁을 둘러싼 심한 갈등이 한국 사회의 모든 것처럼 보일 정도다. 16년 전 이맘때 서초동 검찰청사의 한 취조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일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나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끝내 구속 기소되었다. 검찰과 언론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크게 판을 키운 끝에 37년 만에 서울 땅을 밟을 수 있었던 나를 ‘해방 이후 최대 간첩’으로 만들었다. 그때의 상황을 뒤돌아보면 지금 논의되고 있는 검찰의 무분별한 피의사실 공표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가를 다시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검찰개혁이라는 숙제가 그의 본래적인 영역을 벗어나 ‘조국 수호’와 ‘조국 퇴진’이라는 구호 밑에 정권 유지냐 아니면 정권 퇴진이냐를 건 큰 정치투쟁으로 변했다. 정치가 작동해야 할 공간을 대중 동원을 통한 거리의 정치가 대신하는 양상으로 변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갈등이 증폭된 배경에는 한국 사회의 계층과 계급이동에 있어서 기회균등과 공정성의 결손 같은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또 통제되지 않은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한국적인 정보사회도 한 요인이 되고 있다. 따라서 현사태를 판단하는 데는 법, 정치, 도덕이라는 사회작동방식의 전통적인 삼각관계는 물론 심각한 교육 문제와 언론의 현주소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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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다시 경계선을 넘으면서 반세기를 넘긴 독일 생활을 뒤로하고 9월1일 포르투갈의 알가베로 이주해왔다. 베를린으로부터 무려 3000㎞나 떨어진 유럽 대륙의 끝자락이자, 지중해와 대서양이 만나는 이곳을 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기후 때문이다. 1년 중 평균 300일 이상 햇볕이 내리쬐는 이곳을 그래서 유럽인들이 많이 찾는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북유럽 사람들이 많고 최근에는 러시아 사람도 꽤 늘었다. 과거 포르투갈령 인도의 고아나 중국의 마카오가 지닌 역사적 배경으로 이주해온 인도와 중국 사람을 제외한 그 밖의 아시아인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교포나 관광객으로 온 우리 동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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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칼럼 서가를 정리하면서 독일 생활 반세기를 넘기면서 그동안 모았던 많은 책들을 얼마 전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책은 구입한 동기가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지만 어떤 책은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다. 전공인 철학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물론, 문학작품이나 예술 관련 서적들도 모두 저자가 살았던, 아니면 살고 있는 시대의 고민과 희망을 담고 있다. 어떤 책들은 이미 고전이 되어 시대를 뛰어넘어 읽히지만 어떤 책들은 당시에는 많이 읽혔으나 지금은 아예 잊혀졌다. 내 독일 생활의 시작은 전후에 견고해진 냉전체제를 부수는 작업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 시대를 풍미했던 사상의 기초는 물론 마르크스가 제공했다. 서가의 한쪽에 꽂혀 있는 <자본론>을 먼지 털며 펼쳐 보니 나도 곳곳에 주를 달면서 꽤 열심히 읽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마르크스의 계승자로 추앙받았던 레닌의 <국가와 혁명>도 당시에는 필독서였다. 다른 책장에는 중국어와 독일어판의 <모택동선집>이 꽂혀 있다. ‘문화대혁명’ 때 사회주의혁명과 건설노선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졌던 중국과 소련 사이의 논쟁에 큰 몫을 했지만 이제는 먼지만 수북이 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