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최신기사
-
장덕진의 정치시평 역사 단계, 갈림길, 그리고 퇴마정치 19세기 사회사상가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던 역사 인식을 꼽으라면 사회진화론을 들 수 있다. 사회가 발전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고, 이 길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으며, 서로 다른 사회들은 그 정해진 길을 빨리 가느냐 늦게 가느냐의 속도 차이밖에 없다는 사고방식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카를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다. 모든 사회는 정해진 단계들을 거쳐 봉건제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공산주의를 향해 나아간다. <자본론>의 서문에서 마르크스는 독일의 노동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너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속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조만간 독일도 정해진 길을 따라 영국과 똑같아질 것이라는 예언이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아프간 철수와 첨예해진 질문들 카불 공항을 이륙하는 미군기에 사람이 매달렸다 추락하는 참혹한 장면은 2001년 9·11 테러 때 쌍둥이 빌딩에서 사람이 추락하던 장면과 겹쳐지면서 소위 ‘9·11 시대’의 시작과 끝이 이리도 잔인한 수미일관을 이루는지 몸서리를 치게 했다. 하지만 미군의 아프간 철수는 이미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 결정한 것이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협상을 거쳐 조 바이든 행정부가 실행에 옮긴 것이어서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비록 철수 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기기는 했으나 미국의 오랜 전략적 고민의 결과이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밀턴 프리드먼 ‘상경기’ “이론적으로는 이론과 현실은 같은 거야. 아, 물론 현실적으로는 다르지.” 이론과 현실의 차이에 대한 유명한 농담이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해서일까. 이미 15년 전에 94세로 세상을 떠난 미국의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2021년 한국에서 뜬금없는 고생을 하고 있다. 그것도 양쪽에서. 일단 한쪽부터 보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부친이 선물한 밀턴 프리드먼의 저서 <선택할 자유(Free to Choose)>를 읽고 감명을 받았고,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신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책의 1장은 ‘시장의 힘’이고 2장은 ‘규제의 폭압’이다. 편의점 최저임금이나 부동산, 대기업 구내식당에 이르기까지 국가가 개입하는 문재인 정부의 정책은 ‘규제의 폭압’으로 읽혔을 것이고, 그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승화되었을 법도 하다. ‘120시간 노동’이나 ‘부정식품’ 발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그는 국민들을 주당 120시간 강제노동을 시켜야 한다고 한 적도 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부정식품을 먹여야 한다고 한 적도 없다. 본인들이 원한다면 ‘선택할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해야 시장원리를 통해 사회 전체의 후생이 극대화된다는 것은 경제학개론을 들은 사람이라면 알아야 정상이다. 같은 말을 했는데 누구는 노벨상을 받았고 누구는 비난을 받았다. 이론적으로는 그는 억울하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MZ세대 권력의 본질 미국 밀레니얼의 42%는 자본주의보다 사회주의를 선호한다고 말하지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는 밀레니얼은 16%밖에 없다. 기성세대에게는 앞뒤가 안 맞는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에 있는 케이토 연구소의 여론조사 책임자인 에밀리 에킨스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풍요의 화수분 속에서 자란 사람들이다. 150개의 케이블 채널과 성적 정체성을 분류하는 50가지 방법, 그리고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에 익숙하다. 그들이 어떻게 두 개의 정당에 만족할 수 있겠는가?” 기성세대의 눈에 앞뒤가 맞지 않게 보이는 것은 어쩌면 사람들의 태도를 분류하는 축이 부족해서일 수 있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공정의 정치학 공정이 새로운 시대정신이 되었다고들 한다. 이재명의 ‘성장과 공정’, 윤석열의 ‘공정과 상식’, 유승민의 ‘공정 소득’에 이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공정한 경쟁’에 이르기까지 공정 담론이 넘쳐난다. 이제 공정의 뜻을 한번 되새겨볼 때가 되었다. 대니얼 카너먼은 심리학자이지만 행동경제학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고 그 공로로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특히 그는 공정이라는 관념이 시장에서의 경쟁을 어떻게 촉진하거나 왜곡하는지를 집중적으로 설명했다. 공정한 경쟁을 주장하는 ‘이준석 현상’을 이해하는 열쇠 말이 될 수도 있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기본소득은 의제인가, 복병인가 지난 몇 년간 기본소득은 정치권에서 조금씩 그 자리를 넓혀왔다. 이재명 경기지사가 선두에 서있고,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도 한때 기본소득을 띄웠다.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신복지’ 정책이나 정세균 전 국무총리의 ‘돌봄사회’ 정책도 모두 기본소득이라는 유혹으로부터 파생되었거나 이 지사가 선점한 기본소득 정책에 대한 맞대응 차원에 서있다. 이 모든 제안들의 공통점은 현금성 복지라는 점이다. 기본소득이 탄력을 받게 된 것은 물론 코로나19라는 배경 때문이다. 긴급재난지원금의 경험은 다른 현금성 복지라고 해서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우리는 정말 자본주의에서 사는 걸까 2030세대의 사고방식이 기성세대와 크게 다르다는 점, 그리고 그들 내부에서도 젠더 간 차이가 매우 크다는 점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예를 들어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한 20대 남성은 여성에 비해 31.6%포인트나 많았다. 60세 이상 유권자에서의 격차에 비해 10배가 넘는다고 한다. 나는 3년 전 이 칼럼을 통해 젠더정치의 등장을 분석한 적이 있었는데(2018년 3월12일자), 그 이후에 몇몇 정치권 인사들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똑 부러지는 답을 주지는 못했다. 사안의 성격상 양쪽의 마음을 동시에 얻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도 막상 선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되고 게다가 대선도 1년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다 보니 양당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국민의힘은 자신들에게 표를 몰아준 ‘이남자’를 붙드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도 여성친화성을 표방해온 터라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20대 남성 붙들 생각에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모겐소, 피에트로, 그리고 윤석열 요즘 가장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정치인은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차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 단숨에 1, 2위를 오르내리기 때문이다. 그가 최종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공보팀을 꾸리는 등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면 비공식적인 정치를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소식은 그가 검찰총장 퇴임 직전에 뉴욕 검찰의 전설이라 불리는 고 로버트 모겐소 검사장의 전기를 배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을 사서 나눠준 것도 아니고, 일부러 대검 국제협력담당관실이 제작하도록 하고 직접 추천사를 써서 전국 검찰청에 2300부를 배포했다고 한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한국판 백신 정치의 사소함 작년 12월 국민의힘은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에게 국내에서 확진자 수만 세지 말고 당장 해외로 나가 백신을 구해오라고 다그친 적이 있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도 방역실패의 대표적 사례로 백신 수급 문제를 꼽았다. 하지만 데이터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방역 성공과 백신 성공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다. 미국과 영국 등 방역에 처참하게 실패한 강대국들이 백신민족주의를 앞세워 싹쓸이를 하고 있고, 한국처럼 방역에 비교적 성공한 나라들은 싹쓸이할 국력도 부족하고 그래야 할 필요성도 덜 느낀다. 한국의 백신 수급이 비교적 늦은 것이 과연 K방역의 성공에 도취되었기 때문인지, 사상 유례없는 속도와 방식으로 개발된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신중함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야당과 언론의 비판 이후 7700만명분을 확보했다고 하지만 그중 아직까지 승인받지 못한 백신이나 수급 일정 등을 감안하면 현실은 숫자가 보여주는 장밋빛 이미지보다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서울시장 선거가 시들한 이유 서울시장 후보로 거론되는 이들의 명단을 보자.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여당의 우상호·박영선, 야당의 나경원·오세훈·안철수 등이다. 누가 여론조사 1위라는 둥 누가 경선에서 유리하다는 둥 하지만, 어쩐지 시들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책이나 공약의 차이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조은희 서초구청장이 돋보인다. 그의 공약에 찬성하든, 안 하든 분명하게 제시하고 평가받겠다는 자세는 눈에 띈다. 후보들의 공통점이라면 그 끝이 언제일지 모르게 이어지고 있는 86세대 정치적 기득권층에 속한다는 점, 오랫동안 전업으로 정치를 해왔지만 유명하다는 것 말고 그 정치적 기여가 무엇인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 등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신선한 제3의 후보를 기다리게 된다. ‘영입’이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2020년 한국 정치를 돌아보며 연말이 되니 지나간 한 해를 회고하거나 새해를 전망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이 지면을 빌려 무슨 이야기를 썼는지 다시 돌아보았다. 그 시점에서는 나름대로 가장 중요한 현안이라고 생각했던 내용들이니 모아놓고 보면 한 해를 회고하는 한 가지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는 4·15 총선을 앞두고 위성정당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양대 거대정당의 꼼수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개정선거법의 정신을 팽개쳤고, 중도 혹은 소수파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았으며, 광화문과 서초동으로 갈라진 망국적 분열상을 그대로 국회로 옮겨왔다. 그 당시 나는 “20대 국회가 역대 최악이라고 했던가. 21대 국회는 그 이상을 보여줄 것임이 확실하다”고 썼다. 그 예상은 별로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거대여당이 상임위원장 자리를 싹쓸이하는 정치, 야당의 동의 없이 선거법이든 공수처법이든 원하면 언제든 통과시키는 정치의 실종은 20대 국회를 뛰어넘는 참상이고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준다.
-
장덕진의 정치시평 야당은 중도를 설득할 수 있을까 올해 한국 정치에서 가장 큰 변수는 뜻밖에 코로나19였는데, 감염병의 사이클에서 앞부분은 정치적 파급효과가 크지만 뒷부분은 별로 그렇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감염병이 처음 등장할 때는 불확실성과 공포가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정부의 대처와 그 효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하지만 감염병이 사라지는 단계에서는 공포도 함께 줄어들고 관심사는 여러 곳으로 흩어진다. 4·15 총선으로 돌아가보자. 국내 첫 확진자 발생이 2월19일이었고, 총선까지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야당과 보수언론은 정부가 중국인 입국금지를 하지 않은 것을 빌미로 ‘굴욕외교=방역실패=무능한 정부’라는 프레임을 반복 주입했다. 하지만 3월 중순 이후 한국의 방역성공이 세계적 모범사례로 떠오르면서 이들의 공세는 역효과를 불러왔다. 방역에 실패한 것이 무능한 정부라면 방역에 성공한 것은 유능한 정부일 수밖에 없고, 야당의 정부 비판은 실제로는 대대적인 정부 홍보가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