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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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금 머무는 그곳에 이따금 주변에 안부를 전할 때면 제주에 사니까 어떤지 질문받곤 한다. 부럽다고 했고,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선택이 용기 있다고도 했다. 그럴 때면 어떻게 답해야 맞을지 고민되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 이래 신규 교원 임용공고가 거의 나지 않아 온 세부 전공을 가진 난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사실 다 좋았다. 도심 한복판이나 산골, 혹은 강가나 항구였어도 마찬가지로 기뻐하며 갔을 것이다. 그건 생계의 문제였지 선택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절했던 대상은 거주 조건보다는 일할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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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스친 이들의 무심한 온기 열한 살 여름방학에 소피는 곧 서른한 살 될 아빠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다. 별거 중인 아빠와 일 년 만에 함께 보낼 시간인 만큼 아이는 신이 났다. 캠코더로 장난스레 아빠를 인터뷰하고 관광버스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도 찍는다. 시간이 흘러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은 소피는 낡은 캠코더에 녹화된 이십 년 전 영상을 재생한다. 어린 자신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그 시절 아버지의 깊은 우울과 불안을 거기서 읽어낸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이 곁을 뜰 것을 예감하며 그전에 부모로서 알려줄 것을 전하려 서둘렀던 젊은 남자의 강박을 뒤늦게 헤아린다. 영화 <애프터썬>은 이렇듯 끝내 온전히 복원하진 못할 과거 한 시점의 기억 조각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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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죄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대위 볼코노고프는 어느 아침 출근길에 직속상관의 투신을 목격한다. 참모 회의가 취소되고 부서 동료가 하나둘씩 재심사로 불려들어가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피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8년의 스탈린 정권하에서 이는 내부숙청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직전 볼코노고프는 탈출을 감행한다. 그날 밤 노숙인 무리에 섞여 있던 그는 처형당한 이들을 파묻는 노역에 동원되고, 불과 아침까지도 함께 농담을 주고받던 가까운 동료의 시신을 거기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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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이 돌을 지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지난해 가을 개봉 소식을 접했을 때만 해도 볼 생각이 없었다. 언제 적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인가 시큰둥했고, 믿지 못할 게 노장의 은퇴 선언이라더니 싶었다. 뒤늦게 극장에 간 것은 은퇴를 번복하며 내놓은 그 복귀작 제목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임을 알고서였다. 전작을 통틀어 저렇듯 무겁고 직설적인 작명은 못 봤으니까.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짐작했다. 미처 못한, 기어이 꺼내야 할 이야기가 있나 보다. 동의하든, 반발심이 일든 들어야겠다 생각했다. 그가 만들어온 작품들의 정서적 수혜자로서 그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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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훔쳐본 수업의 강의료 우연한 계기로 선배 선생님의 수업 영상을 본 적 있다. 최근의 비대면 녹화강의가 아니고 강의실 수업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해둔 수년 전 자료였다. 복도 지날 때 문틈으로 흘러나오던 카랑한 목소리에 지금보단 앳된 선생님의 얼굴이 더해지니 신기했다. 이공계에 막연한 선망을 품어왔던 터라 ‘요구분석’이나 ‘데이터시스템’ 등 생경한 단어들이 들려오자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멋있었다. 그렇듯 얕은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가 십여 편에 달한 영상을 전부 시청했다. 마치 한 학기 내내 교실 구석에서 청강한 기분이었다. 공학자인 본인이 여러 학기 동안 낯선 분야를 연구하며 어떻게 두 분과를 연결 짓고자 시도했는지를 학부생의 눈높이로 설명하고 계셨다. 이에 착안하여 수강생들이 전공지식을 바탕으로 가상 홍보사업안을 하나씩 구상하도록 커리큘럼을 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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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억센 손을 다시 마주하더라도 토요일의 교정을 걷던 중 누가 “저기요” 하며 말 걸어왔다. 성경 읽기 모임을 함께하자 했다. 아직 날 학생 나이로 봐주는 분이 다 있구나 싶어 기분 좋아져 ‘말씀 감사하지만 전 이미 종교를 갖고 있어서’라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아뇨. 자매님은 아직 하나님을 아는 게 아녜요.” 요컨대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야 오롯한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였다. 이런 방식의 선교에 거부감이 컸던 터라 뿌리치며 돌아서는데 뒤에서 간곡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님은 절대 아버지가 아니에요. 어머니세요.” 어머니 하나님에 관해 알고픈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무엇에 그리 간절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듯했다. 청소년기부터 성당에 다닌 나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화에 공감하기 어려웠으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기도문을 외울 때면 어쩌지 못할 반발감이 일곤 했으니까. 내 경우 신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사랑받은 제자의 눈길로 재현해낸 선생님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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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적어도 한 사람은 “얼핏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인간으로 보이잖아요. 근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사람은 본인이 지향하는 특정한 가치만은 한 번도 버린 적 없어요. 가끔 존재하죠. 그런 사람들이.” 제주에 출장 오신 선생님과 식사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그분이 누군가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언급하신 그 공인에 대해 사실 그다지 관심 없었지만 저 말씀은 깊이 닿았다. 발화내용에 동의했다기보다 발화자의 시선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위안 같은 걸 받았다. 다음날 커피 마시면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아침 방송에서 본 에피소드를 들려주셨다. 농담의 소재인 줄 알고 키득거릴 채비하던 내게 그분이 이야기했다. 겉으론 실리를 추구하며 세속에 젖어 사는 것처럼 보여도 혀끝만 정의로운 자들보단 세상에 무언가 더 보태는 이들이 있다고. 그런 일상의 삶들을 자신은 좋아하며, 지켜주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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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오늘 밤도 노래 연습을 대학원 시절 내 별명은 ‘백구’였다. 그런 별명을 갖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어느 독일 교수님이 초청 강연 일정으로 방한하셨을 때다. 우리 지도교수님의 막역한 동료이자 연구실 선배의 유학 시절 은사이셨던 터라, 추억으로 간직할 만한 일상문화 경험을 그분께 만들어 드리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노래방 방문’이었다. 강연을 마치고 저녁을 먹은 후, 연구실 선후배들과 우르르 학교 후문의 노래방으로 향했다.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어쩌지 했던 우려가 무색하게 그 독일 교수님은 흥겨워하며 팝송을 두 곡이나 부르셨다. 후배의 3단 고음 열창과 선배들의 ‘말 달리자’ 합창이 이어지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각자 돌아가며 한 곡씩은 불러야 할 듯해 나도 예약 버튼을 눌렀다. 예약된 곡 제목이 모니터에 뜨자 옆자리의 선배 언니가 속삭였다. “소영아, 저 노래는 아무래도 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취소 버튼을 잘못 누르는 바람에 앞 곡이 사라져버려 내가 고른 노래의 전주가 곧장 흘러나왔다. 연주시간이 7분에 달하는, 김민기 작사·작곡의 ‘백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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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살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자살을 준비해온 남자가 있다. 인터넷 동반자살 모임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모여 약을 나누어 먹고, 왜인지 그 혼자만 다시 깨어난다. 희귀한 체질이거나 재수가 없었거나 둘 중 하나일 거라고 남자는 짐작한다. 방 안에서 세 구의 시신이 굳어가는 동안 실패한 일을 마저 하고자 난간에 줄을 매단다. 둥그런 죽음의 매듭 안으로 목을 밀어 넣으려던 순간, 뜻밖에 그의 시선은 맞은편 상가 옥상에서 동그란 생명의 방을 막 빠져나오던 아기의 자그만 머리에 가닿는다. 원치 않던 임신 후 낙태 시기를 놓쳐 붕대로 배를 동여맨 채 일하던 편의점 알바생. 급작스럽게 산통이 찾아오자 그녀는 옥상으로 올라가 붕대를 끌러 바닥에 펴놓고 몸을 푼다. 출산 직후, 혼자선 도저히 감당 못할 그 존재의 숨을 끊고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아기의 목덜미로 가져가려던 참이었다. 매듭에 머리를 밀어 넣은 상태로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남자는 저도 모르게 낯선 상대방을 향해 “야!” 소리 지른다. “뭐어!” 여자 쪽에서 울부짖는다. 그리고 신생아를 거기 둔 채 흐느끼며 자리를 뜬다. 그는 맞은편 건물로 넘어간다.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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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사소한 일에 마음을 담는 “선생님은 일할 때 사소한 데까지 마음을 담는 게 보여요. 세미나 공지메일 몇 줄에서 마음이 느껴지고요. 그게 인상 깊었어요.” 갓 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일할 무렵 어떤 분께 들은 평이다. 그 말씀이 좋아서 아껴 간직했다. 때때로 혹자에게 순응적이라고 비웃음 사거나 ‘너무 애쓰며 살지 말라’는 핀잔을 듣고도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할 일은 차츰 늘었다. 논문 외에 기한을 맞춰 써낼 원고나 심사평 등이 많아졌고, 수업 외에 참여할 회의나 작성할 기획서가 쌓여갔다. 교내식당 다녀올 시간을 못 내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이것저것 일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했다.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에 비해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까지 마감에 쫓길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것에 일일이 마음을 담으려다 보니 항상 종종거리는 것일까. 사소한 문구를 고민하느라 논문 진도가 더뎌지고, 짧은 토론문을 되풀이해 다듬다가 사회적 관계의 도리를 못하는 식으로. 예전엔 “네” “그러죠” 같은 단답형 메일이 무례하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그건 무성의함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일처리를 미루지 않기 위한 방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지체된 답메일로 곤란했을 이들 역시 유려한 답변보다 차라리 ‘예/아니요’의 건조하되 즉각적인 답변을 더 원했을 테다. 보석처럼 품어왔던 저 평은 칭찬이 아니라 결함에 대한 지적이었을까. 혼란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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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와 삶 선한 찰나의 누적 지난가을 국내 개봉한 <퍼스트 카우>란 영화가 있다. 강변 숲속을 산책하던 사람이 흙더미 안에 나란히 누인 유골 두 구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유골의 주인이자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개척기를 살았던 두 남자다. 둘은 서부영화에서 흔히 보아온 ‘따발총’ 쏘는 보안관이나 말 달리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장터에서 꿀우유빵을 튀겨 팔던 행상꾼이다. 이들은 마을 유지인 팩터 대장네 마당에 묶인 소의 젖을 몰래 짜서, 그걸 넣어 반죽한 빵으로 소소하게 돈벌이한다. 둘 중 ‘쿠키’라 불리는 이는 고아로 자라나 모피 사냥꾼 무리에 끼어 마을로 흘러든다. 주점에서 시비 붙은 사내들이 주먹 다툼하러 나가면서 애 좀 보고 있으라고 요람을 맡기는, 그러면 엉거주춤 거기 선 채 아빠가 곧 돌아올 거라며 아기를 자장자장 어르는, 그런 결의 사람이다. 한밤에 우유 훔치는 와중에도 ‘네 남편의 죽음은 참 안 됐다’며 소에게 애도부터 전하고, 다음날 ‘네 덕분에 빵을 팔았다’고 등을 쓸어 감사함을 표현하는, 소도둑 아닌 소의 눈망울을 지닌 자. 한편 다른 한 명, ‘킹 루’는 마을 외각에 정주하는 중국 이민자로서 한결 실리적이고 셈이 빨랐다. 쿠키의 빵 굽는 솜씨를 알아보고 노점상을 제안한 쪽도, 재정 관리를 도맡은 쪽도, 들통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 될 때 한몫 잡자며 등 떠밀던 쪽도 킹 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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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웃음의 테두리 안으로 학생 시절 우리 동네 성당에는 성악가처럼 노래하는 분이 계셨다. 문제는 발성법이 성악가였으나 음성은 그릇 깨지는 소리였다는 사실이다. 하루는 그분이 예술혼을 평소보다 더 발휘하셔서 미사 시간 내내 오르간 반주를 우렁차게 목소리로 제압했다. 뒷줄에 앉아 계시던 아저씨가 “우리도 노래 좀 부르자고!” 분통을 터뜨리자 다른 아저씨들이 옆구리를 찌르며 “야, 바오로, 알고 보면 네 목소리가 더 돼지 멱따는 소리야” “너나 잘 불러” 핀잔을 주셨다. 한편 그 성악가와 쌍벽을 이루던 분도 계셨으니 성우 발성의 양복 신사셨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라는 기도 문구를 그분은 마치 사극 대사처럼 외곤 했다. 특히 시편을 낭송할 때의 비장미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에 비견할 만했다. 항상 중학생 또래의 아들과 함께 오셨는데 아들 얼굴엔 ‘제일 싫은 게 아빠랑 성당 가는 거’라 쓰여 있었다. 나는 자꾸 웃음이 났다. 그 우스운 순간들이 따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