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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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당분간 모든 싸움에서 진다 해도 수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공부할 때, 관련 기록을 보며 처음 든 의문은 ‘이웃이 왜 몰랐을까’였다. 첩첩산중도 외딴섬도 아닌 도심 부랑인시설에서 감금·폭행과 강제노역으로 수백 명이 죽어갈 동안 어떻게 그랬을까. 그러다 한 인터뷰에서 그곳을 ‘걸뱅이들 살던 데’라 복기하는 주민을 보며 짐작했다. 어쩌면 다수는 몰랐다기보단 모르고 싶었던 것 아닐지. 추운 날 내 호주머니 속 동전에 호소하여 마음 산란하게 했던 ‘걸뱅이들’을 먹이고 재워준다니 다행이라 자위하며 말이다.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도 생각했다. 1980년대 중반 아일랜드 소도시에서 기득권을 지닌 수녀원이 갱생의 명목 아래 ‘타락한’ 소녀들의 노동력을 착취함을 이웃이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닫힌 문 저편에서 모종의 불의가 일어나고 있음은 감지했을 테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지만, 누구도 더 캐묻진 않는다. 가여운 애들이 굶진 않으니 감사한 일이라 안위하는 게 속 편했을 거니까. 석탄배송업체를 조그맣게 꾸려 가족을 부양하는 펄롱 역시 한때 그랬을 수 있다. 수녀원에 땔감을 배달하러 갔다가 제발 여기서 데리고 나가달라 애원하는 소녀를 마주하기 전까진.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묻는다.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했던 적 없냐고. 아내는 답한다. 살아가려면 모른 척해야 할 일도 있다고. 가진 것 지키고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 우리 딸들은 걔들이 겪는 일을 겪지 않을 거라고. 우리에게 무슨 책임이 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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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수년 전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에 출연했을 때 고 김민기씨는 몹시 경직돼 보였다. 노련한 진행자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본인도 오늘은 긴장된다며 “선생님은 긴장 안 되십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모아쥔 채 입술만 간신히 떼어 답했다. “죽겠죠, 뭐. 여기 있는 게.” 보통 저렇듯 긴장하면 감정을 숨기고자 짐짓 너스레를 부리거나 어색함을 깨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기 마련이다. 내 경우엔 그랬다. 그러고선 두고두고 자책하곤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내키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사회적 위상을 지니지 않은 한, 우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순간순간 타개할 수밖에 없다고. 살다 보면 어느 시점부턴 수치심이나 자괴감에 둔감해진 채 ‘뭉개고’ 가기 마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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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유쾌한 저항 살 것이 있어 구시가지에 나왔다. 초겨울 토요일 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대각선 맞은편으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하야하라’ 구호가 적힌 팻말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제주시청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가 그쪽을 보더니 “와, 데모 크게 하네” 혼잣말하셨다. 그러자 옆의 할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건 데모가 아니라 집회지. 촛불집회!” 정정하며 “그래. 저렇게라도 해야지.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가 속이 상해서”라고 덧붙였다. 데모와 집회가 어떻게 다르냐고 할아버지는 질문했다. 실은 나도 궁금했던 터라 귀를 쫑긋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남편을 말없이 쏘아봤다. 짐작건대 그분만의 언어 감각에 따르면 두 표현은 정당성의 위계를 달리했나 보다. 전자가 쿠데타라면 후자는 혁명이랄까. 머쓱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는 “우리도 따라가 볼까?” 제안했다. 그러곤 이내 아내의 팔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대오에 합류하셨다. “까짓것. 함께하지 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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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대비되는 마음 주위에서 장난처럼 ‘성당 다니며 성당 오빠 없었냐’ 물을 때면 스치는 얼굴이 있다. 20대 후반 무렵 청년모임에서 알고 지낸 그는 혀끝과 글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당시 내 지인들과 결이 좀 달랐다. 사진을 배우려는 후배한테 난해한 이론을 설명하는 대신 낡은 카메라를 고쳐 연습해보라며 건넸고, 북소리를 좋아한다 했더니 ‘꽹과리만 한 조그만 애가 북은 무슨’ 피식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던 복학생 선배와 달리 북은 힘이 아닌 반동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며 오북놀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사 후 끼니를 때우러 분식집에 들어가 유부우동을 두 입쯤 먹었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여럿이 삼겹살 구우러 간다며 너 어디냐길래 이미 저녁 먹고 있다 했더니, 그 맛없는 걸 얼른 해치우고 여기 합류하란다. “전 절반 먹으면 배부른데. 다 버릴 수도 없고요.” 얼마 안 되어 그가 식당에 들어섰다. 선 채 성호를 긋더니 세 젓가락 만에 우동을 후루룩 삼키고 고깃집으로 이끌었다. “맛없는 건 원래 혼자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이 좋아서 기억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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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반짝이던 것이 스러진 자리에서 부임한 지 보름 지난 첫 학기의 초가을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조심스레 휴강에 관해 물었다. 다음주에 단과대 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큰 연례행사라 통상 그날은 수업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교과목들의 강의 준비를 하루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논다고 좋아서 선생의 입이 찢어진 걸 보면 학생들이 얼마나 당황할까 싶었다. “휴강해야 하는군요.” 난감함을 연기하느라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한 성실한 복학생이 내가 진짜 아쉬워하는 줄 알고 의무는 아니라며 말문을 떼길래 다급히 “아녜요. 그날 쉬고 학기 말에 보강하죠” 외쳤다. 이내 본심을 들킨 게 부끄러워져 그 시간대에 경기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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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게 우선하는 가치 하늘이 높고 볕이 쨍했던 늦여름으로 기억한다. 수업이나 다른 업무가 없던 금요일 오후라, 모처럼 학교 밖으로 나가 늦은 점심 겸해 커피와 빵을 먹고 오기로 했다. 노트북도 챙겨 룰루랄라 아랫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려야 할 곳을 한 정류장 앞둔 사거리에서였다. 신호변경 직전 기사님이 다급히 차선을 변경하시더니 좌회전을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직진해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시행되던 노선 전면 개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혼동하신 듯했다. 무리해서 모퉁이를 돌던 우리 버스는 옆 차선에서 좌회전하던 화물차량과 이상한 각도를 만들어냈고 다음 순간 ‘쿵’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이 미처 소리를 지르기 전에 전면의 유리창이 일부 깨지며 버스가 멈춰 섰다. 경미하긴 했으나 추돌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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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소심한 타전 ‘비디오방’에 처음 간 것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봄이었다. 공강 시간에 동기 남자아이가 “포켓볼을 가르쳐줄까?” 묻길래 그것 말고 후문에 있는 비디오방이란 데에 가보고 싶다 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길래 헐렁한 원피스에 중절모 쓴, 포스터 속 갈래머리 소녀가 인상적이던 <연인>을 택했다. ‘무삭제판’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게 좀 걸렸으나 무슨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길래 호기심이 일었다. 친구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무시한 채 “이거 볼래” 고집부렸다. 불편한 침묵 속에 두 시간을 보내고 나오던 중 친구가 조용히 일렀다. 앞으론 남자 동기와 단둘이 비디오방에 가지 말라고, 여긴 연인 아닌 이성 친구와 올 만한 곳이 아닌 듯하다고 말이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이렇듯 선정적인 장면이 나오는 영화 말고 무난한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고르라고 충고했다. 그 조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난 그해 여름방학 내내 비디오방에 갔다. 외고 중국어과를 졸업한 다른 동기와 <패왕별희>를 본 것이 계기였다. 그때껏 홍콩영화라 하면 이소룡이나 성룡이 무술 연마하는 장면들만 떠올렸던, 영화적 감동이라곤 <쉰들러 리스트>나 <쇼생크 탈출>의 교훈적 감동 외엔 몰랐던 열아홉의 내게 <패왕별희>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이런 결의 감수성이 존재한다는 게 경이로웠다. 그렇게 왕가위의 전작들을 찾아보고, 켄 로치의 <랜드 앤 프리덤>이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올리브 나무 사이로> 등 그 무렵 대학가에 돌던 작품을 닥치는 대로 섭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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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밤에 하는 산책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밤에 하는 산책’이다. 거주지가 학교 근방이라 보통 퇴근 후 교정이나 교내 원형운동장을 슬렁슬렁 걷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해넘이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닌다. 목적지 없이 걷다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섰던 밤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자동차 클랙슨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건물 처마 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 냄새와 알감자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옛날식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얼핏 보였다. 뚝배기에선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도마엔 채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옆 칸에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솔도 미솔도 미레 레도 도시라라. 유년기 여름날 동네 음악학원의 열린 창 너머로 흘러나오던 익숙한 ‘소녀의 기도’ 멜로디였다. <피아노 명곡집>에 수록되었던 이 곡은 과연 세대를 초월하여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명연습곡인가 보았다. 아니, 어쩌면 소년의 연주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상 공간 주변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집밥 내음과 피아노 소리가 있는 그 장면이 좋아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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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빗금을 넘어가 남기고 온 것 단과대 리모델링 공사로 연구실을 옮기기 전까지 수년 동안 사용해왔던 공간은 문고리가 헐거워 문이 저절로 열릴 때가 많았다. 시설과 선생님께 말씀드려 몇 차례 손보았지만 여전했다. 그러니 주말이나 늦은 밤 학교에 남아 일할 때면 안쪽에서 문을 잠가두곤 했는데, 마침 그날은 잠그는 걸 깜박 잊었던 모양이다. 클래식 FM을 켜둔 채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끼익’ 하는 소리가 나길래 고개를 드니 닫아둔 문이 어느새 또 스르르 열려 있었다. 볼륨을 키운 것은 아니었으나 이어폰 아닌 스피커를 사용했으니 복도에 얼마간 음악소리가 들렸을 테다. 중간고사를 한 주 앞둔 토요일 오후였고, 같은 층 복도 저편엔 임용시험 준비실과 자습실이 있었다. 시험공부하는 학생들을 방해한 것은 아닐지 미안했다. 좋아하는 아리아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가사도 못 외면서 서툰 음정으로 흥얼거리기까지 했는데 혹시 누가 들었으면 어쩌나 부끄러웠다. 소음에 민감한 학생이 ‘에브리타임’ 등의 온라인 게시공간에 ‘음악 테러한 사대 모 선생’에 관해 글을 남기면 어쩌나 겁도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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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지금 머무는 그곳에 이따금 주변에 안부를 전할 때면 제주에 사니까 어떤지 질문받곤 한다. 부럽다고 했고, 타지에서 홀로 살아가는 선택이 용기 있다고도 했다. 그럴 때면 어떻게 답해야 맞을지 고민되었다. 로스쿨 제도의 도입 이래 신규 교원 임용공고가 거의 나지 않아 온 세부 전공을 가진 난 안정적으로 공부하고 가르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사실 다 좋았다. 도심 한복판이나 산골, 혹은 강가나 항구였어도 마찬가지로 기뻐하며 갔을 것이다. 그건 생계의 문제였지 선택이나 용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간절했던 대상은 거주 조건보다는 일할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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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스친 이들의 무심한 온기 열한 살 여름방학에 소피는 곧 서른한 살 될 아빠와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다. 별거 중인 아빠와 일 년 만에 함께 보낼 시간인 만큼 아이는 신이 났다. 캠코더로 장난스레 아빠를 인터뷰하고 관광버스 유리창에 반사된 얼굴도 찍는다. 시간이 흘러 서른한 번째 생일을 맞은 소피는 낡은 캠코더에 녹화된 이십 년 전 영상을 재생한다. 어린 자신이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그 시절 아버지의 깊은 우울과 불안을 거기서 읽어낸다. 삶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아이 곁을 뜰 것을 예감하며 그전에 부모로서 알려줄 것을 전하려 서둘렀던 젊은 남자의 강박을 뒤늦게 헤아린다. 영화 <애프터썬>은 이렇듯 끝내 온전히 복원하진 못할 과거 한 시점의 기억 조각을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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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죄 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대위 볼코노고프는 어느 아침 출근길에 직속상관의 투신을 목격한다. 참모 회의가 취소되고 부서 동료가 하나둘씩 재심사로 불려들어가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피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8년의 스탈린 정권하에서 이는 내부숙청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직전 볼코노고프는 탈출을 감행한다. 그날 밤 노숙인 무리에 섞여 있던 그는 처형당한 이들을 파묻는 노역에 동원되고, 불과 아침까지도 함께 농담을 주고받던 가까운 동료의 시신을 거기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