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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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열 살 되던 해 열 살 되던 해, 새 교장 선생님이 부임했다. 변두리 시장통에 자리 잡은 이 학교에도 선진교육을 들여와 학부모들이 빚내어 더 나은 학군으로 이주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훈화하시던 그분은 높은 이상을 품은 열정적인 교육자셨다. 다만 그 이상이 때론 학교 현장에서 부담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듯하다. 그분이 야심 차게 도입한 ‘구라파식 체력단련’이 특히 그러했다. 월요일에 조회를 마친 후 교무실로 심부름 갔더니 몇몇 선생님들이 밀크커피를 타 마시며 “구라파 좋아하시네” 쿡쿡 웃던 장면이 기억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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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 학생’이어서가 아니라 두 번째 학기를 마칠 무렵이었다. 3학년 학생 셋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타 대학 학점교류를 신청했는데, 그 학교에 개설된 교과목 가운데 무엇이 유사 교과로 인정될지 상의하러 온 것이었다. 동일 전공 학과인 데다 과목명도 비슷해서 당시 경험 없던 내가 보기에도 유사 교과 승인엔 문제없을 듯했다. 다만 수강 인원이 많아봐야 15명 남짓한 수업에서 가장 반짝거리던 그 세 명이 다음 학기엔 보이지 않으리라 생각하니 허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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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양보의 대갚음 “이쪽 자리에 앉으세요.” 금요일 오후 10시쯤, 4호선 지하철 안이었다. 상경해 공부 모임에 참여한 후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부근의 숙소로 향하던 중이었다. 열차 칸 모퉁이에 서 있는데 대각선 방향에서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분이 일어나더니 조심스레 다가와 어깨를 톡톡 쳤다. 그리고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네? 어… 고맙습니다.” 엉겁결에 꾸벅하고 앉긴 했으나 기분이 묘했다. 생물학적으로 이제 청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지하철에 서 있기 힘들 나이는 결단코 아닌데. 소속된 연구자 집단이나 직장 공동체에서 이른바 ‘막내라인’은 벗어났으나 여전히 주니어급으로 분류되는데. 구태여 다가와 자리를 양보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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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웃음의 연대 일곱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동네 막국수 가게에 켜둔 텔레비전에선 9시 뉴스가 방영 중이었고, 대통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담화문을 낭독하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감자전을 앞에 두고 소주를 마시던 아저씨들이 사투리 억양으로 “전두환이 저거” “어데서 비장한 척을 해쌓노” 야유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하고 맺음말하던 순간 한 분이 화면을 향해 “에라이, 고마 치아라” 일갈했다. 다른 탁자의 손님들도 쿡쿡 웃었다. 주방에서 수육을 썰던 아저씨의 입꼬리 또한 올라가 있었다. 담화 내용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브라운관 안과 밖의 부조화가 왠지 재미났다. 식당 안에 감돌던 ‘동조하는 웃음’의 공기가 어린 마음에도 정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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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당분간 모든 싸움에서 진다 해도 수년 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공부할 때, 관련 기록을 보며 처음 든 의문은 ‘이웃이 왜 몰랐을까’였다. 첩첩산중도 외딴섬도 아닌 도심 부랑인시설에서 감금·폭행과 강제노역으로 수백 명이 죽어갈 동안 어떻게 그랬을까. 그러다 한 인터뷰에서 그곳을 ‘걸뱅이들 살던 데’라 복기하는 주민을 보며 짐작했다. 어쩌면 다수는 몰랐다기보단 모르고 싶었던 것 아닐지. 추운 날 내 호주머니 속 동전에 호소하여 마음 산란하게 했던 ‘걸뱅이들’을 먹이고 재워준다니 다행이라 자위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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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수년 전 JTBC <뉴스룸> 문화초대석에 출연했을 때 고 김민기씨는 몹시 경직돼 보였다. 노련한 진행자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본인도 오늘은 긴장된다며 “선생님은 긴장 안 되십니까?”라고 말을 건넸다.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두 손을 모아쥔 채 입술만 간신히 떼어 답했다. “죽겠죠, 뭐. 여기 있는 게.” 보통 저렇듯 긴장하면 감정을 숨기고자 짐짓 너스레를 부리거나 어색함을 깨려고 아무 말이나 던지기 마련이다. 내 경우엔 그랬다. 그러고선 두고두고 자책하곤 했다. 이야기를 들은 지인이 말했다. 원래 그런 거라고. 내키지 않으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괜찮을 만한 사회적 위상을 지니지 않은 한, 우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며 순간순간 타개할 수밖에 없다고. 살다 보면 어느 시점부턴 수치심이나 자괴감에 둔감해진 채 ‘뭉개고’ 가기 마련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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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유쾌한 저항 살 것이 있어 구시가지에 나왔다. 초겨울 토요일 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대각선 맞은편으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하야하라’ 구호가 적힌 팻말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제주시청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가 그쪽을 보더니 “와, 데모 크게 하네” 혼잣말하셨다. 그러자 옆의 할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건 데모가 아니라 집회지. 촛불집회!” 정정하며 “그래. 저렇게라도 해야지.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가 속이 상해서”라고 덧붙였다. 데모와 집회가 어떻게 다르냐고 할아버지는 질문했다. 실은 나도 궁금했던 터라 귀를 쫑긋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남편을 말없이 쏘아봤다. 짐작건대 그분만의 언어 감각에 따르면 두 표현은 정당성의 위계를 달리했나 보다. 전자가 쿠데타라면 후자는 혁명이랄까. 머쓱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는 “우리도 따라가 볼까?” 제안했다. 그러곤 이내 아내의 팔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대오에 합류하셨다. “까짓것. 함께하지 뭐.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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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대비되는 마음 주위에서 장난처럼 ‘성당 다니며 성당 오빠 없었냐’ 물을 때면 스치는 얼굴이 있다. 20대 후반 무렵 청년모임에서 알고 지낸 그는 혀끝과 글자로 세상을 바꾸려 했던 당시 내 지인들과 결이 좀 달랐다. 사진을 배우려는 후배한테 난해한 이론을 설명하는 대신 낡은 카메라를 고쳐 연습해보라며 건넸고, 북소리를 좋아한다 했더니 ‘꽹과리만 한 조그만 애가 북은 무슨’ 피식거리며 담배 연기를 뿜던 복학생 선배와 달리 북은 힘이 아닌 반동으로 들어 올리는 것이라며 오북놀이를 과학적으로 설명해줬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미사 후 끼니를 때우러 분식집에 들어가 유부우동을 두 입쯤 먹었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여럿이 삼겹살 구우러 간다며 너 어디냐길래 이미 저녁 먹고 있다 했더니, 그 맛없는 걸 얼른 해치우고 여기 합류하란다. “전 절반 먹으면 배부른데. 다 버릴 수도 없고요.” 얼마 안 되어 그가 식당에 들어섰다. 선 채 성호를 긋더니 세 젓가락 만에 우동을 후루룩 삼키고 고깃집으로 이끌었다. “맛없는 건 원래 혼자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그 말이 좋아서 기억해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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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반짝이던 것이 스러진 자리에서 부임한 지 보름 지난 첫 학기의 초가을날, 강의실에 들어가니 학생들이 조심스레 휴강에 관해 물었다. 다음주에 단과대 체육대회가 예정되어 있는데 큰 연례행사라 통상 그날은 수업을 안 한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교과목들의 강의 준비를 하루 쉴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입꼬리가 자꾸 올라가려 해 칠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논다고 좋아서 선생의 입이 찢어진 걸 보면 학생들이 얼마나 당황할까 싶었다. “휴강해야 하는군요.” 난감함을 연기하느라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한 성실한 복학생이 내가 진짜 아쉬워하는 줄 알고 의무는 아니라며 말문을 떼길래 다급히 “아녜요. 그날 쉬고 학기 말에 보강하죠” 외쳤다. 이내 본심을 들킨 게 부끄러워져 그 시간대에 경기 보러 가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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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내게 우선하는 가치 하늘이 높고 볕이 쨍했던 늦여름으로 기억한다. 수업이나 다른 업무가 없던 금요일 오후라, 모처럼 학교 밖으로 나가 늦은 점심 겸해 커피와 빵을 먹고 오기로 했다. 노트북도 챙겨 룰루랄라 아랫마을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려야 할 곳을 한 정류장 앞둔 사거리에서였다. 신호변경 직전 기사님이 다급히 차선을 변경하시더니 좌회전을 시도했다. 원래대로라면 직진해야 했는데 얼마 전부터 시행되던 노선 전면 개편으로 인해 순간적으로 혼동하신 듯했다. 무리해서 모퉁이를 돌던 우리 버스는 옆 차선에서 좌회전하던 화물차량과 이상한 각도를 만들어냈고 다음 순간 ‘쿵’ 소리가 들렸다. 승객들이 미처 소리를 지르기 전에 전면의 유리창이 일부 깨지며 버스가 멈춰 섰다. 경미하긴 했으나 추돌사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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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소심한 타전 ‘비디오방’에 처음 간 것은 대학에 입학한 해의 봄이었다. 공강 시간에 동기 남자아이가 “포켓볼을 가르쳐줄까?” 묻길래 그것 말고 후문에 있는 비디오방이란 데에 가보고 싶다 답했다.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길래 헐렁한 원피스에 중절모 쓴, 포스터 속 갈래머리 소녀가 인상적이던 <연인>을 택했다. ‘무삭제판’이라고 빨간 글씨로 쓰여 있는 게 좀 걸렸으나 무슨 무슨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길래 호기심이 일었다. 친구의 표정이 안 좋아진 걸 무시한 채 “이거 볼래” 고집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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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밤에 하는 산책 여름을 기다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밤에 하는 산책’이다. 거주지가 학교 근방이라 보통 퇴근 후 교정이나 교내 원형운동장을 슬렁슬렁 걷곤 하지만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해넘이 시간이 늦어지면 버스 타고 아랫마을로 내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아다닌다. 목적지 없이 걷다 오래된 연립주택 단지의 사잇길로 들어섰던 밤이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자동차 클랙슨과 흩날리는 빗방울을 피하고자 건물 처마 쪽에 몸을 밀착시켰다. 1층 어느 창틈에선가 생선 굽는 냄새가 났다. 김치찌개 냄새와 알감자나 어묵 같은 것을 달큼하게 졸이는 내음도 한데 섞여들었다. 반쯤 드리운 부엌 커튼 사이로 옛날식 가스레인지와 싱크대가 얼핏 보였다. 뚝배기에선 찌개가 보글보글 끓었고 도마엔 채소들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옆 칸에선 서툴지만 또박또박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솔도 미솔도 미레 레도 도시라라. 유년기 여름날 동네 음악학원의 열린 창 너머로 흘러나오던 익숙한 ‘소녀의 기도’ 멜로디였다. <피아노 명곡집>에 수록되었던 이 곡은 과연 세대를 초월하여 소녀들에게 사랑받는 명연습곡인가 보았다. 아니, 어쩌면 소년의 연주였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일상 공간 주변에 계속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집밥 내음과 피아노 소리가 있는 그 장면이 좋아 할 수 있는 한 천천히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