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에 마음을 담는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선생님은 일할 때 사소한 데까지 마음을 담는 게 보여요. 세미나 공지메일 몇 줄에서 마음이 느껴지고요. 그게 인상 깊었어요.” 갓 학위를 받고 연구소에서 일할 무렵 어떤 분께 들은 평이다. 그 말씀이 좋아서 아껴 간직했다. 때때로 혹자에게 순응적이라고 비웃음 사거나 ‘너무 애쓰며 살지 말라’는 핀잔을 듣고도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시간이 흐르며 할 일은 차츰 늘었다. 논문 외에 기한을 맞춰 써낼 원고나 심사평 등이 많아졌고, 수업 외에 참여할 회의나 작성할 기획서가 쌓여갔다. 교내식당 다녀올 시간을 못 내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워도 이것저것 일처리하다 보면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했다. 비슷한 연차의 동료들에 비해 격무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까지 마감에 쫓길까. 시간과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것에 일일이 마음을 담으려다 보니 항상 종종거리는 것일까. 사소한 문구를 고민하느라 논문 진도가 더뎌지고, 짧은 토론문을 되풀이해 다듬다가 사회적 관계의 도리를 못하는 식으로. 예전엔 “네” “그러죠” 같은 단답형 메일이 무례하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그건 무성의함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일처리를 미루지 않기 위한 방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지체된 답메일로 곤란했을 이들 역시 유려한 답변보다 차라리 ‘예/아니요’의 건조하되 즉각적인 답변을 더 원했을 테다. 보석처럼 품어왔던 저 평은 칭찬이 아니라 결함에 대한 지적이었을까.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몇 해 전, 폭설이 왔을 때다. 층계와 벤치는 물론 학생들이 만든 눈사람마저 눈 속에 폭 파묻혔다. 내가 재직하는 학교는 중산간에 위치한 터라 스노체인을 감지 않은 차량은 그럴 때 교내로 진입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른 시각에 주변 도로상태를 알리는 단체문자를 총무과에서 발송해준다. 그해 겨울엔 달포가량 아침마다 그 알림음을 들으며 잠에서 깼는데, 언젠가부터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통상 이런 종류의 공지는 기본문구를 ‘복사해 붙이는’ 방식으로 발송될 법하지만 이 안내문자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통행이 아예 불가능한지 아니면 다닐 순 있는지 등, 내용에 차이가 나는 게 아니라 ‘폭설이 내려’ ‘계속 눈이 내려’ ‘엄청 눈이 와’ 식으로 표현이 미세하게 변주되었던 거다.

이를 눈여겨본 이유는 바로 내가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학회 공지메일을 보내거나 심사의견서를 쓰며, 심지어 일 관련 카톡을 보낼 때조차 단어와 어미를 고치고 또 고치니까. 가령 ‘듯합니다’를 ‘같습니다’로, 다시 ‘같아서요’로. 동일한 어휘를 반복해 사용하기 싫고, 상대에게 적확하면서도 아름답게 닿을 표현을 고르고 싶어서 말이다.

하루는 새벽녘 ‘많은 눈이’로 시작되는 공지를 확인한 후 설핏 다시 잠들었다. 삼십분가량 지났을까. 알림음이 재차 울렸다. 휴대폰 화면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너무 많은 눈이’로 시작되는 문자가 그새 한 통 더 온 것이다. 짐작건대 담당 교직원 선생님이 단체문자를 발송한 후 출근해서 직접 보니 ‘이거 눈이 쌓여도 너무 쌓였군’ 싶으셨던가 보다. 그래서 재빨리 단어를 추가하신 걸까. 그 장면을 상상하니 심장이 따뜻해져왔다. 내가 사소한 일 안에 담아낸 마음 또한 누군가에겐 이렇듯 온기를 품은 채 타전되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단편소설에서 읽은 다음 구절이 기억났다.

“동봉한 편지에 아버지는 ‘나는 너를 믿는다. 네 소신껏 희망을 갖고 밀고 나가거라. 어차피 인생이란 그런것이 아니겠냐’라고 써놓은 뒤, ‘아니겠냐’의 ‘겠’과 ‘냐’ 사이에 V자를 그려놓고 ‘느’를 부기했다.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아니겠냐’라고 쓴 뒤에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중간에 ‘느’자를 삽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린다.”(김연수, “뉴욕제과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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