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찰나의 누적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지난가을 국내 개봉한 <퍼스트 카우>란 영화가 있다. 강변 숲속을 산책하던 사람이 흙더미 안에 나란히 누인 유골 두 구를 발견하는 데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유골의 주인이자 영화의 주인공은 미국 개척기를 살았던 두 남자다. 둘은 서부영화에서 흔히 보아온 ‘따발총’ 쏘는 보안관이나 말 달리는 카우보이가 아니라 장터에서 꿀우유빵을 튀겨 팔던 행상꾼이다. 이들은 마을 유지인 팩터 대장네 마당에 묶인 소의 젖을 몰래 짜서, 그걸 넣어 반죽한 빵으로 소소하게 돈벌이한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둘 중 ‘쿠키’라 불리는 이는 고아로 자라나 모피 사냥꾼 무리에 끼어 마을로 흘러든다. 주점에서 시비 붙은 사내들이 주먹 다툼하러 나가면서 애 좀 보고 있으라고 요람을 맡기는, 그러면 엉거주춤 거기 선 채 아빠가 곧 돌아올 거라며 아기를 자장자장 어르는, 그런 결의 사람이다. 한밤에 우유 훔치는 와중에도 ‘네 남편의 죽음은 참 안 됐다’며 소에게 애도부터 전하고, 다음날 ‘네 덕분에 빵을 팔았다’고 등을 쓸어 감사함을 표현하는, 소도둑 아닌 소의 눈망울을 지닌 자. 한편 다른 한 명, ‘킹 루’는 마을 외각에 정주하는 중국 이민자로서 한결 실리적이고 셈이 빨랐다. 쿠키의 빵 굽는 솜씨를 알아보고 노점상을 제안한 쪽도, 재정 관리를 도맡은 쪽도, 들통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기회 될 때 한몫 잡자며 등 떠밀던 쪽도 킹 루였다.

이 어설픈 우유 도둑들은 이내 꼬리가 밟혀 쫓기는 신세가 된다. 날 밝는 대로 강에서 첫 배를 타고 도주할 계획을 세우지만, 바위에 부딪혀 머리를 다친 쿠키는 부축을 받고도 제대로 걷지 못한다. 어스름한 저녁, 부두를 목전에 두고 숲속에서 쓰러져 혼절하듯 잠든 쿠키를 내려다보던 킹 루가 잠시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을 때 나는 그가 홀로 떠날 거라 지레짐작했다. 그전에 길이 서로 엇갈렸을 때도 쿠키는 친구가 자길 찾아 헤맬까봐 오두막으로 되돌아갔던 반면 킹 루는 나무 위에 숨겨둔 돈주머니를 찾고자 되돌아온 거였으니까. 도망치던 내내 돈주머니를 꼭 쥐고 놓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그는 돈주머니 들고 튀는 대신 그걸 베고 친구 옆에 나란히 눕는다. “우린 금방 떠날 거야. 네겐 내가 있잖아”라며. 영화 화면은 거기서 그대로 닫힌다.

동트기 전, 둘은 총 든 팩터 대장의 부하에게 발각되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아무렇게나 파묻혔겠지. 죽기 직전 어쩌면 킹 루는 후회했을까. 두 시간 남짓 그들 삶의 관객이었던 내가 함부로 의외라고 치부했던 선택에 대해.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건 감독이 ‘지금’ ‘여기’서 포착해 담아낸 대상은 그 선택의 결과로 남겨진 두 구의 유골이 들려주는 이야기란 점이다.

친구의 노동력을 이용해 이재를 추구하는 듯 보였던 자가 다친 친구 곁에서 위험을 감내하기로 한 결정. 개척기의 드센 수컷 세계에 어울리지 않게 순정했던 외톨이와 생존을 위해 조금은 약아져야 했던 다른 외톨이가 나눈 한 줌의 우정과 신뢰. 어쩌면 세상을 지탱해온 것은 성군들의 치세나 장군들의 승전보나 과학자들의 발명만이 아닌, 기록되지 않고 스러진 존재들이 만들어낸 그런 선한 찰나의 누적 아닐까.

흑백의 뚜렷한 이항대립으로 규정 안 될 다양한 명도와 채도의 회색 존재들. 이들의 내면은 양각으로 돋아 있기보다 음각으로 세밀하게 파여 있어, 관계 안에서 파인 결을 서로의 살갗에 닿는 촉감처럼 감지할 것이다. 이로써 자신과 닮은 상대의 취약성을 알아보아 공감과 연대를 형성하고, 내밀한 상흔을 통해 세상의 부조리를 증거하며, 체제와 법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생성 중인 인권’을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그 화학작용을 빚어내는 선물 같은 순간들을 영화나 소설 속에서, 옛 문서더미 안에서, 그리고 일상에서 길어내어 이 지면을 통해 할 수 있는 만큼 나누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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