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경찰 조직 엔카베데(NKVD) 소속 대위 볼코노고프는 어느 아침 출근길에 직속상관의 투신을 목격한다. 참모 회의가 취소되고 부서 동료가 하나둘씩 재심사로 불려들어가자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직감한다. ‘피의 대숙청’이 한창이던 1938년의 스탈린 정권하에서 이는 내부숙청 대상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했다. 자기 차례가 오기 직전 볼코노고프는 탈출을 감행한다. 그날 밤 노숙인 무리에 섞여 있던 그는 처형당한 이들을 파묻는 노역에 동원되고, 불과 아침까지도 함께 농담을 주고받던 가까운 동료의 시신을 거기서 본다.
동료의 유령은 흙더미를 헤치고 나와 말을 건넨다. 내용인즉슨 자기처럼 지옥에서 창자가 끊기는 고통을 겪지 않으려면 죽기 전 한 명에게라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는 거다. 날이 밝자 볼코노고프는 직장에 잠입하여 무고하게 숙청된 이들의 명단을 빼내 온다. 기밀을 쥐고 당국과 협상하거나 망명을 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 적힌 주소로 찾아가 유족의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 영화 <볼코노고프 대위 탈출하다>(나타샤 메르쿨로바, 2023)는 이렇듯 가해에 가담해 손에 피 묻혀온 이의 속죄 행적을 좇는다.
“영혼을 구하기 위한 대탈출”이란 홍보문구와 달리 회개의 장면은 쉽사리 펼쳐지지 않는다. 일터 잃고 재산 몰수당한 채 사회적 죽음을 살아내는 이에게 가해집단 내부자가 찾아와 ‘당신 가족이 고문당하다 죽었는데 용서해달라’고 청함엔 일말의 감동도 없다. 저러면 안 되지 않나. 꿰찔린 상처에 더러운 손 갖다 대는 것 아닌가. 중상 입은 나치 친위대원이 유대인인 자신을 병상에 호출해 ‘편히 눈감을 수 있게 참회를 대신 받아달라’고 간청했다던, 홀로코스트 생존자 비젠탈의 경험도 떠오른다. 피해자에겐 용서하지 않을 권리가 있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대신해 용서를 베풀 권한은 성립하기 어렵다. 아버지가 쓴 누명 때문에 시체보관소 관리직으로 쫓겨난 여의사는 가해자에게 “뒈져버려요”라고 일갈하고, 반체제적 농담을 했다는 죄목으로 아내가 잡혀간 후 술로 연명하던 전 동료는 “이건 또 다른 농담이네”라고 반응한다. 아버지의 죽음을 들은 꼬마는 “당신들이 파시스트보다 고문을 더 잘했나봐요?”라고 되묻는다. 마땅히도 그는 그중 누구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속죄는 그렇다면 무의미할까. 유족을 찾아간 가해자는 ‘내 탓이오’의 달콤한 감상 뒤에 숨어 흐느끼거나 ‘이 죄인이 구원받았습니다’라며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는다. 본인이 체제의 희생자라 강변하지도 않는다. 저마다 다른 상흔의 ‘얼굴’을 마주하며, 그는 그간 가담해온 잔학행위를 차례로 복기한다. 관념 아닌 감각으로. 사후 겪을 거라던 창자가 끊기는 고통에 산 채로 빙의한다. 그리고 기억해낸다. 이른바 “잠재적 적에 대한 예방조치”의 본질이 계획하거나 행하지 않은 일을 강제로 자백시키는 것임을 듣고도 상관의 명을 거부하지 않았음을. 효율적 총살 연습에 동료보다 앞서 자원했음을. 참회는 사과의 언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소환해낸 부정하고픈 기억들로 인해 비로소 가능해진다.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 유령은 회개를 치하하지만, 볼코노고프는 “내가 갈 곳은 천국이 아니”라며 교리에 따른 구원을 앞질러 봉쇄하고자 자살을 택한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와 ‘용서를 청함의 윤리’는 화해 불가하면서도 분리 불가한 채 이렇듯 병존한다.
어떤 죄책감은 “네 탓 아냐”의 위무 대신 비열했던 과거의 자신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요하며 속죄가 제 역할을 충실히 해 충분한 고통을 일으킬 때만 가라앉는다고, 신뢰하는 정신의 선생님께 들었다. 사회적 상흔 역시 그럴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듣는 건 정치적·법적 책임을 제하거나 공동체적 화해를 함부로 논하기 위함이 아니다. 고통스럽게 기억하고 또 기억하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