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센 손을 다시 마주하더라도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토요일의 교정을 걷던 중 누가 “저기요” 하며 말 걸어왔다. 성경 읽기 모임을 함께하자 했다. 아직 날 학생 나이로 봐주는 분이 다 있구나 싶어 기분 좋아져 ‘말씀 감사하지만 전 이미 종교를 갖고 있어서’라 답했다. 그러자 그녀가 내 팔을 꽉 붙들었다. “아뇨. 자매님은 아직 하나님을 아는 게 아녜요.” 요컨대 어머니 하나님을 통해야 오롯한 신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는 거였다. 이런 방식의 선교에 거부감이 컸던 터라 뿌리치며 돌아서는데 뒤에서 간곡한 목소리가 들렸다. “주님은 절대 아버지가 아니에요. 어머니세요.” 어머니 하나님에 관해 알고픈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무엇에 그리 간절했을지 어렴풋이 짐작할 듯했다. 청소년기부터 성당에 다닌 나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화에 공감하기 어려웠으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기도문을 외울 때면 어쩌지 못할 반발감이 일곤 했으니까. 내 경우 신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닌, 사랑받은 제자의 눈길로 재현해낸 선생님에 가까웠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언젠가 억센 손에 의해 내동댕이쳐지는 듯했던 시기가 있었다. 소중한 것들을 차례로 잃어가던 그해 겨울, 거친 힘이 내 내밀한 소망들을 미리 읽고 앞서가 부서뜨리는 것 같은 느낌에 휩싸였다. 누구나 힘든 시간을 겪기 마련이고, 그럴 때면 저런 종류의 감정이 들기도 할 테다. 그런데 당시 진정 견디기 어려웠던 건 상황 자체보다 억센 손의 기묘한 익숙함이었다. 이 기시감은 어디서 온 걸까. 당혹스러웠다. 그러다 몇 해 더 지나서였다. 도서관 서가에 꽂힌 책을 무심코 집어 읽다 한 구절에 이르러 별안간 기억 속 접어둔 페이지들이 좌르르 펼쳐졌다. 억센 손의 정체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어린 딸의 소중한 것들을 알고 앞서가 부서뜨리던 아버지의 손. 딸의 목에 걸린, 선물받은 십자고상 목걸이를 잡아뜯던 손. 딸이 글짓기대회 부상으로 받아와 아껴하던 오디오를 집어던져 조각내던 손. 딸의 뺨을 연거푸 갈기던, 머리를 벽에 찧어 깨뜨리던 손.

근래 <금쪽 상담소> 등의 심리치료프로그램을 시청하며 문득문득 그 손이 떠오른다. 이런 기억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말쑥한 얼굴로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상이한 크기와 깊이의 상흔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고, 심연을 들여다보아 자기 상처를 대면할 필요성도 배울 수 있었다. 그럼에도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렸던 하나의 질문은 “그렇다면, 어떻게?”였다. 가족관계의 내상을 포착하고 거듭 강조함이 자칫 의도와 달리 “이러니 성장 과정이 중요한 거야”, 더 나아가 “가정환경이 한 사람의 인성을 결정해”로 귀결되는 건 아닐지.

우리의 고민은 내 아이를 어떻게 상처 없이 금쪽같이 양육할지뿐 아니라 아이들에게 원부모와의 애착관계만이 절대적이지 않은, 혈연 외의 어른들이 가까이 닿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들을 얼마나 만들 수 있을지로도 향해야 하지 않을까.

이따금 여전히 입술 아닌 마음으로 ‘우리 아버지’라 발음하지 못하는 난 언제 억센 손과 마주할지 모른다. 관계 안에서 다시금 미끄러지고 상처 입고 또 입힐지 모른다. 내면의 캄캄한 지하층으로 가면 어떤 기억들이 얼어붙어 있을 테니. 하지만 바로 위층 거실엔 나의 선생님들이 모여 계신다. 내 안에 반짝이는 것들이 존재함을, 끝인 줄 알았던 순간이 끝이 아님을, 잘못해도 회복할 수 있음을 알게 해주셨던 분들. 옆 서재엔 함께 공부하며 이해의 시간을 쌓아가는 학생들이 있고, 식탁 놓인 방엔 직장선배·동료들이 둘러앉아 밥술을 뜨고 있다. 다락방 올라가면 수녀님도 웃고 계실 테지. 그들이 넣어준 기억들이, 그들과 사랑하며 살고픈 바람이, 캄캄한 과거에 휘둘리려 할 때 버팀터가 되리라 믿는다. 그렇게 버텨낸 나의 존재가 세상 속 다른 누군가를 억센 손의 기억으로부터 떼어내어 끌어안는 가느다란 팔목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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