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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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민족’과 ‘자유’도 일제 잔재? 한 광역자치단체 교육청의 ‘일제 잔재 청산 프로젝트’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친일행적이 있는 작곡가가 지은 교가, 동서남북 등 방위명이나 ‘○○제일고등학교’ 같은 순서가 들어간 교명을 바꾸고, 그 외에도 생활 속 일제 잔재를 찾아내는 데 수억원의 세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특히 눈길이 가는 것은 일제 용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여기에는 ‘반장’ ‘훈화’ ‘휴학계’ ‘파이팅’ ‘간담회’ 등이 꼽혔다. 이것들이 일본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식민지시대 전공자인 이승엽 교수가 페이스북에 자세히 써놓았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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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두 세력의 개혁 경쟁과 개방 경쟁 메이지 정부는 수립 직후인 1868년 초 곧바로 ‘대외화친의 조서’를 발표했다. 도쿠가와 막부가 서양열강과 맺은 조약을 계승하고, 우호관계를 지속한다는 것이었다. ‘존왕양이’와 ‘조약파기’를 부르짖으며 막부 타도파를 지지해온 많은 사무라이들은 아연실색했다. 막부의 ‘저자세 외교’를 공격하며 집권한 새 정부가 서양에 강경한 자세를 취할 거라는 기대가 초장에 무너져버린 것이다. 사실 막부 타도파의 지도자들은 서양과 관계를 단절할 생각이 없었다. 대중여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겉으로는 존왕양이를 주장했지만, 내심 서양 주도의 국제관계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존왕양이 열기가 전국을 뒤덮었을 때 조슈번의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등 ‘배외주의의 영웅들’은 장차 일본이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외국과 무역을 할 수밖에 없다는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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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근대 일본의 묻혀진 목소리들 근대 일본의 아시아 침략은 제국주의 시대였던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그럴까.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대부분의 일본 지식인들은 환호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 했고,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조차도 ‘의전’으로 칭송했다. 청에 맞서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명분이었다. 승전 후 일본은 조선 독립은커녕 세력을 더 확대하기 위해 군비 증가에 열을 올렸다. 이때부터 침략에 반대하는 ‘비전론’이 터져 나왔다.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는 “장수는 끊임없이 전과를 올리지만 국민에게는 쌀 한 톨 생기지 않는다. 무력의 위세를 사방에 떨친다지만 국민은 한 벌의 옷도 얻지 못한다”며 전쟁을 위한 증세를 비난했다. 기독교도 아베 이소오는 비전론이 공상에 불과하다는 비판에 맞서 “한쪽이 먼저 멈추지 않으면 전쟁이 끝나는 때는 오지 않는다. 만약 평화가 올바른 길이라면 평화를 세계에 선언하고 그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상관없지 않은가”라며 마치 전후의 평화헌법체제를 예견한 듯한 발언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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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천황인가, 일왕인가 칼럼을 쓰다보면 신문사에서 일본 천황을 곧잘 일왕으로 고친다. 일본의 임금을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해방 후 오랫동안 천황이라 불러왔으나, 대략 1990년대부터 매스미디어는 일왕이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천황이라고 한다. 이낙연 총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도, 강창일 주일대사가 부임했을 때도 천황이라 불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이 발발하자 일본은 조선에 신정부 승인을 요청했다가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그 외교문서에 중국 황제만 쓸 수 있는 ‘황(皇)’의 글자가 있었고 메이지라는 일본 연호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개국 이래 중국만을 황제로 인정하고, 그 연호를 사용해왔는데, 일본이 이런 오래된 외교관례를 갑자기 무시했으니 조선의 대응은 정당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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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김옥균과 미야자키 도텐의 선상 음주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당하기까지 10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일본의 지원하에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국사범인 그를 정부 실권자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등은 불편해했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영웅 대접을 받았다. 훗날 총리가 되는 이누카이 쓰요시, 아시아주의의 거두 도야마 미쓰루, 근대사상의 태두 후쿠자와 유키치 등 그의 교유범위는 광범했다. 김옥균은 활달하고 ‘센터의식’이 강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이누카이는 김옥균을 데리고 일본철도회사 사장을 방문했다. 서로가 초면이었다. 달변인 김옥균은 이 자리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세상사에 대해 떠들었다. 이누카이는 가끔 거들뿐이었다. 거드는 그를 보고 사장이 말했다. “일본어를 참 잘하시는군요.” 그를 김옥균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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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식민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 몇 해 전 외신기자단 회견에서 한 일본 기자가 우리 관료에게 “식민지 문제에서 일본이 뭘 어떻게 더 하라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우리 관료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이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답했다. 악의에 찬 질문에 대해 우리 국민의 감정을 표현한 말이었지만 외신기자들은 두고두고 수군거렸다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편적인 여성 인권 문제였던 위안부 이슈와 달리, 식민지 문제는 국제사회의 공감을 끌어내기가 쉽지 않은 이슈다. 세계인들에게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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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세종의 ‘문명적 주체’ 만들기 광화문에는 두 개의 동상이 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화폐에도 이 두 분은 등장한다. 왜 이 두 명일까. 이순신 장군은 일본 침입으로 위기에 빠진 ‘민족’을 구했기 때문이고, 세종대왕은 ‘민족의 문자’ 한글을 발명한 분이기 때문일 게다. 두 경우 다 동상까지 세워진 이유는 ‘민족적인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순신은 차치하고 세종의 경우는 좀 생각해볼 만한 지점들이 있다. 세종은 한글창제만 한 게 아니다. 중국의 역법을 소화하여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천문 계산서를 편찬했고 자동 물시계, 해시계를 만들었으며 아악을 제정했다. 장영실·박연 등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주역들이다. 그런데 이것은 ‘민족주의의 개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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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구한말 한·중·일 외교전 1896년 5월 모스크바에서는 세기의 외교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주요 인물들이 속속 도착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긴장에 휩싸여 있던 동아시아 각국도 거물들을 파견했다. 청나라에서는 오랫동안 내정과 외교를 주물러왔던 이홍장이 왔다. 청일전쟁에서 그의 북양함대가 참패하는 바람에 세력은 많이 꺾였지만 국제적으로도 ‘동양의 비스마르크’로 알려진 거물이었다. 일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보냈다. 메이지 정부의 원로로 총리를 두 번 지내며 이토 히로부미와 당시 일본 정계를 양분하던 최고 실력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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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21세기는 일본과 함께 춤을? 이번이 마지막 칼럼이다. 그간 일본만을 주제로 글을 써왔지만 결론은 전 세계인이 일본을 무시해도 한국인만은 일본을 무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저팬 패싱’은 통쾌하기는 한데 우리 국익에 장기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 지금은 거꾸로 전 세계 아무도 일본을 무시하지 않는데, 한국만 무시한다. 물론 전 세계가 일본을 존경한다 해도 한국인은 그럴 필요 없다. 끝내 존경하지 않으나 그렇다고 무시하지는 않는 자세, 그게 대일자세의 입각점이라고 나는 믿는다. 동아시아사 2000년 동안 일본이 신흥강국이 되어 국제질서에 도전한 것은 두 번에 불과하다. 임진왜란과 청일전쟁이다. 임진왜란 전 100여 년은 전국시대였다. 살아남기 위해 각지의 다이묘(大名·영주)들은 대하천 유역을 개발하는 대모험을 감행하고, 농업기술 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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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사 감상법 ② 전회에 이어 일본사에 대한 몇 가지 오해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는 흔히 일본 혹은 일본인이 작다, 자잘하다고 생각한다. 왜인(倭人), 왜국(倭國)의식이다. 전근대 일본인이 키가 작았던 것은 사실이나 역사의 스케일이 작지는 않았다. 선사시대인 죠몽 시대의 거대한 유적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일본 관광길에 흔히 접하는 나라의 도다이사(東大寺)나 이 절의 대불, 또는 오사카성처럼 지금도 각지에 남아 있는 성들의 크기를 떠올려보라. 일본을 드나들던 조선통신사들도 건축물과 시가지의 크기에 탄성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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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사 감상법 ① 일본에 대한 높은 관심에 비하면 한국 사회의 일본사 지식은 매우 부족하다. 중국사나 유럽사에 대해 웬만큼 아는 분들에게도 일본 역사는 생소하다. 그런데 얕은 지식에도 불구하고 일본사에 대한 몇 가지 편견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일본은 원래 후진적이었는데, 근대에 서양문물을 어쩌다가 빨리 받아들인 덕에 앞서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는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에 뒤진 것, 그 결과 식민지가 되어 버린 쓰라린 역사에 대한 보상심리가 깔려 있다. 사실은 어떠한가. 16세기에서 17세기, 그러니까 전국시대가 전개되다가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도쿠가와 막부를 세우던 시기에 일본은 획기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야마구치 게이지, 김현영 역 <일본근세의 쇄국과 개국>). 한반도를 통해 들어온 은 제련기술 회취법(灰吹法)을 받아들여 전국에서 경쟁적으로 은을 채굴했다. 이 시기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전 세계 생산량의 4분의 1~3분의 1을 차지하는 막대한 양이었다. 당시 국제무역은 주로 은으로 결제했음을 생각해보라. 일본은 갑자기 떼부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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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제주도는 지난 8일, 이미 보건복지부의 사업계획 승인을 받은 외국영리병원(녹지국제병원)의 설립 여부를 공론조사 방식으로 최종 결정하겠다고 했다. 바야흐로 공론조사, 숙의(熟議)민주주의의 시대로 가는 것인가. 작년 신고리 원자력발전소 건설 중단 여부를 가리기 위해 ‘공론화위원회’라는 게 만들어졌다. 전국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된 471명의 일반시민이 89일간, 67차례의 회의와 토론을 거쳐 결국 59.5% 대 40.5%로 공사 속행을 결정했다. 이 시민들의 결정을 정부는 국무회의를 거쳐 수용했다. 이에 대해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한쪽에서는 숙의민주주의로 대의민주제를 보완하는 것이라며 환영한 반면, 반대쪽은 국회의 권능을 무시하는 초헌법적 기구라고 우려했다. 이에 대해 박원호 교수(서울대 정치외교학부)는 “공론조사는 대의제와 직접민주주의의 중간쯤에 놓인 미지의 영역”(2017년 9월20일 중앙일보 칼럼)이라고 조심스레 진단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