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면종복배’를 헌법 전문에 넣자 동료들과 여수·순천 지역 답사를 다녀왔다. 답사의 묘미 중 하나는 역시 이동 중 나누는 대화(수다?)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내가 농담조로 말했다. “한국 역사를 생각하다 보면 난 우리 헌법 전문에 임기응변, 면종복배라는 말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다들 역사학도인지라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듣고 깔깔댔다.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의아하실 것이다. 흔히들 우리 역사는 ‘고난에 찬 저항의 역사’라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무엇으로 그 엄청난 도전에 저항했는지가 중요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건 양만춘(안시성 전투), 을지문덕(살수대첩), 강감찬(귀주대첩), 이순신(임진왜란) 등 전쟁영웅들이다. 을지로, 충무로, 이순신동상, 낙성대 등으로 이들을 기리느라 분주하다. 그러나 무력저항에 대한 찬양만으로는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조공국으로 지내온 한국사를 쉽사리 설명해내지 못한다. 수많은 침략과 외세의 간섭을 겪으면서도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세계 유수의 문명사회를 꾸준히 유지해왔다는 것, 여기에 한국사의 매력과 비밀, 그리고 한국인의 힘이 숨어 있다. 나는 그것을 임기응변과 면종복배라는 다소 과격한 말로 표현한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일본사 시민강좌’를 기다리며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 학회도 온라인으로 해야 하던 어느 날, 한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먼 지방에 계시면서도 매달 열리는 학회에 꼬박꼬박 참석하시던 조용한 분이다. 이번에 정년퇴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념’으로 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 학회가 그간 쌓아온 일본사에 대한 연구 성과를 시민들과 나누는 일에 썼으면 좋겠다는 나지막한 부탁과 함께 짧은 통화는 끝났다. 작년부터 일본사학회장을 맡고 있는 나는 학회 임원들과 상의하여 ‘일본사 시민강좌’ 같은 걸 해보자는 쪽으로 뜻을 모으고, 코로나가 잠잠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사이 경향신문에 공동 주최 의사를 타진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총 10회의 강연회로,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일본사 대중강연 시리즈이지 싶다.
-
역사와 현실 일본인은 정말 전쟁을 아는가 저명한 일본사학자 나카무라 마사노리는 패전 후 일본을 이렇게 회상했다. “신주쿠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는데, 주변은 불탄 벌판이었고 검붉게 그은 함석으로 만든 판잣집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2~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세탄 백화점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략) 학교에 가보았더니 불타서 내려앉아 거무스름해진 주춧돌만 남아 있었다.” 그는 ‘전쟁에 진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라고 생각했다고 한다.(<일본전후사 1945~2005>) 나는 이 글을 읽을 때 ‘아, 일본인의 전쟁 이미지는 역시 이런 것인가’ 하는 이질감을 느꼈다.
-
역사와 현실 ‘뜨거운 감자’ 흥선대원군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진압군 파견을 요청했다. 병자호란 후 약 250년 만에 처음으로 2000명의 청군이 서울에 진주했다. 청나라는 민씨들에게 밀려나 있던 대원군이 군란의 수모자라고 보고, 그를 청으로 납치했다. 국왕의 생부에 대한 전대미문의 행동이었다. 고종과 민씨들은 환호했지만, 기쁨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다. 대원군이 귀국한다는 풍문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청도 그를 오랫동안 붙잡아두는 건 부담스러웠고, 조선에는 대원군 지지 세력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특히 위정척사 세력이 강한 경상도에서는 모반 움직임까지 있었다. 어느새 대원군 귀국 문제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
역사와 현실 야성적 민주주의 지난 3월9일 대통령 선거 출구조사 결과가 박빙의 차이로 나온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선거 불복에 대한 우려였다. 사전투표 과정에서 적지 않은 잡음이 있었던 터라, 어느 쪽이든 패자가 승복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5년 전에도 큰 걱정을 한 적이 있다. 대통령 탄핵 시위 군중을 보면서, 혹시 폭력사태가 나면 어쩌나 했다. 불복과 폭력은 문자 그대로 ‘피로 쟁취한 한국 민주주의’를 파탄 낼 것이기 때문이다. 모두 기우였다. 비서양 세계에서 민주주의를 맨 먼저 실험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서양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헌법 제정(1889년)과 의회 설치(1890년)를 이룬 나라다. 1870년대에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시행한 적이 있으나 오래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일본은 몇 번의 계엄령은 있었어도, 헌법이 정지되거나 의회가 폐쇄된 적은 없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에도 헌정은 유지되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지고 맥아더가 약 7년간 군정을 실시할 때, 헌정 실시 이래 최초로 헌법을 개정했다. 그래서 현행 헌법인 ‘일본국헌법’이 탄생했는데, 이 과정에서도 총선거는 실시되었고, 의회 문이 닫히는 일은 없었다.
-
역사와 현실 이상화의 ‘편파해설’ 얼마 전 베이징 동계올림픽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봤다.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의 경기를 중계하던 이상화 해설위원의 모습이다. 화면을 보지 않았다면 한국 선수 경기로 오해할 뻔했다. 이상화는 시종 편파적으로(?) 고다이라를 응원하다 뒤처지자,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안타까워했다. 고다이라 선수의 격차가 벌어지자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표정과 눈물에 가득 찬 진심은 누구나 동감할 것이다. 오랜 친구이자 라이벌에 대한 우정일 수도, 또는 벌써 만 36세가 된 스케이터에 대한 연민일 수도 있겠다. 친구의 눈물어린 ‘편파해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경기 직후 한국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대자 고다이라는 “Where’s 상화?”라고 하더니 한국말로 “상화, 잘 있었어? 보고 싶었어”라며 웃었다.
-
역사와 현실 점입가경, 일본의 혐한 일본의 혐한 풍조가 점입가경이다. 혐한이 하나의 풍조가 된 지 오래지만, 한국 때리기가 ‘장사’가 되자 명색이 언론이라는 매체들까지 노골적으로 혐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우리 귀에도 익숙한 어느 종합잡지는 한국에 대해 ‘격분과 배신’이라는 표현을 썼고, 또 다른 주간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것이 한국인의 병리라는 내용의 기사까지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일본의 대표적 언론 아사히신문이 지난 16일자에 ‘혐한과 미디어, 반감 부추기는 풍조를 우려한다’는 제목의 사설을 게재하며, 혐한 보도에 맹공을 퍼부었다. 아사히는 한국인을 싸잡아 ‘병리’ 운운한 것은 민족차별이라며, 판매 촉진이나 시청률을 목적으로 이런 보도를 하는 것이 언론이라는 공기(公器)가 할 일인가라고 비판했다. 이 신문은 앞서 10일에도 ‘재일한국인의 피해, 증오범죄를 용서하지 말자’는 사설을 실었다. 재일한국인들의 집단거주지에 대한 방화, 민단 건물 시설의 파손 등을 규탄하며 철저한 수사와 처벌을 촉구했다.
-
역사와 현실 ‘타는 목마름’으로만 되던 시대는 갔다 얼마 전 중국 국무원이 ‘중국의 민주’라는 백서를 발간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10개 국가를 모아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여는 데 대한 대응이었다. 한때 중국은 선거, 다당제, 인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같은 민주주의의 기본가치를 인정하면서 서방의 민주주의 공세에 수세적인 자세를 보인 바 있다. 그런데 예상대로 이번에는 ‘민주주의 모델은 하나가 아니다’라며 서구의 민주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중국식 민주’를 제창했다. 백서는 국민이 투표할 때만 잠깐 대접받고 나머지 기간엔 냉대받는 현실, 선거로 구성된 의회라는 것이 국민의 대표라기보다는 자본가와 사회 이익단체의 대표라는 사실, 국민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체제지만 그 결과는 포퓰리즘과 불평등, 방역 실패 등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지는 못하고 있는 실상을 지적한다. 반면 중국공산당의 일당 통치는 자본가나 이익단체 등 중간계급의 준동을 배제하고, 국가가 국민의 생존과 삶의 질을 ‘책임지고’ 보장하는 체제라는 점에서 말만 ‘민주주의’인 나라보다 훨씬 ‘위민적(爲民的)’ ‘민본적(民本的)’이라는 것이다. 일리 있어 솔깃하다.
-
역사와 현실 역사교육, 다시 ‘우물 안 개구리’로 유턴? 교육부가 2012년부터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쳐 온 교과목 <동아시아사>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동양사학회와 일본사학회를 비롯한 관련학계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동아시아사>는 주로 한·중·일 3국의 역사를 비교사의 시각에서 가르치는 것으로 교과목 창설 당시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얻은 바 있다. 한국고대사 연구로 저명한 와세다 대학의 이성시(李成市) 교수가 사석에서 ‘한국이 아니고서는 단행할 수 없는 역사교육의 큰 변화’라고 놀라움을 표시한 걸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
역사와 현실 진영을 넘나든 정치가들의 활극, 메이지유신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져가던 1860년대 막부에는 가쓰 가이슈(勝海舟)라는 인물이 있었다.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에서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멘토로 유명하다. 최하급 신분이었음에도 출중한 능력으로 요직에 발탁되었다. 당시는 사쓰마, 조슈를 중심으로 한 반막부 세력이 막부에 도전하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가쓰는 이 진영 대립의 시기에 ‘진영 논리’에 갇히지 않았다. 그는 막부가 권력을 독차지하던 시대는 지났다며 권력 공유를 주장했다. 대정봉환(大政奉還·대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을 구상하고 막부 측 인사들을 설득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나눠 갖는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막부 실세들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진에 뛰어들어 사쓰마번의 실세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만나 막부와 사쓰마, 조슈번 등이 천황 밑에 연합정권을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사이고는 이를 ‘공화정치’라고 호명했다. 메이지유신(1868)이 일어나기 3년여 전이었다.
-
역사와 현실 한·일 대학생 ‘일본 인식의 덫’ 넘어서기 지난 9월17일 한·일 대학생들 간에 한·일관계를 주제로 한 토론이 있었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와 포니정재단이 마련한 자리였다. “일본 학생들이 역사문제에 대한 인식은 없이 K팝이나 한류 드라마를 그냥 소비하는 건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한 학생이 말하자, 바다 건너(온라인 회의) 한 학생이 대답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그런 학생들도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역사의식이 없다고 비판하는 것은 또 하나의 가해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본 청년들이 BTS를, 한국 젊은이들이 유니클로를 자유롭게 소비하면 안 되나요?”
-
역사와 현실 나이와 역사 역사를 읽을 때 등장인물의 나이를 염두에 두려고 노력한다. 보통 나이는 안 쓰여 있기 때문에 따로 신경을 써야 한다. 살다보면 한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결정하는 데 나이나 그가 속한 세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끼게 된다. 역사상의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몇 살이었는지, 이하응은 대원군으로 집권할 때 어느 정도 나이였는지를 감안하며 책을 읽으면 더 실감난다. 이하응은 44세에 그 자리에 올랐으니 권력욕은 끝을 몰랐을 것이다. 명성황후는 이때 23세. 이 나이로 시아버지에게 대들었으니 그 배짱과 캐릭터를 짐작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