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메이지유신과 386의 유신 메이지유신이 일어난 지 150년이 지났다. 1868년 교토 궁궐에서 벌어진 쿠데타로 270년간 집권했던 도쿠가와막부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새로이 등장한 유신정부는 부국강병, 문명개화 등 ‘근대화’ 정책을 전광석화처럼 추진해나갔다. 백절불굴(百折不屈), 우회는 있어도 후퇴는 없었다. 그로부터 일본은 가히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그런데 왜 메이지혁명이나 일본혁명이 아니고 겨우(?) 유신(維新)인가. 프랑스 대혁명, 청교도혁명, 러시아혁명, 중국혁명 등등… 흔하디흔한 혁명을 왜 갖다 붙이지 않은 것일까.
-
역사와 현실 문의 나라 한국, 무의 나라 일본? 얼마 전 일본의 한 신문이 설문조사를 했더니 남자 어린이 희망 1순위는 놀랍게도(!) 학자, 박사였다(한국 남자 어린이는 운동선수). 흔히 한국은 문의 나라, 일본은 무의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출판, 신문시장 규모가 말해주듯 인구비율을 감안한다 해도 독서 인구는 일본이 압도적으로 많다. 스마트폰이 책을 초토화시킨 현재도 공공장소에서 독서하는 일본시민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일반 독서 말고 학문은 어떠한가. 매년 연말 노벨상 시상식 때가 되면 새삼스레 일본 학문의 저력에 놀란다. 노벨상을 누워서 떡 먹듯 받기 때문이다. 노벨상은 주로 이과계통 학문에 주어지는데, 문과계통 학문의 수준은 어떨까. 아마도 사회과학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속한 분야인 역사학, 혹은 동아시아학에서는 20세기 세계 학계를 이끌어 온 것은 일본학자들이었다. 이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문수준은 세계를 압도했지만, 영어(구미어)가 아니라 주로 일본어로 작업했기 때문에, 영향력은 그 가치의 몇십 분의 일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수준은 세계 최고였으나 영향력은 간접적이었고, 때로는 묻혔다.
-
역사와 현실 고대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찾아서 방학이 되면 곧잘 벌어지는 것이 ‘고대 일본 속의 한민족사를 찾아서’ 같은 종류의 답사나 여행들이다. 그것도 우리나라 굴지의 단체가 기획하고 지도급 인사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자체로는 지적으로 흥미로운 기획이다. 그 옛날 반도에 살던 주민들이 무슨 연유로 그 먼 곳까지 갔는지, 그들은 열도의 주민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고 삶의 터전을 일구어 냈는지, 그들이 지니고 왔을 우수한 문물들은 열도 주민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탐구할 거리가 널려 있다. 그러나 그런 답사들의 목적은 대부분 이런 지적 관심보다는 고대에 ‘한국’이 ‘일본’보다 얼마나 우월했는지, 선진문명을 전해주며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참가한 사람들은 대체로 유적이나 문화재 앞에 서서 “아, 이게 다 ‘한국’이 ‘일본’에 전해준 거구나” 하며 가슴 벅차 하다가 곧바로 “그러니 ‘일본’ 너희들이 아무리 까불어대도 너희들은 다 우리 학생이야, 고얀 것들 선생님 대접을 이렇게 해?” 하며 돌아선다.
-
역사와 현실 한국사 감상법 한국인들의 역사인식(자국사인식)은 불안정하다. 별 근거도 없이 극에서 극으로 흔들려 과대평가와 자기폄하 사이를 수시로 왔다 갔다 한다. 먼저 과대평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자국사가 단순한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국민설화’를 만드는 기둥이기도 한 이상, 예를 들면 교과서가 자국민에게 정당한 프라이드를 갖게 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러나 ‘국민설화’도 학문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이걸 벗어나면 ‘국민마약’이 된다. 마약은 달콤하다. 가장 환호하는 것은 상고사 분야, 즉 잃어버린 ‘위대한 고대제국’에 대한 열망이다. 이 주장은 학술적으로 입증된 주장, 즉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학설을 부정하고, 거꾸로 중국에 대한 한반도 역사의 영향을 강변한다.
-
역사와 현실 연금술은 우리의 적 지난번 낙랑군 위치를 둘러싸고 사이비역사학이 극성일 때 어느 국회의원이 우리나라 역사를 위해서는 낙랑군이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단다. 그러더니 이번엔 최고(最古) 금속활자로 기대(?)를 모았지만 학술적으로 아직 확인이 안 된 증도가자(證道歌字)를 놓고도 모 의원이 “국익 차원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진짜라고) 주장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우리끼리 쉬쉬하며 최고(最古) 문화유산을 양산해낸다고 무슨 국익이 된다는 걸까. 그러고 보니 황우석 사태 때도 국익을 위해서는 그냥 덮고 넘어가야지 그걸 우리끼리 폭로하냐며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역사와 현실 메이지 일본의 ‘성공’ 비결 일본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에 가면 고료카쿠(五稜郭)라는 성이 남아 있다. 1868년 궁정 쿠데타로 천황을 빼앗기고 한순간에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된 도쿠가와 막부군이 마지막 저항을 했던 곳이다. 교토를 탈출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본거지인 에도(江戶·지금의 도쿄)로 돌아왔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천황군은 에도 코앞까지 진군해왔다. 일촉즉발, 인구 100만이 사는 에도 한복판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질 참이었다. 에도 총공격 하루 전 양측은 전격 합의했다. 쇼군은 항복하고 일개 다이묘(大名·봉건영주)로 내려가기로. 천황군은 에도를 무혈 접수했다.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막부 가신들은 앙앙불락, 폭발 직전이었다. 이때 막부해군 총사령관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반발세력을 함대에 태우고 에도만을 탈출하여 머나먼 홋카이도(당시는 에조치·蝦夷地, 즉 오랑캐 땅이라 불렀다)로 향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중과부적, 에노모토는 1869년 5월 투항했다(손일 <에노모토 다케아키와 메이지 유신>).
-
역사와 현실 일본을 대하는 법 세계에서 일본을 무시하는 것은 한국 사람들뿐이라는 얘기가 있다. 실제로 유럽인들은 일본 사회를 약간 이상하게는 봐도 무시하지는 않으며, 중국인들은 아주 미워하면서도 그렇다고 깔보지는 않는다. 내가 20여년 전 일본 유학을 떠난다고 하니 친척 어른들은 “일본 역사(간혹 왜X 역사라고 하는 분들도 있었다)에서 뭘 배울 게 있다고 유학을 가도 하필…”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거기다 대고 나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해봤지만 그다지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격차는 컸다. ‘왜X’ 운운하는 친척 어른들도 “물건은 일제가 최고”라며 도시바 선풍기 앞을 떠날 줄 몰랐고, 백화점이나 다리가 무너지자 “왜X들이 일제 때 만든 건 지금도 끄떡없어!” 하며 갑자기 일본 대변인이 되어 버리곤 했다.
-
역사와 현실 조선식민지화의 세계사적 특수성 도쿄 유학 시절 곧잘 대만 친구들하고 어울렸다. 대만도 일본 식민지였기에 ‘같은 편’인 줄 알고, 일본 욕을 하며 맞장구를 기대했다가 김이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들은 별반 ‘반일감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베트남, 인도네시아, 인도 사람들도 식민본국에 대해 썩 유쾌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강렬한 적개심을 표출하는 건 별로 못 본 것 같다. 그럼 우리가 특이하다는 건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위안부, 강제징용을 비롯한 일본의 악행이 가장 큰 이유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가 그동안 간과해 왔던 조선 식민지화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 지적하고자 한다.
-
역사와 현실 지정학적 지옥 한국, 지질학적 지옥 일본 도쿠가와 시대(1603~1868) 일본인들은, 조선은 나약하여 숱한 외침을 받았고, 타국에 복속되기를 밥 먹듯 했다고 비아냥거렸다. 반면 일본은 다른 나라에 침략당한 적도 없고, 전쟁에 져서 속국으로 전락한 적도 없다고 으스댔다. 일본은 ‘불하지국’(不瑕之國·흠이 없는 나라)이라는 것이다. 한반도는 역사상 1000번에 가까운 외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에 비해 일본은 놀랍게도 딱 두 번이다. 한번은 13세기에 몽골군이 송나라, 고려 사람들을 동원해서 북규슈에 침입했다가 태풍으로 패퇴한 적이 있고, 또 한 번은 태평양전쟁 때의 미군이다(고대의 신라해적이나 여진족 침입 등 소소한 것은 제외). 놀라운 수치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지척거리에 있지만, 그 지정학적 조건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큰 자연재해 없는 한반도는 지질학적으론 천국, 지정학적으론 지옥이며, 일본은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
역사와 현실 손정의가 료마에게 배운 것 일본 소프트뱅크 손정의(孫正義·손 마사요시)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다. 독자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일본에서는 초등학교 학생들도 아는 유명인물이다. 손정의는 15살 때 료마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료마가 간다>(한글번역본 <제국의 아침> 시바 료타로, 박문수 옮김, 인터넷에선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을 한글자막으로 감상할 수 있다)를 읽고 감격하여 미국 유학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각혈을 하며 병석에 있었고, 가족의 생계는 막연한 때였다. 어머니도, 친척도, 담임 선생님도, 친구들도 미국행을 말렸고, 듣지 않자 욕을 했다. 그러나 손정의는 미국행을 단행했다. 손정의는 이것이 자기 인생의 첫 번째 승부수였으며, 료마의 ‘탈번(脫藩·봉건영지인 번을 떠나 낭인이 되는 것)’에 자극받은 것이었다고 술회했다.
-
역사와 현실 정유반정 16세기 후 조선사에서는 두 번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이때 반(反)은 ‘반대한다’가 아니라 ‘돌아갈 반(返)’의 뜻이다. 정(正), 즉 올바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연산군을 폐위한 중종반정(1506),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1623)이다. 같은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 현상이다. 반정은 혁명(역성혁명, 즉 왕조교체)과 달리 왕조는 유지하면서, 무도한 통치자를 교체하기 위해 왕가의 다른 사람을 왕으로 옹립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력은 물론 중요하나, 더 중요한 것은 반정의 명분, 즉 여론의 지지를 획득하는 것과 대왕대비의 윤허 등 승계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최소한의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하면서, 결격사유가 있다고 여겨지는 통치자를 교체했다는 점에서, 전근대사에서 주목할 만한 정치현상이다.
-
역사와 현실 천황과 탄핵 1988년 9월19일 일본 천황(국내 신문에서는 일왕으로 표기하지만 여기서는 천황이라고 쓴다) 히로히토(裕仁)가 병석에 눕고 이듬해 1월7일 사망하기까지 벌어진 일에, 세계도 놀랐고, 일본인도 놀랐다. 2차 대전의 패전으로 일본 사회의 전면에서 사라진 듯 보였던 천황의 죽음에 일본인들이 돌연 ‘1억 총자숙(總自肅)’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진보·보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신문 1면에는 마치 날씨 예보처럼 천황의 맥박, 체온수치가 매일 실렸고, 방송국은 쇼, 예능프로는 물론 CF마저도 중단했다. 거리의 네온사인도 꺼졌다. 심지어 우리의 노량진시장에 해당하는 쓰키지 수산시장의 상인은 텔레비전에 나와 장사를 자제하고 있다며, 왜 그러냐는 질문엔 ‘글쎄요…’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음~ 일본인이니까요”라고 답하던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본에서 천황은 풀잎에 이는 바람에도, 거리의 돌멩이 사이에도, 사람들의 숨결 속에도 살아 있다고 했던 한 일본 지식인의 말이 실감나던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