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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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년 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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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 민중운동의 이면 일본 메이지 정권은 수립 후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던 사무라이층은 특권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켰고, 헌정 실시를 요구하는 자유민권운동은 권력 분점을 요구했다. 도전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민중의 반발도 위협적이었다. 농민을 비롯한 민중은 정부의 근대화정책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른바 ‘신정반대 잇키(新政反對一揆)’다. 잇키는 농민 소요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다. 장구한 세월 동안 음력 절기에 맞춰 농사일을 하던 이들에게 양력 실시는 뜬금없는 일이었다. 전통적인 축일(祝日)을 무시하고 제정된 기원절(紀元節·초대 천황 진무의 즉위일), 천장절(天長節·천황 생일) 같은 국경일은 생경했다. 농사일과 집안일을 도와야 할 아이들이 갑자기 학교라는 곳에 의무적으로 가야 한다고 하니, 기막힐 노릇이었다. 1870년대에 전체 학교의 10분의 1인 2000개가 민중에 의해 파괴됐다. 취학률은 지역에 따라 25~50%에 그쳤다. 더구나 소요 과정에서 농민들이 자기들보다 더 아래 신분인 천민(부락민)들을 탄압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많은 민중사가들이 메이지 정부가 아니라 민중에게 ‘근대성’ 혹은 ‘근대를 넘어서는 어떤 전망’을 찾으려 했지만, 민중은 ‘도쿠가와 사마(德川樣)’ 시절이 좋았다며 무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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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한국인의 ‘정치과잉’ 4월10일 아침, 유력 일간지에서 놀라운 1면 톱기사를 봤다. ‘정부 심판 vs 거야 심판, 집권 2년 중간평가 총선’이라는 제목이다. ‘4·10 총선 1년 앞으로’라는 부제가 보였다. 참 대단하다. 1년 남은 총선 기사가 1면 톱에 오를 나라는 아마도 한국뿐일 거다. 나도 역사학 분야 중에서 정치사를 전공하고 있고, 정치기사도 탐독하는 편이지만 이 기사에는 놀라고 말았다. 정말 한국인들은 선거 하고 싶어서 2000년 동안 어떻게 참고 지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인의 ‘정치과잉’이 새삼스러운 얘기는 아니다. 술자리 등 사석에서 정치얘기는 고정메뉴다. 최근 들어 진영논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거, 정치얘기는 하지 맙시다” 하며 서로 눈치 보는 분위기가 생겼지만, 같은 진영끼리 모이는 자리에서는 여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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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자강의 아쉬움 1876년 1월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같은 메이지유신의 원훈들이 사절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왔다. 강화도조약은 그로부터 단 16일 만에 체결되었다. 한국 시민들은 일반적으로 이 조약이 매우 불평등한 것이며, 여기서부터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실상은 꽤 다르다. 1868년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왕정복고가 되었음을 알려왔다. 조선은 그 외교문서에 ‘황(皇)’처럼 중국 황제만이 쓸 수 있는 글자가 있다는 이유로 수령을 거절했다. 당시의 급박한 국제정세를 생각하면 사소한 문제로 서로 타협하지 못한 것이다. 그것도 무려 8년씩이나. 지금도 중국과 달리 한국 매스컴은 천황을 일왕이라고 쓴다. 조선이 외교를 거절하자 일본에서는 모멸을 당했다는 여론이 확산되고 정한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를 철부지 모험주의로 여기는 세력도 있었다. 이 둘이 사생결단으로 맞붙은 게 1873년 겨울의 ‘정한론 정변’이다. 비정한론파가 가까스로 이겼다. 그러니 이들은 축출된 정한론자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국교정상화가 절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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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불친절해진 일본인 “구리다… 구려.” 생맥주를 들이켜던 아들이 말했다. 장소는 도쿄 유라쿠초(有樂町) 야타이 거리. 우리로 치면 포장마차 타운이다. 가게 벽에 걸린 텔레비전을 보고 내뱉은 말이었다. “뭐가 구려?” “저 자막요, 아….” 어린 놈이 한숨은. 예능프로그램인 모양인데 주먹만 한 자막이 붉은 글씨로 떴다 사라졌다 했다. “저 옆에 저것들은 또 뭐예요?” 보니 밑에 자막만 있는 게 아니라 좌우측 상단에 프로그램과 출연자 이름 등도 덕지덕지 붙어 있다. “아까 그거랑 똑같잖아요.” “뭐랑?” 아키하바라와 이케부쿠로 애니메이션 거리를 둘러보고 온 참이었다. “그 건물들에 붙어 있는 간판들하고….” 그러고 보니 ‘빗쿠카메라(ビックカメラ)’ ‘초특가!(超特價!)’ 어쩌고 하는, 쌀 가마니만 한 알록달록 간판들하고 텔레비전 화면이 닮았다. 유년시절을 빠삐, 아톰, 마린 보이 같은 만화(물론 당시엔 일본 만화인 줄 몰랐다)를 보며 컸고, 우리 PD들이 일본 프로그램을 그대로 베낀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살아온 나로서는 깊은 감회에 젖지 않을 수 없는 발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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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한국혁명 이달 초 혁명비교연구회에서 주최한 학회 참석차 도쿄에 다녀왔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일본, 이란, 아랍, 미국 등 8개 지역에서 벌어진 혁명을 비교하는 모임으로 다양한 국적의 연구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 학회에 참가하면서 내게는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문제의식이 하나 있었다. 왜 ‘한국혁명’은 없는가? 메이지유신은 1868년에 일어났으니 한 150년쯤 됐는데, 150년 전의 조선(대원군 치하)과 지금 한국의 변화 정도를 비교하면, 일본은 물론이고 다른 어떤 나라도 명함 내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1860년대 이전 일본을 지배했던 유력가문 상당수는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는데, 한국은 지배층에서 거의 사라졌다. 오늘날 한국의 정계, 관계, 재계를 주름잡는 집안들은 죄다 신흥가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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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노 저팬’에서 일본의 몰락으로? 일본여행 붐이 가히 폭발적이다. 한 업체가 지난 11월 팬데믹 이전에 비해 항공권 판매가 많이 늘어난 지역 랭킹을 조사했더니 오사카·삿포로·후쿠오카·도쿄·오키나와로, 1위에서 5위까지가 모두 일본이고, 일본을 찾는 외국인 중 대략 3분의 1은 한국인이라 한다. ‘노 저팬’을 외치며 한국인 사장과 종업원이 일하는 이자카야 가는 것도 뭐라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정말 ‘다이내믹 코리아’다. 그때 앞장서 ‘일본 보이콧!’ 하던 사람들 중에, 일본여행 규제가 풀리자 맨 앞에서 일본행 티켓을 끊은 분들도 있을 것이다. 뭐 다 옛날 일이니 딱히 뭐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이런 폭발적인 일본여행 붐을, 그 보이콧의 시각에서 비판하는 소리를 거의 들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보이콧 운동의 불씨로 삼았던 문제들 중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달라진 것은 엔화가 엄청 싸졌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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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혹시 ‘한국제국주의’ 원했던 건가 한국인들(남북한)은 너나없이 제국주의 비판에 열을 올린다. 지위고하·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제(美帝) 욕을 해대는 북한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지만, 남한사람들도 그에 못지않다. 대신 미제가 아니라 일제(日帝)다. 북한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이견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이 문제만큼은 총화단결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한국 근대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음모의 산물이고, 메이지 정권 수립(1868) 당시에는 일개 약소농업국에 불과하여 제국주의를 하고 싶어도 할 능력이 없었던 일본은 이미 이때부터 ‘일제’다. ‘일제’는 강화도조약(1876)부터 한국병합(1910)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침략을 치밀하게 기획하여 결국 실현해 내었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이런 시각은 일본을 너무 과대평가한다. 격변의 40년 동안 일관되게 대외방침을 유지하고 부동의 실천력으로 다른 나라를 집어삼켰으니, 이런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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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트러스 여사, 낙담 마시라 트러스 영국 총리가 44일 만에 사임했다. 역대 최단기 재임이라고 한다. 메이, 존슨 같은 다른 총리들과 달리 이상하게 이름이 입에 안 붙다가 이제 좀 나아지려고 했는데 사임이라니 아쉽다. 본인의 심사야 오죽하겠는가. 일본은 1885년 내각제도를 도입했다.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제를 만들어 첫 총리에 올랐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일본 내각의 출발이다. 4년 후 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890년 의회가 개설됐다. 그러나 내각은 의회 다수당이 구성하는 게 아니라, 일왕이 임명한 총리가 조각했다. 내각은 의회가 아니라, 일왕에게 책임을 졌다. 정당내각제, 의원내각제는 아닌 것이다. 이 구조는 1945년 패전 때까지 기본적으로 유지됐다. 총리라 해도 내각 안에서 압도적 권력을 갖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는 메이지유신 원로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각 정파의 권력을 안배하여 조각해야만 했다. 내각에는 총리에 버금가는 거물들이 즐비했다. 독재자가 나오기 어려운 구조였다. 각 정파가 조각에 적극 협조하면 ‘드림팀’이 되고, 거물이 빠지면 ‘이류내각’이라고 조롱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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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한·일 비교의 묘미 조선후기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이제 한·일 비교사(주로 조선후기와 도쿠가와 막부시대 비교)가 조금씩 가능해지고 있다. 막연한 인상 속의 사안들을 학문적으로 증명하는 경험은 짜릿하다. 그 시절에도 한국과 일본은 비슷하면서도 많이 다른 사회였다. 눈에 띄는 것은 문인(양반)-무인(사무라이)이라는 지배층의 차이이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현격한 것이어서 일본은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늦게까지 지배층이 상시 무장을 했던 사회일 것이다. 사무라이는 두 개의 칼을 항상 패용하고 다녔는데, 무기 사용은 정당방위 때만 허용되는 게 아니었다. 예를 들면 평민이 심각한 무례를 범했을 때 그를 베는 것이 가능했다(기리스테 고멘·切捨御免). 이에 비해 조선은 비무장에 가까운 사회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역을 지지 않는 양반과 무기의 거리는 더욱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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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대만에서 전쟁을? 대만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다. 6월인가 7월이었는데 더위가 말도 못했다. 교토의 여름을 겪은 적 있지만 그와는 또 다른 질식더위였다. 걷다 지쳐 들어간 식당은 더 더운 느낌이었다. 냉방 때문이 아니라, 맥주가 맛이 없었다. 게다가 차갑지도 않은 맥주라니. 주위를 둘러보니 술 마시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이 더운데 밥만 먹는구나, 의아했다. 나는 서울과 일산 다음으로 도쿄, 교토에 오래 살았다. 늘 한국과 일본을 섞어서 반으로 딱 나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일본은 너무 매뉴얼에 집착하고 한국은 지나치게 임기응변이다. 일본인은 눈치를 좀 덜 봤으면 좋겠고, 한국인은 주위 의식을 좀 더 했으면 좋겠다는 뭐 그런 거. 세상에 그런 사회가 있겠나 했는데, 있었다! 대만. 타이베이 거리는 단정했지만 도쿄처럼 티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그런 살풍경(?)은 아니었다. 모두들 보행신호를 잘 지켰지만, 어지간한 때는 무단횡단을 하는 인간적인(?) 장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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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순위 매기기 좋아하는 일본인 도쿠가와 시대(1603~1868)에도 일본인들은 스모에 열광했다. 그래서 전국 스모선수들의 랭킹표를 만들어 일반서민들도 이를 보며 즐겼다. 이 표를 ‘방즈케(番付)’라고 한다. 스모에서 시작된 방즈케는 그 후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었다. 온천을 좋아하는 일본인답게 동일본, 서일본으로 나누어 온천 순위를 매겼다. 지금도 간사이, 간토로 동서를 나눠 비교하길 좋아하는 일본인의 지리감각이 오래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동의 오제키(大關, 스모 최고타이틀)는 구사쓰온천, 서는 아리마온천이다. 한국인들이 즐겨찾는 벳푸나 하코네온천은 그 아래 급인 세키와케(關脇)에 랭킹되어 있다. 이 온천들은 지금도 일본을 대표하는 곳들이다. 나도 일본온천을 가볼 만큼 가봤지만, 내게 오제키는 구사쓰온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