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는 시시포스의 운명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이번 학기, 뜻하지 않게 <역사공부의 기초>라는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딱딱한 제목의 과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원래 <사학개론>이었던 과목에 저런 타이틀이 붙었다. 랑케, 크로체, 콜링우드, 역사에서의 주관과 객관, 사회와 역사가…. 뭐 이런 역사철학과 서양사학사에 관한 것이니, 지금까지 서양사 교수들이 담당해왔는데, 어찌어찌하다 내 몫이 되었다.

해서 그 유명한 E 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각 잡고 읽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하도 여러 사람이 인용해(아마 다 읽고 인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조금은 진부해진 그 구절로 잘 알려진 책 말이다. 저 인용구의 전모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김택현 역 <역사란 무엇인가> 46쪽)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역사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맺은 결론이다. 생각보다(?) 훌륭한 책이었다. 그래도 역사공부를 몇십년 하고 나서 읽어 그런지, 재미까지 있었다.

19세기는 사실숭배의 시대였다. 시대의 총아였던 자연과학을 흠모한 나머지, 역사가들은 역사학도 사실에 기초한 객관성의 학문이라 주장하고 싶어 했고, 철저한 사료 탐색을 그 발판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랑케(1795~1885)는 “단지 실제로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고자 할 뿐”이라고 겁도 없이 선언했다. 그 배경엔 19세기 진보와 과학에 대한 유럽인들의 팽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20세기 들어 세계대전을 비롯한 여러 난관을 겪으며 사라졌다. 과학에 대한 믿음도, 진보에 대한 희망도 흔들려버린 시대에 역사학만 온전할 리는 없었다. 독일의 딜타이(1833~1911), 이탈리아의 크로체(1866~1952,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영국의 콜링우드(1889~1943) 등이 사실숭배를 비판하며 역사가의 해석과 관점을 중시했다. 그들의 말대로 역사는 역사가의 관점에 크게 의존할지 모르며, 우리는 오직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처럼 사실보다 역사가의 관점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위험한 일이 생긴다. 보는 사람마다 역사가 무한히 다를 수 있다면 우리는 상대주의에 걸리거나, 그런 역사에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혹은 그처럼 역사에 아무런 객관적 기준이 없다면 당장의 자기 이익에 역사를 이용하는 실용주의로 치달을 수도 있다. 한국과 일본이 각각 자국의 국익을 위한, 좌파와 우파가 각각 자기 진영의 이익을 위한 역사만을 ‘실용적’으로 주장한다면, 역사는 인류의 발전과 향상에 지혜를 주기는커녕, 마치 중동에서의 종교처럼, 분열과 혐오만을 조장하는 불쏘시개로 전락할 것이다.

카가 살던 시대의 유럽, 특히 영국은 지식인들의 회의와 냉소가 횡행하던 때였던 모양이다. 그는 사실은 역사가가 허락하는 한에서만 역사가 된다는 걸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사실의 추구를 소홀히 하는 건 극력 비판했다. 인간이, 역사가가 ‘객관적 실재’를 온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나, 그를 향해 부단히 노력하는 데서 ‘역사학의 객관성’은 확보된다고 그는 보았다. 나도 평소 역사학자의 작업은 시시포스와 비슷한 데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끝없이 사실을 향해 바위를 굴려가는 과정(시시포스처럼 그 과정이 끝나는 일은 없겠지만)에서 획득되는 식견은, 이론 우선의 사회과학이나 창작욕이 왕성한 문학과는 다른 지혜를 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다.

각자가, 각 진영이 사실을 떠나 자기주장만 늘어놓는 시대가 되었다. 사실인지 아닌지, 그래도 조금은 확인해보려는 움직임도 점점 사라져가는 듯하다.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세태 속에서도 카는 사실을 붙들고 낙관주의를 견지했지만, 이런 ‘탈진실의 시대’에 낙관적이 되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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