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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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그 겨울의 정변 게이오(慶應) 3년 12월9일(양력 1868년 1월3일), 조정 대신들이 퇴청하자 일군의 병력이 교토 궁궐의 주요 출입문을 에워쌌다. 주력 부대는 사쓰마번(薩摩藩) 병사들이었다. 전날부터 궁중에선 조슈번(長州藩) 사면 문제를 논의했다. 조슈번은 1864년 교토를 공격한 죄로 조적(朝敵·조정의 역적)이 되었다. 밤을 새운 격론 끝에 조슈번을 사면키로 결정하고 대신들은 궁궐을 나왔다. 그러나 이날 정변을 사전모의한 자들은 궁중에 그대로 머물렀다. 출입문 봉쇄가 확인되자 소년 메이지 천황(15세)을 인형처럼 앉혀두고 ‘왕정복고 대호령’이 반포되었다. 조정과 막부의 주요 관직을 폐지하고 천황 밑에 총재·의정·참여라는 새로운 관직을 설치했다. 이를 역사학자들은 ‘왕정복고 쿠데타’라고 부른다. 총재에는 황족, 의정에는 황족·상급 공경과 다이묘(大名), 참여에는 하급 공경과 번사(藩士)가 임명되었다. 총재는 의례적인 직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의정과 참여가 실질적 권한을 행사했는데, 당시에 이를 각각 상원(上院), 하원(下院)으로 불렀다. 이 시기 여러 개혁가들이 서양을 모델로 한 의사원(議事院), 혹은 의정원(議政院) 설치를 제창했는데, 얼추 그 모양이 갖춰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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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사과의 정치학 어쩌다 보니 막부의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 대해 자주 쓰게 된다. 그에 대한 사료를 읽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요즘 워낙 정국이 어수선하다 보니 대정봉환(大政奉還)-왕정복고(王政復古) 쿠데타로 이어진 정치 위기와 그 극복의 과정이 여러 가지를 생각나게 해서다. 1867년 11월9일 요시노부는 교토에 있던 각 번(藩)의 중신들을 니조성(二條城)으로 불러 모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이래 약 270년간 행사해온 대권을 천황에게 돌려준다고 선언했다(대정봉환). 페리의 위협 아래 단행된 개항(1854)으로 촉발된 정정불안은 이미 극에 달했고, 막부는 수습 능력이 없어 보였다. 여론은 막부의 용단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권력을 스스로 내려놓은 자는 드문 법, 실현될 거라 기대하는 자는 별로 없었다. 그런데 쇼군 요시노부가 정권이양을 전격 발표한 것이다. 여론은 환호했고, 정적이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은 당황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튿날 천황에 제출한 대정봉환 상표문(上表文)에 막부정치의 잘못에 대한 사과가 명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정치가 마땅함을 잃은 점이 적지 않아 금일의 형세에 이른 것은 필경 박덕(薄德)의 소치이니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렵습니다.”(유인선 외 <사료로 보는 아시아사>) 정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니, 한껏 생색을 내도 좋았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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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지사지의 달인이 되자 입시철이 다가온다. 사학과를 지망한 학생들에게 “왜 역사공부를 하려고 하나요?”라고 묻는 경우가 있다. 다는 아니지만 이렇게 답하는 학생이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과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는 선봉에 서고 싶습니다.” 거대야당이 추진하려고 한다는 역사왜곡처벌법에 이 학생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다. 또 이렇게 답하는 학생들도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고 해서 역사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불변의 역사적 진리를 탐구하고 싶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역사의 정의를 세우고 싶습니다”. 이들의 표정은 자못 비장하며, 어조는 확신에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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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스스로 하야한 권력자 내가 메이지유신사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마지막 쇼군(將軍)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의 대정봉환(大政奉還)이었다. 1867년 11월 요시노부는 정권을 천황에게 넘겨주고 쇼군직을 사임했다.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하야(下野)한 것이다. 역사에서는 자기 권력에 끝까지 집착하다가 비참하게 무너지는 일이 일반적이지 않은가.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유력했었다. 즉 사쓰마번·조슈번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요시노부가 선제적으로 정권을 반환해 여론을 반전시킨 후, 새로 구성될 정부에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요시노부는 천황 밑에 ‘의사원(議事院)’을 만들어 그 리더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미심쩍은 점이 적지 않다. 대정봉환 선언이 있은 지 약 두 달 후인 12월9일 사쓰마번은 궁정쿠데타를 일으켜 요시노부를 배제한 채 신정부 수립을 선언했다(왕정복고 쿠데타). 이를 본 요시노부는 가신들의 맹렬한 반대를 뿌리치고 교토의 니조성(二條城)을 나와 오사카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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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붕괴는 내부균열에서부터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15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 관련된 사료를 읽다가 흥미로운 걸 봤다. 요시노부는 당시 교토에서 막부정권을 뒤엎으려는 사쓰마번(薩摩藩), 조슈번(長州藩)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막부를 스스로 해체하고 쇼군(將軍) 자리에서 사임할 것을 선언하며 대권을 천황에게 바쳤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음력 10월14일)이다. 그런데 약 한 달 전인 음력 9월10일 에도(江戶)의 기이번(紀伊藩) 저택에 한 통의 격문이 날아들었다.(<德川慶喜公傳> 7) 도쿠가와가 은고지사(德川家恩顧之士) 명의로 된 이 투서에는 현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로 지칭하며 극렬히 비방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요시노부는 1년 전 히토쓰바시 가문에 양자로 갔다가 도쿠가와가로 돌아와 쇼군에 즉위했는데,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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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서울이라는 도시 파리 올림픽 개회식이 화제다. 센강에 배를 띄워 각국 선수단을 입장시킨 것을 비롯해, 미도(美都) 파리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파리에 거주한 적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파리 예찬이 한창이다. 나는 하루 스쳐 지나간 적밖에 없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도시를 가진 프랑스가 부럽다. 일본 교토(京都)에 가서도 부러워 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문화유산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헤이안(平安) 시대 이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지명 등이 사람들을 시간에 젖게 만든다. ‘지구상에 교토가 남아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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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에도 시민들의 눈길은 미토노공(水戶老公)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쏠렸다. 그는 존왕양이의 스타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번주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다. 당황한 막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기용했다. 도쿠가와는 개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자신을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협박하지 말고, 이번에는 물러나라. 그러면 일본이 캘리포니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개국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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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 사회는 역(役)의 체계 지난번 칼럼(5월9일자)에서 일본 사람들이 각자 맡은 ‘야쿠’(役·역할)를 수행하며 때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1억 총연극의 사회’에 대해 썼는데, 흥미롭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어 부연설명하려고 한다. 야쿠를 역할로 번역했지만,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역할보다는 좀 더 분명하고 엄격하다. 유학 시절 식당에 갔는데 일본인 종업원이 쟁반에 반찬을 올려 서빙을 해줬다. 한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던 나는 반찬 그릇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다. 한국에서는 아주머니가 “학생, 이것 좀 거기다 놔줘요~”라고 하기도 하지 않나(요즘도 한국에 이런 풍경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직 앳된 그는 흠칫 놀라며 “스미마센!”(죄송합니다)을 연발했다. 서빙이라는 자기의 야쿠에 손님이 개입한 데 놀랐던 것이고, 자신의 야쿠 수행에 무슨 큰 결함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장이나 종업원이 바쁜 듯하면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를 알아서 꺼내오는 한국인 손님을 그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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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전문직에 계신 분들과 하는 일본공부모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호후시(防府市)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조슈번 다이묘(長州藩大名)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메이지유신 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성을 허물고 도쿄에 모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국이 좀 안정되자 메이지 정부는 전 다이묘들에게 고향에 거주하는 걸 허락했다. 모리 가문은 조카마치(城下町)였던 하기(萩)나 경제중심지 야마구치 대신 호후에 30만㎡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를 마련해 거처로 삼았다. 가신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8만4000㎡ 규모의 정원은 가을 단풍이 특히나 절경이다. 저택은 국가에 기증하여 모리씨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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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4년간 각국 혁명사가들과 진행한 ‘혁명비교연구’의 출판이 이뤄진다(2023년 1월19일자 본 칼럼 ‘한국혁명’ 참조).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고치고 결론을 새로 쓰다 보니 ‘점진적 대변혁’이란 메이지유신의 특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일찌감치 군현제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봉건제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봉건제가 좋은 제도라며 일본 예찬 소재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을 해야 할 필요가 대두하자, 그들은 일본도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낯선 서양 정치사상을 수입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봉건제-군현제라는,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세월 그 장단점이 논의된 낯익은 정치제도에 관한 토의를 정치체제 변혁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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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가는 시시포스의 운명 이번 학기, 뜻하지 않게 <역사공부의 기초>라는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딱딱한 제목의 과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원래 <사학개론>이었던 과목에 저런 타이틀이 붙었다. 랑케, 크로체, 콜링우드, 역사에서의 주관과 객관, 사회와 역사가…. 뭐 이런 역사철학과 서양사학사에 관한 것이니, 지금까지 서양사 교수들이 담당해왔는데, 어찌어찌하다 내 몫이 되었다. 해서 그 유명한 E 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각 잡고 읽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하도 여러 사람이 인용해(아마 다 읽고 인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조금은 진부해진 그 구절로 잘 알려진 책 말이다. 저 인용구의 전모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김택현 역 <역사란 무엇인가> 46쪽)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역사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맺은 결론이다. 생각보다(?) 훌륭한 책이었다. 그래도 역사공부를 몇십년 하고 나서 읽어 그런지, 재미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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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시대의 묘지 싸움, 산송 설 연휴가 후딱 지나갔다. 우리 집안에도 추풍령 산속에 선산(先山)이 있지만 찾은 지 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억지로라도 이끌려 성묘를 했지만, 아버지를 수도권 인근 납골당에 모셨고, 게다가 요즘은 지역 산림조합이란 곳에서 벌초 대행서비스까지 해주니 점점 더 격조해진다. 장손인 내 아들은 일찌감치 ‘제사 불이행’을 선언했는데, 아들 대에 가기도 전에 어머니의 결단(!)으로 몇년 전부터 제사는 추도식으로 대체되었다. 정말 ‘장기 조선시대’가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후반 산송(山訟)이란 게 있었다. 산에 있는 묘지를 둘러싼 싸움이다. 자기 집안 묘역에 남이 묘지를 쓸 때(투장偸葬) 관아에 소송을 거는 것이다. 태곳적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조상과 문중을 중시하는 종법질서가 조선사회를 장악해간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18,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생되었다(이하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1727년 영조가 “요사이 상언한 것을 보건대 산송이 10의 8, 9에 달한다”고 개탄했다 하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삼국·고려시대에도 중국·일본에도 없던 일이라 하니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회현상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