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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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권력붕괴는 내부균열에서부터 도쿠가와 막부 마지막 쇼군(15대)인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에 관련된 사료를 읽다가 흥미로운 걸 봤다. 요시노부는 당시 교토에서 막부정권을 뒤엎으려는 사쓰마번(薩摩藩), 조슈번(長州藩)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결국 그는 막부를 스스로 해체하고 쇼군(將軍) 자리에서 사임할 것을 선언하며 대권을 천황에게 바쳤다. 대정봉환(大政奉還, 1867년 음력 10월14일)이다. 그런데 약 한 달 전인 음력 9월10일 에도(江戶)의 기이번(紀伊藩) 저택에 한 통의 격문이 날아들었다.(<德川慶喜公傳> 7) 도쿠가와가 은고지사(德川家恩顧之士) 명의로 된 이 투서에는 현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히토쓰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로 지칭하며 극렬히 비방하는 문장이 가득하다. 요시노부는 1년 전 히토쓰바시 가문에 양자로 갔다가 도쿠가와가로 돌아와 쇼군에 즉위했는데,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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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서울이라는 도시 파리 올림픽 개회식이 화제다. 센강에 배를 띄워 각국 선수단을 입장시킨 것을 비롯해, 미도(美都) 파리의 매력을 한껏 뽐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도 파리에 거주한 적 있는 분들을 중심으로, 파리 예찬이 한창이다. 나는 하루 스쳐 지나간 적밖에 없지만, 이렇게 많은 이들을 매료시키는 도시를 가진 프랑스가 부럽다. 일본 교토(京都)에 가서도 부러워 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세계문화유산인 건 말할 것도 없고, 헤이안(平安) 시대 이래의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 지명 등이 사람들을 시간에 젖게 만든다. ‘지구상에 교토가 남아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한 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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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나를 적진에 보내달라! 미국 동인도함대 사령관 페리가 개국을 요구하자 일본은 패닉에 빠졌다. 에도 시민들의 눈길은 미토노공(水戶老公)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에 쏠렸다. 그는 존왕양이의 스타 정치가였지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번주 자리에서 내려온 인물이다. 당황한 막부는 하는 수 없이 그를 기용했다. 도쿠가와는 개국을 완강히 반대했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펼쳤다. 미국의 요구를 거절하고, 대신 자신을 미국에 사절단으로 파견해달라는 것이었다. 요시다 쇼인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미국은 일본을 협박하지 말고, 이번에는 물러나라. 그러면 일본이 캘리포니아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개국을 논의하겠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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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 사회는 역(役)의 체계 지난번 칼럼(5월9일자)에서 일본 사람들이 각자 맡은 ‘야쿠’(役·역할)를 수행하며 때로는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하는 ‘1억 총연극의 사회’에 대해 썼는데, 흥미롭게 여기는 분들이 제법 있어 부연설명하려고 한다. 야쿠를 역할로 번역했지만, 딱 들어맞는 느낌은 아니다. 역할보다는 좀 더 분명하고 엄격하다. 유학 시절 식당에 갔는데 일본인 종업원이 쟁반에 반찬을 올려 서빙을 해줬다. 한국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던 나는 반찬 그릇 옮기는 걸 도와주려고 손을 뻗었다. 한국에서는 아주머니가 “학생, 이것 좀 거기다 놔줘요~”라고 하기도 하지 않나(요즘도 한국에 이런 풍경이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아직 앳된 그는 흠칫 놀라며 “스미마센!”(죄송합니다)을 연발했다. 서빙이라는 자기의 야쿠에 손님이 개입한 데 놀랐던 것이고, 자신의 야쿠 수행에 무슨 큰 결함이라도 있었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장이나 종업원이 바쁜 듯하면 냉장고 안에 있는 맥주를 알아서 꺼내오는 한국인 손님을 그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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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일본, 1억 총 연극의 사회 전문직에 계신 분들과 하는 일본공부모임에서 야마구치(山口)현 호후시(防府市)를 방문한 적이 있다. 조슈번 다이묘(長州藩大名)였던 모리(毛利) 가문의 저택과 정원을 보기 위해서다. 메이지유신 후 전국의 다이묘들은 성을 허물고 도쿄에 모여 살아야 했다. 하지만 정국이 좀 안정되자 메이지 정부는 전 다이묘들에게 고향에 거주하는 걸 허락했다. 모리 가문은 조카마치(城下町)였던 하기(萩)나 경제중심지 야마구치 대신 호후에 30만㎡에 달하는 광대한 부지를 마련해 거처로 삼았다. 가신이었던 메이지 정부의 실력자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힘을 써줬다고 한다. 8만4000㎡ 규모의 정원은 가을 단풍이 특히나 절경이다. 저택은 국가에 기증하여 모리씨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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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4년간 각국 혁명사가들과 진행한 ‘혁명비교연구’의 출판이 이뤄진다(2023년 1월19일자 본 칼럼 ‘한국혁명’ 참조).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고치고 결론을 새로 쓰다 보니 ‘점진적 대변혁’이란 메이지유신의 특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일찌감치 군현제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봉건제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봉건제가 좋은 제도라며 일본 예찬 소재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을 해야 할 필요가 대두하자, 그들은 일본도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낯선 서양 정치사상을 수입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봉건제-군현제라는,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세월 그 장단점이 논의된 낯익은 정치제도에 관한 토의를 정치체제 변혁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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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역사가는 시시포스의 운명 이번 학기, 뜻하지 않게 <역사공부의 기초>라는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딱딱한 제목의 과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원래 <사학개론>이었던 과목에 저런 타이틀이 붙었다. 랑케, 크로체, 콜링우드, 역사에서의 주관과 객관, 사회와 역사가…. 뭐 이런 역사철학과 서양사학사에 관한 것이니, 지금까지 서양사 교수들이 담당해왔는데, 어찌어찌하다 내 몫이 되었다. 해서 그 유명한 E 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각 잡고 읽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하도 여러 사람이 인용해(아마 다 읽고 인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조금은 진부해진 그 구절로 잘 알려진 책 말이다. 저 인용구의 전모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김택현 역 <역사란 무엇인가> 46쪽)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역사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맺은 결론이다. 생각보다(?) 훌륭한 책이었다. 그래도 역사공부를 몇십년 하고 나서 읽어 그런지, 재미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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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조선시대의 묘지 싸움, 산송 설 연휴가 후딱 지나갔다. 우리 집안에도 추풍령 산속에 선산(先山)이 있지만 찾은 지 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억지로라도 이끌려 성묘를 했지만, 아버지를 수도권 인근 납골당에 모셨고, 게다가 요즘은 지역 산림조합이란 곳에서 벌초 대행서비스까지 해주니 점점 더 격조해진다. 장손인 내 아들은 일찌감치 ‘제사 불이행’을 선언했는데, 아들 대에 가기도 전에 어머니의 결단(!)으로 몇년 전부터 제사는 추도식으로 대체되었다. 정말 ‘장기 조선시대’가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후반 산송(山訟)이란 게 있었다. 산에 있는 묘지를 둘러싼 싸움이다. 자기 집안 묘역에 남이 묘지를 쓸 때(투장偸葬) 관아에 소송을 거는 것이다. 태곳적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조상과 문중을 중시하는 종법질서가 조선사회를 장악해간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18,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생되었다(이하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1727년 영조가 “요사이 상언한 것을 보건대 산송이 10의 8, 9에 달한다”고 개탄했다 하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삼국·고려시대에도 중국·일본에도 없던 일이라 하니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회현상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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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보석 같은 대만 민주주의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는 감격적이다.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성숙한 모습을 세계에 과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와 독재의 ‘가치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독재국가의 큰형 격인 중국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멋지다. 여기서 근대 동아시아 헌정사를 잠시 살펴보자. 군현제(郡縣制)보다 봉건제 사회에서 신분제가 더욱 강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은 알려진 대로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신분의회에서 출발한 의회제가 조선, 중국 같은 군현제보다 유럽, 일본 같은 봉건제 국가에서 발생하고 쉽게 수용된 것은 이해될 만하다. 물론 일본도 메이지유신에서 의회 설립까지 23년이 걸렸고, 1903년까지 5차례의 의회 폐쇄 위기가 있었지만, 군국주의 때도 미군점령기에도 결국 폐쇄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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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도쿠가와 막부 멸망은 ‘오오쿠’로부터 도쿠가와 막부 에도성(江戶城)의 메인 빌딩(혼마루고텐, 本丸御殿)은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오모테무키(表向), 쇼군(將軍)의 집무실인 나카오쿠(仲奧), 그리고 쇼군의 정처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오오쿠(大奧)로 나뉘어 있었다. 오모테무키, 나카오쿠의 면적을 합쳐도 4688평이었던 데 비해, 오오쿠는 6310평이었다. 안 그래도 사치스러웠던 오오쿠는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1773~1841) 재임기에 더욱 호화로워졌다. 보통 쇼군은 7·8명 정도의 측실을 두었는데 이 사람은 약 40명을 두었다. 그중에 정실(미다이 도코로, 御台所)을 포함해 17명의 여인에게서 자녀 55명을 낳았다. 측실이 많아지니 자연히 부속인원과 경비도 한층 늘어, 많을 때는 오오쿠 인원 1000명, 경비는 막부 1년 예산의 20%에 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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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평화는 전쟁의 ‘브레이크 타임?’ 지난 금요일부터 3일에 걸쳐 한·일 역사가 23회째 회의가 서울대에서 있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후 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올해가 23회째다. 한·일관계의 파탄, 코로나19 등 난관을 뚫고 어렵사리 23년째 계속해 오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제는 <역사에서의 전쟁과 문명>이었다. <서양 과학기술문명의 야누스적 두 얼굴-양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내주 교수는 3500년에 걸친 인류문명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불과 268년이었다는 통계를 소개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정말 그렇다면 평화란 다음 전쟁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의 휴식일 뿐인 셈이다. 참 무서운 얘기다. 이 통계의 당부(當否)는 차치하고라도 인류가 부지런히도 전쟁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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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현실 새로운 한국 근대사상을 꿈꾸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연구팀의 팀 티칭에 나도 한자리 끼게 된 것이었다. 사학과가 아닌 학생들과 하는 수업은 항상 즐겁다(물론 사학과 수업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학도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던지는 아이디어와 질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대, 자연대 등 이과생들은 특히 그렇고 사회대 학생들의 반응도 늘 신선하다. 역사학도들(역사학자 포함)은 뭔가 특유의 시각, 문제의식 심지어는 공통의 표정이 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집단사고(group thinking)로 경직화할 우려가 있다. 역사학도들은 다른 전공,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을 널리 접해보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