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최신기사
-
역사와 현실 점진적 방법으로 이뤄진 변혁 4년간 각국 혁명사가들과 진행한 ‘혁명비교연구’의 출판이 이뤄진다(2023년 1월19일자 본 칼럼 ‘한국혁명’ 참조).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던 원고를 고치고 결론을 새로 쓰다 보니 ‘점진적 대변혁’이란 메이지유신의 특징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중국과 조선이 일찌감치 군현제로 전환한 데 반해 일본은 메이지유신 때까지 봉건제로 남아 있었다. 도쿠가와 시대 대다수 지식인들은 봉건제가 좋은 제도라며 일본 예찬 소재로 삼았다. 19세기 중반 서양의 위협 앞에서 중앙집권을 해야 할 필요가 대두하자, 그들은 일본도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낯선 서양 정치사상을 수입해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기보단 봉건제-군현제라는, 동아시아에서 장구한 세월 그 장단점이 논의된 낯익은 정치제도에 관한 토의를 정치체제 변혁의 단서로 삼은 것이다.
-
역사와 현실 역사가는 시시포스의 운명 이번 학기, 뜻하지 않게 <역사공부의 기초>라는 강의를 맡게 되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딱딱한 제목의 과목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 원래 <사학개론>이었던 과목에 저런 타이틀이 붙었다. 랑케, 크로체, 콜링우드, 역사에서의 주관과 객관, 사회와 역사가…. 뭐 이런 역사철학과 서양사학사에 관한 것이니, 지금까지 서양사 교수들이 담당해왔는데, 어찌어찌하다 내 몫이 되었다. 해서 그 유명한 E H 카(1892~1982)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각 잡고 읽었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하도 여러 사람이 인용해(아마 다 읽고 인용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조금은 진부해진 그 구절로 잘 알려진 책 말이다. 저 인용구의 전모는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facts)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김택현 역 <역사란 무엇인가> 46쪽)다. 사실과 해석 사이에서 역사가는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를 설명하면서 맺은 결론이다. 생각보다(?) 훌륭한 책이었다. 그래도 역사공부를 몇십년 하고 나서 읽어 그런지, 재미까지 있었다.
-
역사와 현실 조선시대의 묘지 싸움, 산송 설 연휴가 후딱 지나갔다. 우리 집안에도 추풍령 산속에 선산(先山)이 있지만 찾은 지 좀 되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억지로라도 이끌려 성묘를 했지만, 아버지를 수도권 인근 납골당에 모셨고, 게다가 요즘은 지역 산림조합이란 곳에서 벌초 대행서비스까지 해주니 점점 더 격조해진다. 장손인 내 아들은 일찌감치 ‘제사 불이행’을 선언했는데, 아들 대에 가기도 전에 어머니의 결단(!)으로 몇년 전부터 제사는 추도식으로 대체되었다. 정말 ‘장기 조선시대’가 저물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조선시대 후반 산송(山訟)이란 게 있었다. 산에 있는 묘지를 둘러싼 싸움이다. 자기 집안 묘역에 남이 묘지를 쓸 때(투장偸葬) 관아에 소송을 거는 것이다. 태곳적부터 있었던 건 아니고 조상과 문중을 중시하는 종법질서가 조선사회를 장악해간 16세기 후반부터 시작해 18, 19세기에 집중적으로 발생되었다(이하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1727년 영조가 “요사이 상언한 것을 보건대 산송이 10의 8, 9에 달한다”고 개탄했다 하니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겠다. 삼국·고려시대에도 중국·일본에도 없던 일이라 하니 조선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회현상이겠다.
-
역사와 현실 보석 같은 대만 민주주의 지난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 선거는 감격적이다. 동아시아 민주주의의 성숙한 모습을 세계에 과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와 독재의 ‘가치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금, 독재국가의 큰형 격인 중국의 코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멋지다. 여기서 근대 동아시아 헌정사를 잠시 살펴보자. 군현제(郡縣制)보다 봉건제 사회에서 신분제가 더욱 강고하게 유지되었다는 점은 알려진 대로다. 그러니 기본적으로 신분의회에서 출발한 의회제가 조선, 중국 같은 군현제보다 유럽, 일본 같은 봉건제 국가에서 발생하고 쉽게 수용된 것은 이해될 만하다. 물론 일본도 메이지유신에서 의회 설립까지 23년이 걸렸고, 1903년까지 5차례의 의회 폐쇄 위기가 있었지만, 군국주의 때도 미군점령기에도 결국 폐쇄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
역사와 현실 도쿠가와 막부 멸망은 ‘오오쿠’로부터 도쿠가와 막부 에도성(江戶城)의 메인 빌딩(혼마루고텐, 本丸御殿)은 신하들이 정무를 보는 오모테무키(表向), 쇼군(將軍)의 집무실인 나카오쿠(仲奧), 그리고 쇼군의 정처와 후궁들이 거주하는 오오쿠(大奧)로 나뉘어 있었다. 오모테무키, 나카오쿠의 면적을 합쳐도 4688평이었던 데 비해, 오오쿠는 6310평이었다. 안 그래도 사치스러웠던 오오쿠는 9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1773~1841) 재임기에 더욱 호화로워졌다. 보통 쇼군은 7·8명 정도의 측실을 두었는데 이 사람은 약 40명을 두었다. 그중에 정실(미다이 도코로, 御台所)을 포함해 17명의 여인에게서 자녀 55명을 낳았다. 측실이 많아지니 자연히 부속인원과 경비도 한층 늘어, 많을 때는 오오쿠 인원 1000명, 경비는 막부 1년 예산의 20%에 달하기도 했다.
-
역사와 현실 평화는 전쟁의 ‘브레이크 타임?’ 지난 금요일부터 3일에 걸쳐 한·일 역사가 23회째 회의가 서울대에서 있었다. 1998년 김대중-오부치 선언 후 모임이 만들어진 이래 올해가 23회째다. 한·일관계의 파탄, 코로나19 등 난관을 뚫고 어렵사리 23년째 계속해 오다니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주제는 <역사에서의 전쟁과 문명>이었다. <서양 과학기술문명의 야누스적 두 얼굴-양차 세계대전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이내주 교수는 3500년에 걸친 인류문명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기간은 불과 268년이었다는 통계를 소개하며 얘기를 시작했다. 정말 그렇다면 평화란 다음 전쟁을 기다리는 동안 잠깐의 휴식일 뿐인 셈이다. 참 무서운 얘기다. 이 통계의 당부(當否)는 차치하고라도 인류가 부지런히도 전쟁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
역사와 현실 새로운 한국 근대사상을 꿈꾸며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학생들을 상대로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연구팀의 팀 티칭에 나도 한자리 끼게 된 것이었다. 사학과가 아닌 학생들과 하는 수업은 항상 즐겁다(물론 사학과 수업이 재미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역사학도들과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던지는 아이디어와 질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대, 자연대 등 이과생들은 특히 그렇고 사회대 학생들의 반응도 늘 신선하다. 역사학도들(역사학자 포함)은 뭔가 특유의 시각, 문제의식 심지어는 공통의 표정이 있다. 그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자칫 집단사고(group thinking)로 경직화할 우려가 있다. 역사학도들은 다른 전공, 다른 직업군의 사람들을 널리 접해보는 게 좋다.
-
역사와 현실 김대건과 요시다 쇼인 지난 주말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스물두번째 편지>를 봤다. 김대건이 프랑스인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통해 그의 삶과 시대를 조명한 작품이었다. 내 머릿속에 김대건의 존재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올해 3월 서울대 역사학부 답사로 그의 생가가 있는 충남 내포 솔뫼 성지에 갔을 때였다. 이곳은 바닷물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내지에 포구를 형성하고 있어 서울은 물론 중국과도 왕래가 쉬웠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천주교가 번성했는데, 김대건 가문은 증조부, 종조부, 부친, 그리고 본인까지 4대가 순교했다.
-
역사와 현실 감옥과 너무 친한 한국 사회 지난 주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머그샷(범인식별용 사진)을 찍은 게 화제가 됐다. 미국 전·현직 대통령을 통틀어 형사 기소를 당한 것도, 이런 사진이 찍힌 것도 처음이라고 한다. 지폐와 동전에 역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점점이 박아놓은 미국인들인 만큼 충격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나저나 역대 45명의 대통령 중 구속이나 투옥은 고사하고 형사 기소를 당한 것도 처음이라니, 현직 포함 13명의 대통령 중 3분의 2 이상이 감옥 신세를 진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선 신기한 느낌이다.
-
역사와 현실 아! 1898년 1898년은 한국근대사의 분수령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 발발로 일본이 세운 갑오정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근대적 정책을 쏟아냈다. 하지만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고, 너무 서두른 탓에 민심을 얻지 못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세력이 쇠퇴하고 고종이 아관파천을 해버리자 단박에 무너졌다. 고종은 러시아에 의지하려고 했지만, 독립협회에 집결한 개화파들은 그 러시아마저 밀어내고자 했다.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와 군대 주둔을 계획하자 독립협회는 종로에 초유의 대중 집회를 조직했다(1898·3·10). 여기에는 서울시민의 17분의 1인 1만여명이 운집했다
-
역사와 현실 전라도 천년사 ‘논쟁’ <전라도 천년사> 논쟁이 뜨겁다. <전라도 천년사>는 2018년부터 5년간 광주시,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213명의 필진을 모아 24억원을 들여 전 34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총집결해 진행해온 작업으로 그에 대해 학계에서 문제 삼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학계 바깥에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실 ‘논쟁’은 아니다. 논쟁이란 모름지기 공통의 룰에 기반하여 팩트와 논리로 승부를 겨루는 게임이다. 그런데 이 ‘논쟁’은 그런 성격의 다툼이 아니다. 팩트의 오류와 논리의 허점을 아무리 지적해도 들은 척도 안 하고 자기 얘기만 반복한다. 이런 무의미한 다툼이 공공기관의 토론회나 심지어는 TV토론회에서 멀쩡하게 전개된다. 유튜브로 잠깐 들여다보니 <전라도 천년사>를 집필한 학자들이 상대 측 패널들을 향해 성심성의껏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보면서도 화가 나던데 용케도 점잖은 태도를 잃지 않고 ‘토론’에 임하고들 계셨다. 경의를 표하며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
역사와 현실 동아시아의 반공주의 이승만은 자신이 하와이에서 발행하던 ‘태평양잡지’에 ‘공산당의 당부당(當不當)’이라는 글을 게재했다(1923년 3월호).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으로 세워진 소련이 전 세계 피압박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던 시기였다. 조선의 많은 독립운동가, 지식인들도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소련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 비판을 감행한 것이다. 그는 먼저 양반, 상놈 하는 신분제가 없어진 자리를 자본가-노동자 간의 빈부격차가 대신해버린 세태를 비판하며, 공산주의의 평등 주장을 일단 평가했다. 그러나 재산을 나눠 갖게 되면 소수의 부지런한 사람이 다수의 게으른 사람을 먹여 살리게 될 것이고, 자본가를 없애버리면 혁신과 진보는 중지될 것이며, 보통 사람의 학식을 높여 지식인과 대등하게 만들어야지 지식인을 아예 없애자는 것은 안 될 말이다 등의 이유를 대며 공산주의의 부당성을 갈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