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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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여름철 입맛 돋우는, 냉국 무더위에 숨이 막힌다. 애오라지 냉국 한 사발 들이켜고 싶다. 물 많이 잡아 삼삼하게 담근 여름김치도 고맙지만 대접 한가득 담긴 냉국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어, 시원타!’를 외치는 여름날의 맛, 그 관능은 어떤가. 한국인의 여름에 아로새긴 이 음식은 과연 언제 태어났을까? 무어라 단언하기 어렵다. 그저 문헌과 민속자료를 따라갈 뿐이다. 20세기 전반의 어휘부터 재밌다. 그때는 조선어 매체마다 사물의 이름, 어휘의 선택을 두고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다. 예컨대 같은 음식의 이름을 놓고 칼국수, 제비국, 밀국수가 표준 경쟁을 했다. 수제비는 밀수제비, 뜨적제비 등과 경쟁했다. 그러다 남은 표준어로 ‘수제비’를, 북은 문화어로 ‘뜨더국’을 택해 오늘에 이른다. 냉국도 그랬다. 그때에는 ‘냉국’과 함께 ‘생갱(生羹)’ ‘찬국’, ‘창국’이 나란히 쓰였다. 이윽고 1938년 문세영(1888~?)이 엮은 <조선어사전>에 ‘냉국’이 대표 표제어로 오르면서 ‘찬국’은 냉국 뒤로 물러났다. 오늘날 북의 문화어에서는 ‘랭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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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묵 묵은 곡물의 낟알, 나무의 열매, 식물의 뿌리 또는 덩이줄기의 녹말에서 앙금을 받아, 풀을 쑤어 굳힌 음식이다. 메밀, 도토리, 녹두, 동부, 옥수수, 고구마, 밤, 고사리, 칡, 올방개 등은 그동안 한국인이 이용해온 묵의 재료이다. 박대, 상어, 장어 등의 생선껍질을 고아 굳힌 음식도 묵이라 이른다. 이는 생선의 콜라겐을 이용한 것이다. 네발짐승이나 조류에서 온 콜라겐도 묵과 같은 먹을거리가 된다. 우족이나 돼지족이나 닭발을 가지고 만드는 ‘족편’ 동아리의 음식 또한 원리는 박대묵 등과 같다. 우뭇가사리 같은 해조류의 카라기난과 알긴산을 잘 다루어도 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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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도미 아차, 이러다 도미 맛도 보기 전에 이 봄이 이울지도 모른다. 계절의 감각이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봄날은 이제 내게 얼굴만 보여주고 손 한 번 쥘 틈 없이 총총 떠나는 계절이 된 듯하다. 이 판에 도미를 바라 입맛을 다시는 형이하학이 방정맞긴 하다만,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는 바닷물고기가 또한 도미이다. 한국인의 입말과 한국어 사전에서 ‘도미’는 도밋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일체를 이르는 말이다. 요컨대 참돔·먹돔(감성돔)·붉돔·황돔·혹돔·줄돔·군평선이 등등이 다. 도미라는 동아리에 들되 일반적으로 도미라고 하면 ‘참돔’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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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딸기 ‘Enjoyed the strawberries and cake well enough.’ 미국 밴더빌트대학교의 조선인 유학생 윤치호(尹致昊, 1865~1945)는 한 모임에 나가 ‘딸기와 케이크를 만족할 만큼 즐겼다’. 1890년 3월15일 그가 영어로 써서 남긴 일기 속 한 장면이다. 윤치호는 미국으로 건너가 난생처음 딸기를 만났다. 북미의 넉넉한 가정이 손님에게 딸기에다 케이크며 아이스크림을 곁들여 대접한 덕분에 이후로도 딸기를 즐길 기회는 더 있었다. 몇 해 지난 1896년 5월26일 윤치호는 러시아에 있었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는 조선 사절단의 일원으로 크렘린을 방문한 것이다. 이날 윤치호는 너무나 힘들었다. <윤치호일기>에 따르면 사절단장 민영환은 변덕이 심했고, 또 다른 수행원 김득련은 술고래(fish)에 지나지 않았다. 대관식 만찬 앞에서도 무엇을 차렸네, 맛이 어떠하네 할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이날 일기에 남은 먹을거리는 딸기뿐이다. 비용을 아끼지 않은 풍성한 만찬(A substantial dinner)의 증거는 딸기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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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쑥 봄은 봄나물이다. 설 지났다고 추위가 가실 리 없다. 꽃샘추위가 남아 있음을 모두 잘 안다. 그래도 사뭇 길어진 해 아래 새싹이 언뜻 비치고 나면 삽시간에 봄이 번질 테다. 아직 산나물은 이르다. 새싹은 볕이 곱게 들어와 앉는 들에서부터 움튼다. 쑥은 이때의 전령이다. 쑥은 겨울 막바지에 이미 머리를 살짝 내밀고, 어느새 덜 풀린 땅을 풀빛으로 물들인다. 그 봄기운을 음식으로 옮기는 방법이 문헌 곳곳에 남아 있다. 그 가운데 19세기 말 쓰인 <시의전서(是議全書)> 속 ‘애탕’ 항목은 봄노래처럼 경쾌하다. “세말춘초(연말과 새봄 사이)에 움 돋는 쑥을 뜯어다 깨끗이 다듬고 씻어 한 줌만 다진다. 소고기는 한 줌 부피가 되게 다져 쑥 다진 것과 합하여 기름장·양념을 갖춰 넣어 주물러서 밤만큼 환(丸·완자)을 만든다. 계란은 깨어 풀어 놓고, 장국이 팔팔 끓거든 환에 계란을 묻혀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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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생활의 한 토막 “승재와 계봉이는 종로 네거리에서 전차를 내려, 바로 빌딩의 식당으로 올라갔다. 계봉이도 시장은 했지만, 배가 고프다 못해 허리가 꼬부라졌다. 모처럼 둘이 마주 앉아서 먹는 저녁이다.” 1930년대 말에 쓰인 채만식(1902~1950)의 소설 <탁류> 속 어느 장면이 각별하지 않겠는가마는 음식이 있는 풍경 또한 못잖다. 식민지 현실이라든지 사실주의 같은 말은 잠시 접어두자. 최인호(1945~2013)에 앞서 성취한 빌딩 배경 연애는 덤이다. 고향을 떠난 젊은 남녀는 서울에서 드디어 서투나마 연인 관계로 접어든다. 함께 나눈 밥상의 추억은 두 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곡절을 압도했다. 둘은 이제 저녁을 먹으며 로맨티시즘을 연마하는 중이다. “둘이 다 같이 군산 있을 적에 계봉이가 승재를 찾아와서 밥을 지어 준다는 게 생쌀밥을 해놓고, 그래도 그 밥이 맛이 있다고 다꾸앙쪽을 반찬삼아 달게 먹곤 하던” 추억―“그런 이야기를 해가면서 둘이는 저녁밥을, 한 끼의 저녁밥이기보다 생활의 즐거운 한 토막을 누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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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짬뽕 한국어 초마면(炒碼麵), 일본어 챤폰(攙烹), 중국어 자후이몐(雜燴麵). 짬뽕을 동아시아 사람에게 써 보이자면 어떤 한자와 어휘가 좋을까? 한·중·일 세 나라 말과 한문에 능한 공부꾼들이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꽁꽁 묶어라’를 ‘필(必)자 모양으로 결박하라’로 받아썼다는 글방 농담이 새삼스러웠다. 그래서? 중문판 안내문은 알파벳 ‘Jjamppong’으로 미봉하고 말았다. 2020년 9월19일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한국화교화인연구회가 주최한 ‘군산화교 학술 웨비나-학교에서 짬뽕까지 군산화교 다시 읽기’의 막후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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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라면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 따르면 2020년 10월 말 기준, 한국 라면의 수출이 5억달러를 넘어섰다(잠정). 아닌 게 아니라 라면은 이제 한국인의 일상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음식이다. 아울러 대문자 ‘케이(K)’를 접두어로 할 만한 사물이다.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라면의 의의를 이렇게 쓰고 있다. “(전략) 특유의 맛으로 세계인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다는 점에서 감히 라면은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음식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단이 각별히 다가오는 소이는 한국 라면사가 두 세대, 곧 60년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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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굴’의 계절이 온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라래(바다에) 살어리랏다// 나마자기(나문재) 구조개랑 먹고/ 바라래 살어리랏다.” 고려 사람의 노래 ‘청산별곡’의 한 구절이다. ‘구조개’는 굴만을 이르기도 하고, 굴과 조개를 아울러 이르기도 한다. 한반도 신석기시대 이래의 일상을 켜켜이 간직한 유적인 조개무지에도 굴껍데기는 흔하다. 1123년 고려에 사신으로 온 서긍이 쓴 <선화봉사고려도경>도 재밌다. 서긍에 따르면 고기는 힘 있는 자들이 먹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수산물이 만만했다. 더구나 “굴과 대합은 조수가 빠져도 바다로 빠져나가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힘껏 거두어들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실로 고려 백성들은 ‘구조개’를 먹고살았던 것이다. 조선 사람 허균도 <도문대작>(1611)에다 굴 이야기를 남겼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의 함경남도, 강원도 바로 위 해역의 굴(石花)은 대단히 큰데 서해안의 씨알 작은 굴의 맛에는 못 미친단다. 이어 동해안의 석화(윤화·輪花)는 씨알 굵은 놈이 맛이 달다고 썼다. 미식에 눈뜬 사람들에게 굴은, 그 산지를 비교해 음미할 만한 식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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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육개장 이즈음이면 모락모락 김 피어오르는 국솥부터 머릿속에 삼삼하다. 콩나물국·북엇국·두부찌개·김치찌개·동태찌개·설렁탕 등이 절로 연상되는 순간, 내가 한국인임을 실감한다. 육개장이 빠질까. 거듭 데워도 맛이 덜 빠지는 미덕이 있는 이 음식에 대한 기록은 일찍이 시작됐다. 유득공(1748~1807)의 <경도잡지>와 홍석모(1781~1857)의 <동국세시기>에 보이는 ‘구장(狗醬)’, 곧 개장국이 육개장의 원형이다. 당시에는 개고기 장국에 파와 후추 또는 초피를 써서 맛을 냈다. 당시에는 찜과 국의 두 가지 방식이 있었다. 홍석모에 따르면 구장은 시장에서도 많이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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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밥은 바빠서 못 먹겠고…술만 술술 넘어간다” 장타령꾼의 장타령 또한 소중한 문헌이다. 저 노랫말이 보통 사람의 일상과 마음속에 자리한 술이라는 사물의 인상과 위상과 위력을 한마디로 압축하므로. 장꾼의 한잔뿐이랴. ‘왕좌의 게임’에 얽힌 거대한 한잔도 있다. 고려 시인 이규보(李奎報, 1169~1241)가 쓴 고구려 건국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 속의 한잔은 건국의 시초가 된 잔이다. 다섯 마리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는, 인간의 세계에서 처음 마주친 여인 유화를 유혹할 적에 술을 동원했다. 황금 동이에서 따른 한잔이야말로 하룻밤 사랑의 중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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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의 문헌 속 ‘밥상’ 토마토 “여름 과실 중의 여왕.” 1930년대 한 조선어 매체가 토마토에 붙인 말이다. 당시 토마토는 감처럼 생긴 한해살이 식물이라 해서 ‘일년감’, 밭에서 난다고 해서 ‘땅감’으로 불렸다. 토마토는 그때에도 채소보다는 과실 대접을 받았다. 17세기에 조선으로 들어와 붙은 이름 또한 ‘남만시(南蠻柹)’다. ‘시(柹)’가 곧 ‘감’이다.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조선은 중국을 통해 토마토를 들여왔다. 고추·감자·옥수수 등이 아메리카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 곧 남만을 거쳐, 중국 또는 일본을 지나 조선에 온 경로 그대로다. 조선 사람이 17세기 즈음에 접한 토마토는 감 맛이 나는 신기한 과채였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재배되지는 않았다. 이규경(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토마토는 엄지손가락만 한 짙은 선홍색 열매가 사랑스럽기는 하지만 의미 있는 작물인 고추와 헷갈리는 잡초에 지나지 않았다.